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이라는 이름은 친숙하지 않다.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 지명에나 어울릴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은 맞았다. '악양' 이라는 이름은 '메이드 인 차이나' 라고 하니... 1300여년 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와 전쟁을 치르러 왔다가 이곳의 풍경이 중국 호남성의 악양과 비슷해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그 악양 평사리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살고 있다. 박경리 작가의 대작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니 말이다.
평사리 들녘에 유독 눈에 띄는 두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서희와 길상 나무'!
토지에 나왔던 두 주인공이
마치 역사속 인물인 듯한 착각이 든다.
요즘 풍경 좋은 곳을 가서 둘러보다 보면
우연치 않게 드라마 세트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곳 악양 평사리 만큼은
'평사리' 라는 이름보다,
토지 세트장인 최참판댁이 있는 곳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제일 큼직한 글씨가 가리키고 있는 곳이 '최참판댁'이다.
그리고 곳곳에 서있는 최참판댁 안내 이정표!
모르는 사람이 오면,
최참판이 이동네에 실제 살고 있는 동네 유지인줄 알겠다.
한편으론 토지의 세트장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을 그저 평범한 마을이었겠다 싶기도...
<토지>를 감명깊게 읽은 이들이라면
그저 '평사리'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뛸 듯.
곳곳에 있는 옛 집들엔 사진 담긴 명패가 붙어 있다.
두 인물이 나왔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성깔 있고 질투가 강했던 강청댁!
늘 남편을 의심하며 못살게 굴었던 여인.
부드럽고 자상한 성품의 용이!
강청댁을 본처로 두고, 첫사랑 월선을 사랑하며, 같은 마을 여인인 임이네를 임신시킨 남자.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나는 이방인처럼 서 있다.
드라마가 끝난 뒤,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지,
집은 조금씩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
가을과 함께 익어가는 호박만이
허물어져 가는 집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이 집은 누구네 집일까?
똑똑똑~
소리 없는 노크를 하고 성큼 마당으로 들어가본다.
칠성이, 임이네!!
성실하고 부지런하지만, 물질에 대한 욕심 땜누에 최치수 살해사건과 관련되어 처형되는 칠성이.
평사리 최고 미인이었지만 남편이 죽고난 후 거리에서 몸을 팔다가 용이의 아이를 낳게 되는 임이네...
그 시절의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다 보니
모두에게 연민이 든다.
한쪽 밭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뭔가 들여다봤더니,
세상에 목화다!!
저런 솜이 어떻게 저런 봉오리 안에 들어있을까.
그저 신기할 뿐...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곳에서 발견한 목화여서 그런지,
겉으로 꽃피우진 못했어도,
속으로는 강한 열망을 안고 살았던,
그 옛날 민초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마음도 살짝 들었다.
신분을 넘어 결혼하지만, 시대상황 때문에 결코 행복한 부부가 될 순 없었던 두 사람.
서희와 길상 인형이 맞아주는 이곳이 바로 최참판댁이다.
호랑이 같은 윤씨부인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봉순이가 달려나와 어떻게 오셨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지?
상상은 어느덧 고민에까지 이르러 있다.
어딘가에서 최참판이 나올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은
엉뚱하게 맞아떨어졌다.
최참판과 함께 하는 예절학교의 최참판님이 떡 하니 앉아 계셨던 것!
처음엔 마네킹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진짜 사람이어서 깜짝 놀랐다.
<서른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28> 책을 보고 찾아간 곳이니만큼,
책 속에 있는 풍경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딱 이 구도구나' 싶은 장면을 찾아내 인증샷도 한장 찰칵!
부잣집이어서 그런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이곳 최참판댁은 사람하는 냄새가 난다.
안에 들어있는 건 없지만, 죽 늘어서 있는 장독대!
안에 물은 없어도, 꽤 그럴듯한 우물!
아궁이를 지필 장작까지...
처마 밑엔 옥수수가, 마당에 빨간 고추가,
그 외에도 많은 먹거리들이
햇빛 속에서 영글어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집 안은 냉기가 돈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방과 싸늘하게 들려오는 <출입금지> 표지판!
소설 토지의 일부를 이곳에서 만나니,
그 느낌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뒷뜰에 있는 연못에서 잠시 쉬어본다.
역사 속 현장도 아닌,
소설 속 드라마 속 현장에서 너무 심취해 있는 건 아닌가..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래도 그렇게 심취해보는 것이 이곳을 더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위로도 해보면서...
대문 밖으로 저멀리 악양벌에 소나무 두 그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추수가 끝나 휑한 들녘에
유독 푸르게 서 있는 서희 길상 나무!
저 나무는 한겨울에도 저렇게 푸르게 우직하게 서 있으리라...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라는 얘기는 이 곳 평사리에서도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한번쯤 <토지>를 읽고 싶어질 것 같고,
소설 <토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곳을 한번쯤 찾아보고 싶을 것 같다.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단순히 드라마를 촬영했던 곳이 아닌,
실제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곳!
고요한 평사리에서 난 소리없는 아우성을 듣는다.
글 * 사진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