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타고 떠난 꽃한송이

[캄보디아여행] 7부 - 킬링필드의 통곡이 들리는 곳! <와트마이 사원>

작성일 작성자 김작가

씨엠립 시내로 나오면 와트마이 사원이라는 새로 지은 듯한 사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킬링필드 대학살 당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오늘날 캄보디아의 전반적인 현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킬링필드'!

그들의 뼈아픈 역사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재현된다.

 

 

베트남전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을 다양하게 압박한다.

그 방법은 주변국가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하기위해 주변국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것!

주변국이었던 캄보디아도 예외는 아니었고 결국 폭격에 의해 무고한 국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가족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힘없는 이들은 공산주의자 폴 포트를 수장으로 내세운 뒤 

크메르 루즈라는 이름으로 단결했고

친미 정부는 공산주의를 외치며 들고 일어난 자국민들과 크메르 루즈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차 킬링필드로, 80만이라는 희생자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휘말려 사임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도 멈추었다.

 

크메르 루즈군은 수도 프놈펜에 입성했다. 

종전의 기쁨을 나누고자 시민들은 시내로 뛰쳐나왔고, 정부군도 미국에 속았다며 그들을 환영했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끝이 보인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던 것은 그 피비린내나는 또하나의 잔인한 학살이었다.

 

미국에 대한 증오가 깊었던 크메르 루즈군은 우선적으로 외국인과 관련된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나서 지식인들을 학살했다.

크메르 루즈군의 대부분이 비지식층의 가난한 계층이었기에

지식인과 부유층에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이것이 2차 킬링필드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자들 뿐 아니라 외국어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자도 죽였으며

의사, 공무원, 선생님 같은 직업의 사람들은 학살 1순위였다.

그저 지식인층이라는 이유만으로...

글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인을 가려내는 방법은 너무나 터무니 없었는데,

바로 안경 낀 사람들을 골라 낸 것이었다.

또한 부르주아도 학살 대상이었는데, 부르주아 대상자로 분류된 이들의 기준 또한 기가 찰 노릇이니,

손에 굳은 살이 없다고,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곱다고, 시계를 찼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 안에는 임산부와 어린이, 그리고 갓난 아기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학살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그야말로 무차별적으로 죽였는데,

그때 학살을 자행했던 크메르루즈군들의 평균 연령은 15세 정도였다.

그들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받은 세뇌교육 때문이었다.

나 이외의 사람은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고 유일하게 믿는 것은 그들의 공산적 신념 뿐이라는 교육은

그들의 가족마저도 적으로 만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고 쉬운 일로 여기면서 학살은 더 심해졌다.

갓난 아이를 죽이는 것에는 총알도 아깝다고 생각하여

커다란 가시가 있는 팜나무에 던져 찔려죽도록 했다고 한다. 

폴 포츠의 머릿 속의 이상적인 공산국가는 원시적인 농경사회였다.

폴 포츠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국민을 농경지로 강제이주시킨 뒤 노역을 강요했다.

강제로 이주 당하는 도중에 그들은 지쳐 쓰러졌는데 이렇게 뒤쳐진 이들은 또 죽음을 맞이했다.

아파도 치료해 줄 의사는 이미 모두 죽었기 때문에 무작정 걸어야 했고 일을 해야 했다.

질병과 기아, 피로 등으로 또다시 80만의 무고한 생명이 사라졌다.

이로써 캄보디아 인구의 1/3 인 200만의 사람들이 채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사라진 것이다.

 

남은 자들은 지식인들의 죽음을 지켜봤던 터라 배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공부하지 마! 죽고싶어?" 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로 인해 캄보디아의 사람들은 배움을 멀리하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문맹률이 60%에 이른다고!!

 

6.25 이후 논 팔고 소 팔아 자식 공부 시킨 우리네 어머니들과 대조된다.

폐허가 되었던 대한민국이 지금 이만큼 일어난 것은 

허리띠 조여매며 자식 공부 시켰던 우리 어머니들의 교육열 덕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한 사람의 잘못된 지도자가 만든 캄보디아의 가난한 현실과 어두운 미래가 안타깝기만 하다. 

 

 

와트마이 사원 앞에는 위령탑이 있다.

이 탑의 또다른 별명은 해골탑이라고 하는데... 

가까이 가 보면 그 탑의 이름이 왜 해골탑인지 알 수 있다.

 

 

당시 죽은 이들의 유골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런 해골을 하나만 봐도 끔찍한 법인데,

수백개의 유골을 한곳에 모아 놓고 보지만

저걸 '무섭고 끔찍하다' 라고 표현할 수만은 없을 듯 하다.

 

 

 

뼈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땅속에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왜 그렇게 무참히 학살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이들의 유골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와트마이 사원을 떠나려는 버스 옆으로 조용히 다가온 여자아이.

한 눈에 봐도 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온 몸으로 말하고 있다.

  

 

두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참으로 맑고 고운 눈을 지녔다.

 

 

온몸에 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지만, 눈동자만은 맑은 아이.

저 두 눈에 고여있는 슬픈 그림자는 나에게만 보이는 걸까.

가지런히 모은 저 두손에 담긴 이 나라의 애절함은 나만의 느낌일까....

 

 

저 아이의 시선을...그 어떤 것을 구하기위해 애써 연출된 표정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저 손등에 주저리주저리 맺힌 땟국물을...

굳이 구걸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덧칠된 것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은 것은,

저 아이를 세상에 내보낸 그들의 과거를 알기 때문이다.

 

 

일행 중 한명이 아이와 눈이 마주치고는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1달러를 주었다.

이 땅 곳곳에서 만나는 1달러의 아이들, 그들에게 1달러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여기는 아직도 아이들의 킬링필드는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소한 킬링퓨처(Killing Future)든가.

 

 

나는 과자를 두어개 건네줬는데, 과자는 아이 입으로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

과자가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면, 먹어서는 안되는 그 어떤 암묵이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떠나는 우리를 향해 수줍게 손을 흔들어주는데...

저 아이에게 당장 필요한 건,

1달러도, 과자도 아닌,

교육이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킬링필드' 라는 끔찍한 네 글자도

'킬링퓨처'라는 어쩌면 더 불행한 어휘마저도

가슴 속에 다양한 모습의 돌덩이로 가득 들어앉아

캄보디아를 여행하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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