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이해가 안되던 어른들의 행동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할 때가
바로 서른 즈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서른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28>이라는 이 책은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나침반이다.
이 책 속에 나와 있는 곳들을 하나씩 답사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단풍놀이' 라는 것을 떠나게 되었다. 거리에도 단풍나무 은행나무가 많은데, 굳이 단풍을 보러 멀리 떠나는 이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가을이면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국립공원!
그 남쪽 산자락에는 백암산이 있다.
백암산은 가을이면 아기 손바닥 마냥 작고 여린 단풍이 물든다고 한다.
이름 하여 '아기 단풍'!
호남고속도로에서 백양사 IC를 빠져 나와 달리다 보면
한가로운 시골 읍내를 지나 백암산에 다다른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백양사에 오르는 길!
이곳이 조선팔경이었음을 알리는 알림돌부터 그 위용이 대단하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백암산의 단풍을 사진으로 먼저 만났다.
그야말로 황홀경~!
그런데 현실의 풍경은 단풍이 아직 제대로 들지 않은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어느덧 백양사 입구에 다다랐는데,
입구에서 생소한 용어를 만났다.
고불총림 백양사
고불총림...
총림[叢林]???
알고보니 <총림>은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이라고 한다.
승려들이 화합하여 한곳에 머무는 것이 수목처럼 고요하다고 하여
모일 총(叢) 수풀 림(林) 자를 써서 총림이라 한다고...
우리나라에는 현재 오대총림이 있는데,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
이렇게 다섯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백양사에는 유독 수행하는 곳이 눈에 많이 띄어 기침도 자제하고, 발 뒷꿈치도 들고 걷게 된다.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장...
이뭣고??
마치 퀴즈를 내는 듯한 이 비석은 뭐꼬?
'이뭣고'가 불교적 의미를 가진 말이었구나...
마당 한가운데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백양사는 여러모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 하나 쯤은 얻어가야 할 것 같은 절이다.
보리수나무의 잎이 하트형이었구나!!
무식을 깨고 깨달음 하나를 얻는 순간이었다.
백암산의 절경이 훌륭한 배경이 되어주는 백양사!!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심장 가까이로 다가가야 함을...
저 뒷산이 붉게 물들 때 백양사를 찾는 이들의 심장은 저절로 뜨거워질 것만 같다.
한쪽에서 양의 울음 소리가 들려 소리를 따라가보니 정말 흰 양들이 울타리 안에 있다.
사람이 다가가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반겨주는 양들!
사찰에서 왜 양을 키울까? 하던 의문은
백양사! 라는 이름 석자에서 바로 풀렸다.
백양(白羊), 흰 양!
하얀 이 양들은 백양사의 마스코트였던 것이다.
백양사에 온 이상 약사암은 꼭 들러야 하는 코스다.
약사암은 백양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양사에서 약사암까지 가는 거리는 1km도 안되는 거리니,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백양사에서 발길을 돌리기 때문에,
약사암으로 향하는 숲길은 한적하다.
하지만 나무가 좋은 향기를 뿜어주고,
새들이 말벗이 되어주니 심심할 틈이 없다.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귀여운 다람쥐들이 마중나와 반겨주고,
길가에 핀 꽃무릇이 환한 미소를 보낸다.
잎은 없이 꽃만 피어있는 꽃무릇
꽃과 잎이 따로 피어 서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별을 뜻하는 꽃!
그래서 '상사화'라는 별명을 갖고 있고,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
뜨거운 햇살을 막는 양산이 되어주기도 하는 단풍잎들!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서둘러 붉게 물들지 않는 그들의 느긋함이 야속하다.
한낮에만 볼 수 있는 초록별들!
날씨가 더 추워지고,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 계절이 오면,
이 초록별들이 한없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다소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니 마침내 눈앞에 약사암이 나타났다.
뒤로는 바위 장벽을 든든하게 두르고 있는 작은 암자!
저 아래로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백양사가 보인다.
백암산의 나무들이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을때,
그 불타는 단풍 사이로 보이는 백양사는 더욱 아름다웠을텐데...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초보'라는 딱지를 달고 나선 단풍놀이꾼의 시행착오일듯...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보다 성급했던 내 마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전망이 좋은 곳이면 한쪽에 테이블과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이 친숙함은...??
그렇구나!
책 속에 나왔던 사진이 바로 이곳이었구나!!
나무의 색깔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똑같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라면 더 운치가 있을텐데...
눈치 없는 마음은 또 아쉬움을 한바가지 쏟아낸다.
주변을 둘러보다 저 멀리 '굴' 하나를 발견했다.
약사암에선 5분도 안되는 거리다.
영천굴!
굴 앞에는 1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는 영천샘물이 있다.
어디서 솟아나는 물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영험한 기운이 느껴져 한바가지를 숨도 안 쉬고 들이킨다.
굴 안쪽으로는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서 있다.
뒤에 둘러쳐진 병풍에선 작은 초들이 빛나고 있는데,
그 갯수가 무려 천개나 된다고...
자연 석굴과 대비되어 인공미가 물씬 흐르지만,
땀 흘리며 올라와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니만큼
이곳에도 나의 소원 하나를 내려놓고 간다.
내려오는 길...
초록의 단풍잎들이 가장 고운 자태로 작별인사를 건넨다.
다섯손가락 활짝 편채로 손 흔들며...
조금씩 붉은 기운을 머금어가는 단풍잎들!
완전히 붉게 물든 모습은 내년 가을에 만나야겠다.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절정 때에...
백양사 앞 연못에 빨갛고 노란 꽃물이 든 모습도
올해는 상상 속에서 채색해보기로...
서른이 넘어가면 바빠진다.
봄엔 꽃구경, 가을엔 단풍구경...
그렇게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꽃처럼, 단풍처럼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글 & 사진
가을옷만 입으면 단풍이 드는 줄 아는 철부지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