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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문화(茶文化)의 역사

작성일 작성자 심터

한국 차문화(茶文化)의 역사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2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속에서 우리의 차문화는 생활속에 깊숙히 뿌리를 내려 각계 각층의 사ㄹㅁ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다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우리선조들은 차(茶)를 신성하고 성스런 것으로 여겨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천이나, 조상님들 제전에는 꼭 올리는 제수로 삼았다. 그 의식이 성스러우면 더욱 차는 빼놓을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명절에 꼭 차례(茶禮)를 올리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차문화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부터 비록되어, 산천을 거쳐 집안으로 들어와 차례상에 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 시대에는 백두산에서 나는 백산차(白山茶)를 사용하였다.

이 백산차는 백두산 주변과 고산지대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철쭉과에 속한다. 봄철이면 연록색의 엷은 잎이 피는데, 이 때 이파리를 따서 차를 만들어 마신다. 이 백산차를 마신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이 지역 주면들은 지금도 이 차를 마시고 있는데, 이 차는 동이족(東夷族) 의 고야차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나무로 만들은 차(茶)를 마시게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백산차는 밀려나고 그 자리를 중국 녹차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독자적인 차생활을 창조해가며 차문화는 계승 되었다.

(1) 삼국의 차

삼국시대에 주로 차생활을 한 사람들은 모두가 귀족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왕과 왕족들 그리고 사대부의 귀족들과 사원의 고승들, 선랑 또는 화랑들이다.

왕족들은 궁궐안으로 차를 끌어들여 차생활을 하였으며 속님 접대와 예물로 차를 사용하였다. 더욱이 고승들에게 예물을 보낼때는 차와 향을 보내었다.

귀족들 역시 차생활을 즐겼으며 손님 접대에는 최고의 대접으로 차를 내 놓았다. 그리고 사원의 승려들은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데 사용하였고, 여가에 즐겨 마시는 기호품으로 삼았다. 선랑(仙郞) 또는 화랑(花郞)들은 심산유곡을 찾아 심신수련을 할 때 차를 마시며 하였다. 차는 이와같이 훌륭한 예물도 되고 심신 수행의 도반도 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는 멋의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이미 삼국시대에 그 정신적 배경이 정립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헌안왕(憲安王)이 수철화상(秀澈和尙)의 제사에 올리도록 차와 향을 보낸 것이 효시가 되어 제사에 차 올리는 풍속이 생겨나게 된 것이며, 충담선사(忠談禪師)가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께 올린 차가 헌다의식(獻茶儀式)의 시원이 되었으며, 사선랑(四仙郞:영랑, 술랑, 남랑, 인상) 이 강릉 경포대, 한송정(寒松亭) 등지에서 차 생활을 하면서 심신 수행을 하였으며, 설총, 최치원 등 선비들은 차를 호연지기를 기르며, 정신을 맑히는 음료로 활용 하였다. 이와 같은 차 문화는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2) 고려의 차

고려의 차문화는 네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왕실차, 귀족차, 사원차, 서민차가 그것이다.

왕실차는 궁중에서 거행하는 차로서 다방(茶房)이라는 관청을 설치해 두고 왕과 왕비, 태자와 공주 등 왕족들의 차 생활을 돕고, 국가의 중요한 진다의식(進茶儀式) 때에 차를 올리는 의식을 집행하였다. 고려 때는 사례(四禮:길례, 흉례, 빈례, 가례)를 지냈는데 이 때에 모두 차를 올리는 진다의식을 봉행 하였다. 공이 많은 신하들이 죽으면 부의품으로 많은 차를 하사하기도 하고 외국에 공물로 보내기도 하며, 왕과 왕비 등의 책봉식(冊封式)과 공주를 시집보낼 때 외국사신을 접대 할 때,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치를 때 모두 진다의식을 했다.

이처럼 왕실차는 지극히 의식적이고 의례적이어서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였다. 왕이나 왕세자가 차를 마실 때에는 진악(進樂)까지 따랐으니 그 장엄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또한 궁중에 양이정(養怡亭)이나 모정(茅亭)같은 다정(茶亭)을 지어놓고 많은 시신들을 불러 모아서 다회(茶會)나 시회(詩會)를 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의례음다법(儀禮飮茶法)이 생겨난 것이다.

귀족차(貴族茶)는 나라의 원로나 지방관등 사대부들이 즐기던 차 생활을 말한다. 귀빈 접대를 할 때나, 한가하게 다회를 할 때 하는 음다법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원로들이 모여 만든 강좌칠현(江左七賢)이나, 기로회(耆老會)가 대표적인 차의 모임이다. 이들은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가무(歌舞) 시주(詩酒) 끽다(喫茶)로 풍류(風流)놀이를 하였다.

여기에서 풍류음다법(風流飮茶法)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다시(茶時)는 이로부터 발달되었다.

사원차(寺院茶)는 사원의 승려들이 부처님께 헌다(獻茶)하거나, 여가에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을 말한다.

사원에서는 매일 조석으로 삼시때 불전에 차공양을 올린다. 그리고 공덕제(功德祭)가 있으면 임금이 직접 차를 달여 불전에 올렸다. 뿐만 아니라 조사스님들 제전에도 차공양을 올리며, 공양을 마치고 나면 차 마시는 시간이 있고, 참선수행을 하다가 쉴 때에도 졸음을 쫓는 차를 마신다. 또는 손님을 대접할 때는 술 대신 차를 내 놓았다. 이처럼 사원에서는 매일 차를 마셨으며 특히 선승(禪僧)들은 참선하는 중에 차를 즐겼다. 차의 삼매(三昧)에 빠지곤 했는데 여기에서 삼매음다법(三昧飮茶法)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마시는 차를 충당하기 위해서 사찰 입구에 다촌(茶村)이라는 마을을 두고 차를 만들어 사원에 물과 함께 바치게 하였다.

서민차(庶民茶)는 일반 서민들이 차세금(茶稅)을 징수하고 난 다음 끝물을 채취해서 약용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감기, 몸살, 두통이 생기면 약탕관에 차와 물을 넣고 끓인다. 이 때 생강이나 파를 넣고 함께 끓이면 좋은 약차가 된다. 이것을 마시면 감기 몸살이 씻은 듯이 낫는다. 이로 말미암아 약용음다법(藥用飮茶法)이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 생겨난 다세(茶稅) 제도는 매우 혹독해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 지리산 주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관청의 독촉에 못 이겨 잔설이 쌓여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가 맹수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차잎을 채취해서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개경(開京)까지 가져다 바쳤다. 이렇게 초봄부터 여름까지 하니 농사철을 놓치고 폐농 하기가 일쑤였다. 이 폐단이 차를 산업화하지 못하게 한 큰 원인이 되었다.

고려의 茶人들을 차도구를 화려하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래서 고려청자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금화오잔(金花烏盞), 비색소구(秘色小甌) 등의 찻잔은 절묘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선승들은 찻잔을 직접 생산하기도 했는데, 계룡산 갑사(岬寺)와 동학사(東鶴寺) 가 대표적이다. 이 찻잔 속에는 선적(禪的)인 무(無)와 공(空)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다.

고려인들이 즐겨 마신 차는 뇌원다(腦原茶)와 대다(大茶)를 꼽을 수가 있다. 뇌원다는 떡차이고 대다는 잎차이다. 이외로 유다(孺茶), 자순차(紫筍茶), 영아차(靈芽茶)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인들은 차를 선물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차 선물을 받으면 으레히 시(詩)로서 답례를 해야하만 한다. 풍류의 멋이 있는 사람은 십여 편씩의 시를 지었다. 이러한 고려의 다풍(茶風)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3) 조선의 차

조선의 차문화는 전기는 고려의 다풍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중기에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2백년간 공백기를 거치게 된다. 그 후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艸衣禪師)와 다산(茶山) 정약용, 추사(秋史) 김정희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차문화 중흥이 계기가 되어 후기에는 다시 차문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또다시 우리의 차문화는 빚을 잃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하자 고려의 유신들은 산 속으로 은거하고, 선승들마저 배불숭유 정책에 밀려 산 속으로 피해 들어간다. 그래서 조선 초에는 산 속에 은거한 선비들과 선승들에 의해 계승된 차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관인으로 남아 차 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관인문화와 은둔 문화로 나뉘게 된다 이것을 관인차와 은둔차라고 한다. 관인차는 다시(茶時)제도를 만들어 내어 하루에 한차례씩 모여 차를 마시면서 정사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관원들이 부정한 관리를 발견하면 탄핵할 때 밤에 다시를 했다. 이것을 야다시(夜茶時)라고 한다. 이 때 차를 끓여 주는 일을 담당한 사람을 다모(茶母)라고 한다. 임금의 차 시중을 드는 사람은 상다(尙茶)라고 하고 고급 관청의 차 시중은 다색(茶色)이라 하고 하급 관청의 차 시중은 다모(茶母)가 들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차문화가 쇠퇴하여 차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영조(英祖)는 왕명을 내려 차 대신 술(酒)이나 끓인 물로서 대신하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때나 명절 때에 차 대신 술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차문화는 쇠퇴를 했지만 명맥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궁중에는 궁중의 법도에 맞는 다례의식이 있었다. 이것을 궁중다례라고 한다. 그 의식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은 관혼상제를 모두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의거하여 다례를 지냈으며, 사원에서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운수단(雲水壇)과 백파선사(白坡禪師)의 구감(龜鑑)에 근거하여 다례를 지내었다. 이처럼 의식만 남고 문화는 쇠퇴한 상태로 계승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고 다신전(茶神傳)을 펴냈으며, 다산은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여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을 만들어 차문화 중흥을 도모하였다. 추사는 다시(茶詩)를 지어 당시에 옛 풍류를 진작 시켰다. 이 때부터 다시(茶詩)를 지어 당시에 옛 풍류를 진작 시켰다. 이 때부터 다시(茶詩)가 많이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중흥의 기미를 보이던 차문화는 한일 합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다시 빛을 잃고 암흑 속에 묻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일본의 차문화를 한국에 심기 위해서 우리나라 차문화 연구와 교육에까지 손을 대 의무적으로 여학교에서 일본다도 교육을 실시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 차 문화를 거세게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차문화는 광복이 된 후에 옛 법도와 풍류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다시 부흥이 되어야만 한다. 전통 문화는 그 민족의 자존심이자 그 민족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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