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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고려시대 비운의 왕 '충선왕'

작성일 작성자 화성인 m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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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는 '황영두님의 블로그' 에서 가져와 일부 편집했습니다. 

 

 

 충선왕(1298, 1308~1313)

전지 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원으로부터 심양왕 직위 받음. 대체로 자주적, 학구적 인물임(이제현과 교류:익재난고,역옹패설)

부왕 충렬왕과 불화 -> 왕위쟁탈

충렬왕이 죽자 그의 3째 부인과 불륜.

1298 개혁정치(공신전 환급,정방폐지 : 반원적 개혁)를 시도하나 계국공주의 질투(vs 조비)로 실권

1308 2개월간의 개혁 정치 시도. 이후 원나라 연경에 머물며 전지 정치 실시.

환국요청거부로 충숙왕에게 왕위 양도. 하지만 실권을 계속 잡음.

 

 

 티베트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

 

고려 26대왕인 충선왕 그는 46살이 되던 해인 1320년 예기치 못한 운명을 맞게 된다. 한 나라의 국왕인 그에게 유배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충선왕의 유베지는 당시의 토본으로 지금의 티베트. 그 곳에 도착하는데만도 무려 반년이나 걸리는 험난한 길어였다. 고려 충선왕이 그 먼나라까지 유베를 간 까닭은...

 

 

 

 

 

1320년12월(14세기 경) 무신일에 원나라 황제가 상왕(충선왕)에게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 살사결로 유배 보내다. 충선왕은 샤카에서 2년6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그리고 도스마라는 지역으로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7개월간 머문 뒤에야 유배에서 풀려난다.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성종)의 외손자이다. 쿠빌라이의 딸이 충선왕의 어머니이다. 쿠빌라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원제국의 기반을 쌓은 인물이다.
 
고종 18년인 1231년 몽골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30여년간 항쟁을 한다. 그리고 결국 30여년만에 고려는 원과의 강화에 이르게 된다. 그 이유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본토가 초토화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때마침 원나라의 강화조건이 완화됐다.
 
원나라의 강화조건이 완화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남송정복을 꽤하던 원나라는 남송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원나라의 황제인 헌종(1259년 원황제 몽케 사망)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원나라 황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황제의 자리를 놓고 헌종의 다섯 아들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중 황제 쟁탈전에 나선 아들은 둘째인 쿠빌라이와 막내인 에릭부케다. 당시 에릭부케는 수도 카라쿠?에 있었고 쿠빌라이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헌종이 죽자 두 아들은 서로 황제임을 주장했고, 결국 전선에 있던 쿠빌라이는 에릭부케를 치러 수도로 향한다. 두 세력간의 싸움은 4동안 치열하게 계속 됐다.
 
이즘 강화를 위해 원나라로 향하던 고려 태자(왕식)는 쿠빌라이와 에릭부케 중 누구를 만나야 할 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고려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순간이였다. 고심끝에 고려 태자가 선택한 상대는 쿠빌라이였다. 그것은 훗날 고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현명한 선택이였다.
 
이후 쿠빌라이는 동생 에릭부케를 재압하고 황제자리에 오르게 된다.(1260년 쿠빌라이 원5대 황제 등극) 그가 바로 원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세조다. 황제가 된 쿠빌라이는 고려에 우호적이였다. 강화는 고려에 유리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를 원을 직할령으로 복속하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다. 고려의 의관을 비롯한 다른 풍속들도 고려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한다. 원나라의 침략을 받았던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른 조건이였다.
 
고려 태자가 원에 있는 동안 고려 고종이 죽자 쿠빌라이는 세자를 왕으로 책봉해 고려로 돌려 보낸다.(고려 24대왕 원종) 고려로 돌아온 원종은 그로부터 11년 뒤 원나라에 한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고려 태자와 원공주 간에 혼인을 맺자는 것이다. 이로써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 제국공주가 결혼하게 되고 그 두사람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바로 충선왕이다. 그는 당시 고려와 원나라 간의 독특한 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였다.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이 40살이 되던해 왕위를 물러받는다. 충렬왕은 목숨이 위태롭지도 건강이 나쁘지도 않았다.
1298년 충선왕 즉위<당시24세>
당시 일본에 파병 된 군대 중 상당수가 고려군이였다. 일본 정벌에 나선 고려, 몽골 연합군은 전면에 나선 이들을 모두 고려군이다. 고려군이 주력군이 되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 비록 태풍으로 인해 여, 몽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지만, 충렬왕이 이렇게 몽골(원)에 일본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데는 이유가 있다. 이 시기에 가끔 발생하고 있던 왜구를 소탕하고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서 몽고제국내에서 고려왕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일본원정은 원으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한 충렬왕의 외교정책 중 하나였다. 사실 충렬왕은 즉위 초부터 원으로부터 고려의 자주를 지키려는 노력을 해왔다. 일본원정 이 후 더 강력한 요구 조건을 원에게 제안한다.
 
충렬왕은 자신의 세조와 같이 정치활동를 했던 인물. 처음에는 성종이 충렬왕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성종의 입장에서는 충렬왕의 강력한 왕권 구축이라는 것은 원에서 바람직한바가 아니고 이미 충렬왕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다고 생각한 성종(쿠빌라이)은 이를 방치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속에 원은 충렬왕을 밀어내기 위해 세자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고, 충렬왕은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원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충선왕 그런데 충선왕이 왕위에 있던 기간은 아주 짧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오른다.

 

1298년 충선왕 즉위 후 8개월 만에 전격적 퇴위
새로운 정치 파트너로 선택됐던 충선왕 역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기미가 보이자 곧바로 충선왕을 폐위. 충렬왕에 이어서 충선왕 마저도 원나라의 간섭을 최소화 하려고 노력하다가 폐위되고 만다. 하지만 충선왕은 그로부터 10년 뒤 또 다시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르고 불가 8개월만에 폐위된 뒤 충선왕은 바로 원으로 들어간다. 원에 들어온 충선왕은 훗날 원나라왕이 되는 무종, 인종의 선생님이자 인척관계였다. 충선왕과 외4촌간이 된다. 황제가 되기 전 당시 태자의 신분이였던 무종 인종과 같이 기거하며 친밀함이 남달랐다고 한다.

 

원나라 황실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무종과 아난타 두 세력간의 치열한 황제쟁탈전은 무종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과정에서 충선왕은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무종의 편에 섰으며 무종이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충선왕이 심양왕에 봉해진다. 심양은 대몽항쟁기 때 몽고에 투항한 고려사람들이 건너가 살던 땅으로 원나라 땅이지만 고려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원은 이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충선왕을 왕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로부터 고려 충렬왕이 죽자 고려국왕에 봉한다. 심양왕에 이어 다시 고려왕위에까지 오른 충선왕 이는 원에서의 충선왕의 정치적인 입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충선왕은 왕이 되었어도 고려에 오지 않고 계속 원에 머물러 있었다.(전지정치) 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대로 폐위 시킬정도로 원의 간섭이 극심했던 시기에 더욱이 한번의 폐위 경험이 있는 충선왕으로써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최선이였다. 한편, 고려 조정은 왕위를 비워둘 수 없다고 왕의 귀국을 강력히 요청한다. 충선왕의 선택은 고려로 귀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였다.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다시 원으로 돌아 온 충선왕은 여전히 원에서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원으로 돌아온 해인 1313년10월 충선왕은 과거제 실시를 건의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원에도 과거제가 실행되게 된다.

 

1320년 원 인종 사망
충선왕에게 위기가 닿친다. 충선왕의 지지기반이 사라진 것이다. 원황실에서는 또 다시 황제 자리를 놓고 분열과 갈등이 생긴다. 무종은 동생인 인종에게 왕위를 주는 대신 인종이 세상을 뜨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인종은 이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를 한다. 인종의 아들인 영종이 왕이 된다.

 

이때 충선왕은 무종의 편에 섰고, 결국 인종의 아들 영종이 황제자리 오르면서 충선왕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모함으로 북경으로 끌려가 형부로 넘겨진다. 머리가 깍인채 석불사에 앉혀진다. 결국 2개월뒤 티베트로 유배가라는 1320년10월 원나라 영종의 명령이 떨어진다.

 

한때 고려와 원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충선왕에게 닻친 기막힌 운명. 그것은 원간섭기 고려국왕의 비극적인 운명이였다. 충선왕이 북경으로 돌아온건 유배된지 3여년만이였다. 원나라 영종이 죽고 태?제가 즉위하자 충선왕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이다. 하지만 북경으로 돌아온 지 불가 2년만에 충선왕은 5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원간섭기 고려의 왕 개보도

 


폐위와 복위를 거듭했던 고려왕은 비단 충선왕 만이 아니였다. 무려 4명의 왕이 2번씩 왕위에 올랐고 그것은 바로 원간섭기 고려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였다. 충선왕의 행적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의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라는 유지했지만 원에 종속됐던 고려의 운명 속에서 그의 선택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위화도회군이 일어나기까지의 배경에 대해서는 본 블로그의 /역사/면에 있는 [위화도회군을 다시 집중조명하며]를

 

몽골의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에 대한 것은 본 블로그의 /역사/면에 있는 [몽골쥬신]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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