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행을 다니는 가장 큰 까닭은 현명해지기 위해서이다.
현명한 사람은 허송세월을 가장 슬퍼한다고 했다.
그러나 더 현명한 사람은 슬퍼하는 겨를조차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세월을 허송하지 않기 위해 여행의 빈도를 높이는 편이다.
여행지는 대체로 산, 바다, 강, 유적지, 그리고 산자수명한 곳으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산>은 항상 여행 대상지 1순위에 오른다.
특히 나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
높은 곳은 약간의 노동이 전제되기는 하지만 멀리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백두산!
우리 민족의 분자구조에서 결코 뺄 수 없는 필수 원형질!
언제 부터인가 고질병처럼 가슴 속으로만 수없이 만났던 산!
두근거리는 마음을 한가득 머리에 이고
그 산으로 간다.
요즘, 백두산 가는 길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육당 최남선님의 말처럼 삼지연을 거쳐 남동 사면으로 오르는게 가장 최선이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이론적인 최상의 코스는 당분간 '다음'으로 미뤄둔다.
나는,
대륙의 본고장, 봉천(심양)땅을 아우르고, 요령성을 동으로 가로질러,
우리네 선조들이 세월의 시린 흙먼지를 털어내던 애증의 광장,
만주벌판의 한 가운데였던 길림성의 폐부를 몸소 바라보면서
급기야 우리 신화속의 여인들이 속살같은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내던 비류강을 쳐다보며
여덟 시간의 정성을 들여 조심스레 접근한다.
가는 길에 만난 고구려 휴게소!
대륙을 서성이고자 저 멀리 남쪽 나라인
신라 백제에서 달려온 가련한 유민들을 위해
다분히 작위적으로 작명된 주막집,
먹거리도 있고 다양한 토산품들이 저렴한 포장으로 객군들의 지폐를 낚고 있다.
어디든 시장이 반찬이다.
가까운 지척의 길을 굳이 에둘러 둘러온 나그네들은 많이 허기지다.
불쌍하도록 시장한 만큼 음식들의 맛은 수직으로 비례한다고.
마파람에 게눈은 비길 바가 못된다.
이럴 때는 "식사"라는 고품격 어휘가 필요한게 아니라
"광속 흡입"이라는 물리학적 어휘가 맞다!
인천 공항을 출발한 여정이 꼬박 열두 시간이 걸려 통화시(通化市)에 도착!
호텔에서 시신같은 휴식을 취하고난 다음 날,
영산(靈山)을 삼가 친견(親見)하는 역사적인 날인 만큼,
기도하는 마음으로 목욕재계까지 정갈하게 마무리하고...
가장 경건하게 다가간다.
백두산...!
백두산 들머리인 서파산문(西坡山門).
현재 백두산 천지(天池)를 조망하기 위해 출입을 할 수 있는 입구는
공식적으로, 여기 서파, 남파, 그리고 가장 먼저 개통된 북파, 이렇게 세곳이다.
이곳에서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
개인별 도보 산행은 금지되어 있고,
이곳의 전용 차량을 타야만 나머지 등반이 허락된다.
물론 여기도 별도의 차량 이용료가 지불되어야 하는데,
현지 물가를 고려하면 다들 만만한 요금이 아니다.
대부분의 패키지 여행 상품엔 이 모든 요금이 포함 되어 있다.
백두산의 수림(樹林)은 대부분이 자작나무다.
빽빽한 자작나무의 숲길은 그야말로 환상의 길이다.
그윽한 향기와 싱그러움, 그리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울창함이 경이롭다.
해발 995m 지점,
아직은 활엽수와 침엽수, 그리고 이깔나무와 같은 낙엽송들이 섞여있고
더러는 사스레나무도 한 켠에서 처녀림의 한 몫을 담당하면서
서로 팽팽한 세력 균형을 이루며 숲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다.
숲길 산책로가 예쁘다.
거대한 산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수종(樹種)이 잘 갖춰진 수목원을 걷는 기분,
발걸음도 가볍고 마음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
백두산, 원래 이렇게 향기롭고 부드러운 산이었나~?
잠시 동안이나마 꿈결같이 편안한 백두의 숲길을 뒤로하고
다시 산으로, 산으로...
사실, 산은 두발로 세월로 땀으로 올라야 하는데,
그게 높이를 지향하는 산님에 대한 예의인데,
지금은 두발이 아닌 네발로 감히 편리함을 앞세워 가는 결례를 범하고 있다.
산님이여, 어리석은 남쪽나라의 백성들을 용서하소서!
해발 1464m, 백두대간인 태백 준령들의 높이다.
이 정도를 걸어서 오르려면 발바닥에 화염불이 수십번도 더 붙고
이 더운 날에 혓바닥은 이미 십리 밖으로 늘어져 있어야 정상인데...
이마도 뽀송뽀송, 발바닥도 지극히 건조하다.
근데 이정표의 알파벳이 이상하다.
ALTIUDE...중국식 영어인가??
서파 들머리...
해발 2,200m 지점이다.
산의 초입부는 햇빛이 쨍쨍했는데...
여기의 날씨는 저 아래와 전혀 별개이다.
비도 오고 날씨도 한겨울이다.
내게 이 높이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답의 고지!
주변의 수목들도 감쪽같이 옷들을 갈아 입었다.
우듬지를 한껏 세우고 기세를 높이던 나무들도 바야흐로 꼬리를 내리고
스스로 높이에 굴복하여 자신들의 키마저 한층 낮췄다.
천지로 가는 서파 등정로는 1236개의 목조,석조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코 만만한 계단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지를 배알하는데 이 정도의 수고는 아끼지 않아야 한다.
백두의 여름비는 차갑다.
동상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최고급 우비를 미리 준비해온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다.
세찬 비바람에 준비가 허술한 사람들이 고생이 많다.
무릎 아래가 젖는 정도는 어쩔 수 없지만 발에 물이 들어 오는 것은 한사코 막아야 한다.
까딱하면 한 여름에 동상이 걸리는 해괴한 경험을 할 수도...
우중 백두 등정! 이것도 훗날 오래 기억될 기막힌 경험이다.
언제 우박까지 섞여 내리는 백두의 여름비를 맞아 볼 것인가...
그렇게 하늘의 해맑지 못한 은혜를 감사히 느끼며
오르고 오르고~
나는 산행을 하면서 아주 자주 옆길로 새거나
때때로 적당히 낙오를 즐기는데...
이 길은 옆길이 전~혀 없다.
줄기차게 초지 일관 외길이다.
단 1m도 옆길을 서성이거나 샐 수도 없다.
닥치고 꼼짝말고 주어진 길만 가란다.
한 걸음 건너가서 야생화라도 한 컷 담아내고 싶지만 아니, 아니 아니되오~!!
군데 군데 무장(?)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계단 곳곳에 요상한 물체가...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
사인교가 아니라 이인교(二人轎)다!
왕조 시절 사대부나 탔다는 전설의 가마가 이곳에 왜?
알고보니, 천지까지 이어진 1236개의 계단을
앉아서 올라 갈 수 있는 휴대용 에스컬레이터다.
중국에는 돈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다더니...
요금은 편도에 세종대왕 초상화 4장 정도!
과연 중국의 미래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비 일괄 수가제는 꽤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지만,
이곳 가마꾼의 요금 일괄 수가제는 아무래도 문제가 많아 보인다.
체중별, 신장별 가산 요금제로 바꿔야 보다 합리적일 듯.
이들의 거친 숨소리와 굵은 땀방울 너머로
그들 가족들의 환한 웃음이 오버랲된다.
앞에 선 가마꾼은 키가 비교적 작고
뒤에 선 이는 상대적으로 키와 덩치가 크다.
이 역시 무게 중심을 감안한 저들의 지혜일듯...
어느 TV 방송에 극한 직업 소개 프로그램이 있던데
이 직업도 그에 못지 않을 듯.
아무튼 신체가 부자유스럽다든가 너무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계단길 군데군데에 특이한 판매 아이템이 나타난다.
이른바 산삼 판매상인들이다.
OECD 국가 중에서 보신식품을 제일 좋아하는 나라, 대한민국!
범국민적으로 신체 빈약한 사람이 아주 많은
오로지 한국 과객만을 위한 맞춤형 상품이다.
신사임당의 초상과 세종대왕의 초상이 백두산 자락에 가득하다.
이곳에서는 한국 화폐가 표준이고 가장 선호하는 화폐이다.
자연산일 가능성은 전혀 없고,
극히 아는 사람만 알고도 산다는 농약 덩어리.
그래도 참으로 많이들 사고 있다.
역시 우리 한국민의 건강 식품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왕성한 구매력은 알아줘야 한다.
이른바 자연산 꿀과 산삼은 여행길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다는...
툰드라 지역과 거의 다름이 없는 동토의 지역답게
수목은 자취를 감추고 지의류와 선태류만 지표를 덮고 있다.
그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야생화들이 불현듯 고맙다.
날 좋은 날, 얼른 자손 번식시키고 또 금세 닥칠 겨울 준비 해야지~
드디어 올랐다.해발 2,470m.
서파정상(西坡頂上).
이른바 제 5호 조중(朝中) 국경비.
비석을 중심으로 한쪽은 중국땅이고 반대쪽은 북한땅이라는 국경 경계비다.
똑 같은 비석인데 국적이 다르다. 이중 국적비라고 해야 하나.
버킷 리스트에 올리고 세월을 기다리던 곳.
그렇게 기다리던 백두산의 천지에 왔다.
매번 애국가 속의 동해는 쉴 새 없이 다녔지만
상대적으로 한 번도 뵙지 못해 죄인 같았던 곳!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고 했던
백두산~!
그것도 우리 땅 내 땅을 한발자국도 밟지 못하고 남의 땅으로 만릿길을 달려왔는데,
그런데...
천지가 없다. 천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꿈에서, 그림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 아름다운 천지가 하얗게 사라졌다.
천지가 있어야 할 그곳에는
거짓말처럼 하얀 백지와 허공이 끝없이 앉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어느 그림에서도 이런 천지는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단 말인가!
아~! 사라진 우리의 천지여~!
북한 땅이다.
중국이 북한의 협조를 받아 북한 영역의 일부를 관광객이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천지를 북한 땅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포토존을 만들어 둔 지역이다.
물론 이처럼 제한된 지역에 한해서이지만,
우리 통일부의 사전 승인이 없어도 갈 수 있는 유일한 북한땅이다.
사라진 천지.
자칫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딜 경우 까마득히 추락할듯한 여백의 공간!
사실 천지를 보지 못한 아쉬움보다 폐부를 후벼파는 강렬한 추위가 더 크게 느껴졌다.
생전 처음으로 찾아간 천지가 내게 하사한 거룩한 선물이었다.
천지를 지키는 국경초병이, 입이 하얗게 얼어붙은채 말한다.
"살아 있을 때 빨리 하산하세요"라고.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시키는 대로,
하산(下山)!
왜? 백두산은 내일도 그자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시치미 뚝 떼고 있을테지만
나는 자칫
내일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여행은 어차피 그런 것이다.
시간과 돈 그리고 건강이 허락해야만 가능한 게 여행이라지만
꽤 많은 경우에 하늘의 보살핌이 따라야 가능하다는...
무릇 <다음>은 사이버 공간에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현존하는 여행에도 존재하기에
오늘은 <천지>신께 잠시 다녀간다고 기별이나 놓은셈치고.
머지않아 다시한번 정중하게 예의 갖춰 배알하겠노라고...
태산보다 더 장엄한 천지를 가슴에 품고 왔던 수많은 사람들,
그만한 부피의 체념을 지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저들 중에 천지를 보지 못한 한을 삭이고자 다시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왕 온 사람들에게 얼굴이나 한번 슬며시 보여주시지, 천지님도 참~
비오고 우박 쏟아지는 날의 천지행,
그도 어쩌면 예상 밖의 여행 덤인지 모른다.
쉽게 볼 수 없는.
시야가 넓었더라면 멀리 펼쳐진 백두의 어깨선을 보느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야생화들,
두메 양귀비도, 구름 국화도, 바위 구절초도
그리고 너무나 작아서 감히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이 계절만의 꽃들도 새삼스럽다.
차를 타고 다시 내려오는 길에 들른 쌍제자하(雙梯子河)...
제자(梯子)는 사다리라는 말이다.
사다리처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협곡이라는 뜻에서.
높은 산은 그 높이 만큼 깊은 골을 갖고 있을 터,
백두가 품을 벌린 곳은 그대로 비경이 되고 장관이 된다.
감히 일주일여의 짧은 시간으로 이토록 장엄하고 광활한 백두를 온전히 느끼려 했으니...
생각이 짧았다.
여기는 산정의 백두산과는 완연히 다른 곳이라는 듯,
온대림과 한대림이 고루 섞여 나무잔치를 열고 있다.
에어컨 없이도 두어시간의 시차로 한여름과 겨울을 만날 수 있는 곳.
금강대협곡이다.
까마득한 옛날, 백두가 끓어 올라 그 농염이 하늘을 덮을 무렵,
거대한 땅의 불덩이들이 흘러 제 갈 곳으로 갈때 만든 불의 길이다.
깊이도 알 수 없고 물론 사람의 발자국마저 완고하게 거부하는 곳!
그래서 협곡의 가장자리에서 이렇듯 아슬아슬하게
몰래 훔쳐보는 것 외에는 과객이 달리 할 일이 없다.
그저 외칠 수 있는 한마디!
"아~!"
여름날, 추위에 못이겨 되돌아 왔다.
그리고,
천지의 꿈을 안고 갔던 그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서 다시 출발점에 섰다.
자작나무가 울창했던 그 자리에.
솔제니친은 자작나무 숲으로 노벨상을 받았고
북국의 몇몇 기업들은 자작나무로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
영혼의 나무, 천상의 나무, 우주의 나무라고도 불리는 자작 나무.
기가 막히게도
지금 여기, 자작나무 숲에는 비 온 흔적도 없고, 우박도 없고,
그리고 오늘 보지 못한 천지에 대한 아쉬움도 물론 없다.
내일 다시 한 번 도전 할 것이기에...
사람 사는 일에도 그렇지 않던가,
한 두 번 쓰러진다고 포기할 순 없지 않던가 말이다.
더구나 백두는 그저 가야만 하는 단순한 목적지가 아니라
두고두고 가야하는 아름다운 경유지이다.
그리고 여행에서는 가장 멀리 우회하는 길이
집에 가는 가장 가까운 길임을...
글 * 사진
에둘러 가고 낙오하는 맛에 세상사는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