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강치는 외국인 피터가 일본 연안에서 발견하면서 일본강치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최초의 기록이 있으며 19세기 5만 마리 정도가 독도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75년 북해도에서 1마리 생포된 걸 마지막으로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답니다.
1994년 ‘일본의 포유류’라는 일본 책자에서 일본인들이 독도강치 포획하는 사진이 공개됐지요.
당시 일본 어부들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독도강치는 가죽이 벗겨져 가방, 바가지 등 제품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일본 호사가들에게 판매된 강치가죽 가방은 파리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피하지방은 기름으로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됐습니다.
강치 1마리 가격은 당시 황소 1마리 값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귀중한 수산자원인지 짐작이 되지요.
독도의 날인 25일 EBS와 안동MBC는 ‘독도수비대 강치’를 각각 오후 3시25분, 오후 4시 방영합니다.
당시 확인된 조선의 인구 500만 명 중에서 3분의 2에 육박하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략 20만 명 정도는 포로로 끌려갔다. 7년 난리 통에 희생된
300만 사망자와 20만 포로는 누군가의 부모자식이거나 형제자매였다.
생때같은 혈육을 빼앗긴 채 상처투성이가 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증오했다.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사죄와 배상도 없이
화친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침략하겠다는 협박을 내세우며 국교 재개를 요구했다.
이는 상처투성이인 조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이나
마찬가지였다.(이상 신명호 교수의 조선 왕조 스캔들에서 전재)
선조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화친을 요청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와 함께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을 체포해 압송하라는 것이였다.
선릉은 성종의 능이었고 정릉은 중종의 능이었다. 그 선릉과 정릉이 임진왜란 중
도굴당했다. 뿐만 아니라 성종과 중종의 관이 파헤쳐져 불태워지기까지 했고
시체는 행방이 묘연했다. 유교 가치관에서 볼 때 시체를 파내 훼손하는 것은
살인보다 더한 만행이었다.
선릉과 정릉은 1592년(선조 25) 9월쯤 도굴됐다. 당시 한양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황이었고 선조는 의주에 파천(播遷)해 있었다. 그래서 조선군도 도굴 사실을
몰랐고 선조도 몰랐다.
일본은 도굴범이라며 두 명을 보내 왔다. 가짜인 줄 알면서 두 명을 처형했고,
남아 있는 유품을 수습하여 국장을 다시 치뤘다.
요즘 일본이 독도 전쟁시 전투기를 파견하겠다느니 수출 규제로 대한민국을
핍박하는 행태를 보며 더욱 국력을 배양하여 일본에게 복수를 해야 하건만 오히려
나라가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으니 어찌하랴 ! 대한민국의 미래여 !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이 상해(上海) 사변 승리 후 상해 홍구(虹口)공원(현재 노신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행사와 전승 기념행사를 열자,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은
온 몸에 파편이 박혀 죽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지요.
일본 교토부(京都府) 출신의 이토 히로시(藤 浩志)씨는 일어로 번역된 ‘윤봉길 평전’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이어서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읽게 되었고, 그 안에서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다시 접한 뒤 해마다 한국을 방문,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는 의식을 계속한다고...
가장 존경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는 윤봉길 의사라고 생각한 그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는 물론
김구(金九),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 선생 등 한국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서 큰
족적(足跡)을 남긴 위인들의 기념관과 유적지를 마치 성지 순례하듯 돌면서 참배를 하고 있다니
일본의 아베가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면....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www.문화재방송.한국
경남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이 2005년 7월부터 부산 도시철도공사 수안역사
건설 부지에서 발굴을 진행하던 중, 동래읍성 해자(垓字)의 석축이 발견됐습니다.
이어 조사원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인골들이었습니다.
남성 59개체, 여성 21개체, 소아 1개체 이상이라는 인골 전문가의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리한 칼날에 베이거나 총알 혹은 화살의 관통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일부에서는 처형의 흔적도 확인됐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만8700명으로 부산포를 침략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장졸들과 함께 분전했지만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순절했지요.한.일 강제합방으로 우리 민족의 고혈을 짜던 일본 제국주의자들,
우리보다 선진국이 된 일본은 또 경제 침략에 성공했고, 중.러 항공기는 우리 영공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북한은 저고도 미사일로 우리를 위협하는데다
혈맹이라던 미국조차 한국을 대상으로 무역전쟁을 계속 하고 있으니..
아 ! 대한민국은 동네북이 되고 말았으니 위정자들이여 ! 정치를 똑 바로 하라 !
임스 yo 답글
늘건강하세요***
2019.11.21 15:04
헤리티지 답글
안녕하세요?
혹 '강치 멸종'이란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오늘은 '독도의 날'인데요.
독도에서 살고 있던 강치가 일본인들에 의해 멸종됐습니다.
독도강치는 외국인 피터가 일본 연안에서 발견하면서 일본강치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최초의 기록이 있으며 19세기 5만 마리 정도가 독도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75년 북해도에서 1마리 생포된 걸 마지막으로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답니다.
1994년 ‘일본의 포유류’라는 일본 책자에서 일본인들이 독도강치 포획하는 사진이 공개됐지요.
당시 일본 어부들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독도강치는 가죽이 벗겨져 가방, 바가지 등 제품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일본 호사가들에게 판매된 강치가죽 가방은 파리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피하지방은 기름으로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됐습니다.
강치 1마리 가격은 당시 황소 1마리 값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귀중한 수산자원인지 짐작이 되지요.
독도의 날인 25일 EBS와 안동MBC는 ‘독도수비대 강치’를 각각 오후 3시25분, 오후 4시 방영합니다.
문화재방송과 함께 해주신 블벗 여러분 감사합니다
2019.10.25 13:50
헤리티지 답글
안녕하세요?
임진왜란 후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당시 확인된 조선의 인구 500만 명 중에서 3분의 2에 육박하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략 20만 명 정도는 포로로 끌려갔다. 7년 난리 통에 희생된
300만 사망자와 20만 포로는 누군가의 부모자식이거나 형제자매였다.
생때같은 혈육을 빼앗긴 채 상처투성이가 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증오했다.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사죄와 배상도 없이
화친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침략하겠다는 협박을 내세우며 국교 재개를 요구했다.
이는 상처투성이인 조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이나
마찬가지였다.(이상 신명호 교수의 조선 왕조 스캔들에서 전재)
선조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화친을 요청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와 함께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을 체포해 압송하라는 것이였다.
선릉은 성종의 능이었고 정릉은 중종의 능이었다. 그 선릉과 정릉이 임진왜란 중
도굴당했다. 뿐만 아니라 성종과 중종의 관이 파헤쳐져 불태워지기까지 했고
시체는 행방이 묘연했다. 유교 가치관에서 볼 때 시체를 파내 훼손하는 것은
살인보다 더한 만행이었다.
선릉과 정릉은 1592년(선조 25) 9월쯤 도굴됐다. 당시 한양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황이었고 선조는 의주에 파천(播遷)해 있었다. 그래서 조선군도 도굴 사실을
몰랐고 선조도 몰랐다.
일본은 도굴범이라며 두 명을 보내 왔다. 가짜인 줄 알면서 두 명을 처형했고,
남아 있는 유품을 수습하여 국장을 다시 치뤘다.
요즘 일본이 독도 전쟁시 전투기를 파견하겠다느니 수출 규제로 대한민국을
핍박하는 행태를 보며 더욱 국력을 배양하여 일본에게 복수를 해야 하건만 오히려
나라가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으니 어찌하랴 ! 대한민국의 미래여 !
▒▒♡♡♡웃으면 건강, 건강해야 행복♡♡♡▒▒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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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7 10:29
헤리티지 답글
안녕하세요?
오리 (梧里) 이원익(李元翼)은 여든일곱까지 살며 70년을 공직에 있었지요.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년에 재산이라곤 초가 한 채였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인조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정치를 펼 수 있는가" 묻자 이원익이 대답하기를.
"성상(聖上)께서는 자신의 견해만 믿고 신하들을 경시하고 독단으로 처리하시는 일이
많아 군신(君臣) 간에 서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잘 다스리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초대 민선 강원도지사와 4선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 선생은 2평 컨테이너에서 살다
얼마 전에 작고하셨지요.
국회 청문회장에서 과욕으로 가득한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오리 이원익과 박영록 전
의원이 생각납니다
▒▒♡♡♡웃ㅇ면 건강, 건강해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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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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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7 21:45
헤리티지 답글
안녕하세요?
윤봉길(尹奉吉) 의사를 신처럼 숭배하는 일본인,,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이 상해(上海) 사변 승리 후 상해 홍구(虹口)공원(현재 노신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행사와 전승 기념행사를 열자,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은
온 몸에 파편이 박혀 죽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지요.
일본 교토부(京都府) 출신의 이토 히로시(藤 浩志)씨는 일어로 번역된 ‘윤봉길 평전’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이어서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읽게 되었고, 그 안에서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다시 접한 뒤 해마다 한국을 방문,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는 의식을 계속한다고...
가장 존경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는 윤봉길 의사라고 생각한 그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는 물론
김구(金九),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 선생 등 한국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서 큰
족적(足跡)을 남긴 위인들의 기념관과 유적지를 마치 성지 순례하듯 돌면서 참배를 하고 있다니
일본의 아베가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면....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www.문화재방송.한국
2019.08.16 11:43
헤리티지 답글
안녕하세요?
경남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이 2005년 7월부터 부산 도시철도공사 수안역사
건설 부지에서 발굴을 진행하던 중, 동래읍성 해자(垓字)의 석축이 발견됐습니다.
이어 조사원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인골들이었습니다.
남성 59개체, 여성 21개체, 소아 1개체 이상이라는 인골 전문가의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리한 칼날에 베이거나 총알 혹은 화살의 관통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일부에서는 처형의 흔적도 확인됐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만8700명으로 부산포를 침략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장졸들과 함께 분전했지만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순절했지요.한.일 강제합방으로 우리 민족의 고혈을 짜던 일본 제국주의자들,
우리보다 선진국이 된 일본은 또 경제 침략에 성공했고, 중.러 항공기는 우리 영공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북한은 저고도 미사일로 우리를 위협하는데다
혈맹이라던 미국조차 한국을 대상으로 무역전쟁을 계속 하고 있으니..
아 ! 대한민국은 동네북이 되고 말았으니 위정자들이여 ! 정치를 똑 바로 하라 !
거기에다 일개 축수선수에 불과한 호날두까지 우리를 무시하니 ! 분하다 ! 정말 분하다 !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2019.07.29 19:49
헤리티지 답글
안녕하세요?
조선의 왕 27명 가운데 성군이란 칭송을 받았으나
재위 기간이 제일 짧은 왕이 있습니다.
제12대 왕 인종으로 겨우 9개월이었습니다.
1520년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머물러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30살에 왕위에 오른 것이죠.
인종은 즉위하자 즉시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은 사림 세력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도 복구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익히고 배운 도학사상을
현실 정치에 응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사림들을 등용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종은 미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재위 9개월 만인 1545년 7월에
31세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 하고 맙니다 :
일각에서는 독살설도 제기합니다. 야사에 따르면
인종은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병이 났다고 해요.
사실 인종이 죽은 뒤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의 수련청정이 시작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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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2019.06.1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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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면 천국은 너무 막연하죠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하는지? 알려주지도못하면서 무조건 믿으라하는건 좀~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될것같네요
2019.04.19 16:47
봄비 답글 삭제
성경 공부 신청하고 갑니다.
그동안 눈치보느라 주저했는데. 더이상 미루면 안될것 같네요
2019.04.19 13:54
사랑 답글 삭제
종교가 어찌 이렇게 됐는지
어디가 진짜인지 제대로 판단하고..사람망치는 한기총은 없어져야겠네요
.
2019.02.08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