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격적인 여행의 길로 인도했던 책!
<서른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28>
그 스물여덟 곳을 그대로 답사해보리라 마음 먹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3번째 답사기를 올리고 있다.
그 동안 이 책을 핑계로 전국 방방곡곡 참 많이도 다녔다.
책 속 사진과 똑같은 장면을 찾아내어 인증샷을 찍고,
저자가 느꼈던 감흥을 흉내내어 보려 애쓰기도 하고...
그렇게 어느덧 스물 세번째다.
그런데 스물세번째 답사지는 조금 특별하다.
스물여덟곳 중 가장 먼저 소개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 산굼부리 억새밭...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를 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억새밭을 보기 위해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떠났다. 제주로...
'산굼부리'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의 숱한 명소들을 제치고 당당히 스물여덟곳의 명소에 오른
산굼부리의 숨은 매력을 찾기 위해!
서른이 되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28
23탄! 은빛 갈대의 가을 잔치!
<제주 산굼부리>
산굼부리의 입구... 영봉문을 통과하면 기이한 돌들을 만난다.
하나같이 가운데가 뻥 뚫린 바위들...
공사장에서 쓰려고 만든건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름하여 '용암수형석'!
10만년 전 산굼부리가 형성될 때 나타났다는 바위!
화산이 폭발하여 솟아 오른 용암이 나무에 덮여 흘러내리는데,
바깥쪽은 공기에 의해 굳어지고
안쪽은 둘러싸고 굳는다.
용암에 갇힌 나무는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해 숯덩이가 되어 버리고
그 나무의 잔해가 세월과 함께 차츰 없어지면서
이렇게 가운데가 뻥 뚫린 조각품 같은 바위가 탄생했다는 것!!
오랜 세월의 흔적 앞에서
사뭇 경건해진다..
입구에서부터 산굼부리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그런데 산굼부리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산굼부리는 '산굼/부리' 라고 생각했는데
'산/굼부리' 였음을...
알고보니 '굼부리'는 화산체의 분화구를 말하는 제주도 방언이라고 한다.
그러니 산 굼부리는 '산에 생긴 분화구'인 셈이다.
산굼부리도 제주를 상징하는 360여개의 오름 중 하나인데,
438m 정상에 서면 실제로 움푹한 분화구가 보인다.
돌로 이루어진 바닥으로 물이 다 스며들어
물이 고여있진 않지만
산굼부리 분화구는 외부 주위 둘레 2067m, 내부주위 둘레 756m
깊이 132m, 넓이가 약 30만 평방미터로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보다도 크고 깊다고 한다.
한라산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곳 산굼부리 분화구는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여느 화산들과 달리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없이 폭발이 일어나
그 구멍만 남게 되는 마르 (Marr) 형 분화구인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형태라고...
이처럼 대단한 산굼부리는 가을이면 은빛 억새옷으로 차려입는다.
길 양옆에서 한들거리며 춤추는 억새의 향연은
가을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눈부신 억새의 물결~!
바람이라도 불면 사그락 사그락~ 박자 맞춰 노래도 하니,
그야말로 은빛 억새들의 가을잔치다.
간혹 까마귀도 추임새를 넣어
억새 잔치는 더욱 무르익는다.
정상에서 산책로를 따라가다보니
저멀리, 산굼부리의 상징이라는 한록지가 보인다.
왜 이곳에 사슴 동상이 서 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사슴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쫓아가니...
한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고,
그 끝에 한라산이 우뚝 솟아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옅어지는 채색...
그 속에 살아있는 산 능선의 곡선미.
산굼부리의 억새밭에 취해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있었던 듯.
저곳을 한번 보라고 시선을 유도해준 사슴에게 새삼 감사를...
너른 벌판 위로는 사각형의 야트막한 돌담들이 눈에 띈다.
옛 유적지의 흔적 같은...
그런데, 자세히 보니 무덤이다.
제주도식 전통 무덤!
저 무덤들이 왜 이곳 산굼부리에 있을까...
지금은 관광지로 보존되고 있는 이곳 산굼부리도
한때는 제주도민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내려오는 길, 산굼부리를 오르는 외국인들을 만났다.
저들은 이곳 제주 산굼부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왔을까.
저들도 나처럼 산굼부리에 올 생각으로 제주를 찾은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나보다, 우리보다, 산굼부리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지도...
입구 쪽이 시끌벅적하다 싶더니,
한무리의 수학여행객들이 몰려온다.
<서른이 되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에
스물도 되기 전에 발을 디디다니...
새삼 부러우면서도,
귀한 여행 일정 중에 산굼부리에 온 이유를 하나씩은 안고 돌아가길 바래본다...
근처 유치원에서도 소풍을 나왔나보다.
아니, 요즘은 '현장학습' 이라는 말을 쓰던가?
이 어린 꼬마 친구들에게 산굼부리의 어떤 면이 보일까?
산굼부리보다는 손 꼭 잡은 옆 짝꿍에게 더 큰 관심이 가 있는 건 아닐까?
엄마가 싸준 간식 먹을 생각에 마냥 들떠있기만 한 건 아닐까?
언제, 누구와 함께,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찾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바다 밑에서 화산활동이 개시된 것은 120만년 전!
이 때부터 용암을 내뿜기 시작해 2만 5천년 전까지 약 117만년간 용암이 분출되었다고 하니
정말 어마어마하다.
길어야 고작 100년을 사는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곳...
제주도를 가면 '당연히' 가봐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진 않지만,
묵묵히 제주의 역사와 풍경을 대변하고 있는 곳...
산굼부리는 그런 곳이었다.
"사는 게 재미었을 때는 여행을 한다.
여행은 삶이 혹시 기대에 못 미친다 해도,
어지러울 정도로 이리저리 흔들린다 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한다.
흔들흔들 흔들거리는 억새.
앞으로 펼쳐질 삶을 위한 한 판 춤사위다.
-<서른이 되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28,
제주 산굼부리 억새밭 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