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너머로 친구를 실어오는 돛단배 위에
번쩍이는 첫 햇살처럼 신선한,
바다 너머로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싣고 떨어지는
돛대 위에 붉게 물든 마지막 햇살처럼 슬픈,
그렇게 슬프고 새롭구나, 다시 오지 않을 나의 날들이여...」
<Alfred, Lord Tennyson의 "눈물이, 까닭모를 눈물이"중에서>
긴 여행은, 참으로 긴 여행은,
돌아와 편안한 내 침대의 베개를 베고서야 그 감흥을 느끼기 마련이다.
갈대밭 위로 날아오르는 기러기처럼
나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으려 매일 비상을 꿈꾼다.
그리고 불현듯 시작했던 그 꿈의 한자락을 마침내 붙들었다.
이 자리는 내 스스로를 위한 작은 만찬의 자리이다.
"서른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28"
나 스스로 만들고 기획하고 꿈꿨던 책따라 여행하기!
10,000여장이 넘는 사진과 12,000km도 넘는 거리.
그 기나긴 여정에서 아직도 생각하면 흐뭇한 기억속의 편린들.
그리고 그날의 길섶에서 건진 몇장의 낙숫물과 이삭들을 모아본다.
왜 떠나야만 하는가...
저 하늘의 칼날같은 푸름에서 나를 건져다오.
저 수풀속의 혼미한 향기에서 나를 구출해다오.
저 까마득한 언덕위의 현기증에서 나를 내려다오.
저 아스라한 수평선 위의 그리움에서 나를 붙잡아다오.
저 끝없는 철길 위의 기다림에서 나를 멈추게 해다오.
저 흔들리는 항구에서 수많은 설렘의 깃발들을 거두어다오.
저 여리고 짧은 세월들의 기억에서 나를 지워다오.
저 짧은 추억들을 내려놓고 떠나는 이 가을을 붙잡아다오.
그래서,
내 가슴의 초록 들판에 단풍이 지고
혈관속에서 마냥 출렁이는 해일이 잠시라도 멎는 날
다시 그들을 순서대로 불러내어 새삼스레 만나게 해다오.
언제나 예외없이 한꺼번에 밀어 닥치는
몹쓸 놈의 "바깥 세상"과 한없이 그리운 "지평선 너머의 풍경들".
그리고 시시각각 그곳에서 나부끼는
어처구니 없는 가슴 떨림들.
기억하는가,
지난 여름의 그 기나긴 입맞춤을.
기억해야 한다,
이 가을의 그토록 짧은 눈웃음을.
기억처럼,
추위는 불현듯 다가오고
기억에도 없지만,
우리네 무릎도 젊음도 삽시간에 간다는 것을.
떠남은 항상 목마름이다.
떠나기 위한 목마름
돌아오기 위한 목마름
그리고 올라가서 내려 오기 위한 목마름.
지불이 끝난 계산서,
이미 보고 나온 영화 관람권,
눈밭을 지나온 발자국,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거나한 피로감,
모두들 돌아왔을 때만이 가능한 것들.
누구는 들풀처럼 살라하고
누구는 산처럼 살라하고
누구는 티없이 살라고 한다.
나는 사람처럼 살고 싶다.
언제든 떠날 수 있으므로...
항상 탈출처럼 여행을 한다.
여행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기 위함인데
돌아올 일이라곤 전혀 없는 탈출을 생각한다.
그렇게 비장하게 행장을 꾸리고 각오를 다지지만
대개는 가서 쓸 일이 없고 도착하는 순간부터 집을 그리워 한다.
이 몹쓸 놈의 원점 회귀본능.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버리기 위해 산으로 간다.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산으로 간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구인가를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간다.
아니다
나는 내려 오기 위해 산으로 간다.
한 권의 책과
한 됫박의 아랑주.
그리고 풋내나는 주전부리 몇 점이면
버릴 수도, 찾을 수도, 만날 수도
그리고 행복 가득 안고 내려 올 수도 있는 곳.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곳
산이 아니던가
대문 밖을 나서면서부터
단 한 번도 진수성찬을 바란 적이 없다.
암브로시아를 꿈꾼 적도 없다.
식탁 위의 내용물에는 관심이 적다.
단지 하나, 그 식탁이 어느 나라 어느 고장에 자리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다.
일용할 양식은
그저 일용할 양식일 뿐
"다음" 행선지로 다시 떠나기 위한 자양분일 뿐.
그때, 그 시절 그 맛이 잊혀져간다.
분명 진수 성찬보다도 암브로시아보다도
더 감미롭고 경탄스러웠는데 입은 기억을 못한다.
입은 확실히 머리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어디가서 그토록 맛깔나는 커피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다시 그곳으로 가야한다.
그 커피맛을 되살리기 위해...
어느 곳이든 길이 돌아 눕거나 끊어진 곳,
그 곳에는 항상 목이 마르거나 허기가 진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어서 항상 행복하다.
마주한 벗님이 작고를 해도 모를 만큼의 환상적인 맛은 덤이다.
여행은 설렘이다.
아니다 여행은 환희다.
아니다 여행은 맛이다.
세상밖을 아무리 걸어도 여행은 맛이다.
욕지도에서 살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여행자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토록 신선했던 능성어에게 다시 한 번 애도를...
참으로 많은 허기와 식탐들
여전히 내 살의 부피가 되고 무게로 들어 앉아 나갈 줄 모르는
길위의 별미들, 진미들, 그리고 특미들.
자고나면 길은 또 다른 길을 만들고
그 길에는 여전히 예상 밖의 메뉴를 들고 온다
벗이 있어서 더욱 좋은 길인데 벗과 함께 만난 벚굴
세상에 이런 맛도 있었다.
벚꽃 필 때만 벗과 같이 먹을 수 있는 벚굴...
벚꽃이 피는 날 나는 다시 그곳에...
사흘을 굶은 채로...
떠나기 전까지의 여행은 여전히 설렘이다.
돌아온 뒤의 여행도 여전히 설렘이다.
설렘은 그리움과 아쉬움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달콤함이다.
행복한 포만감 뒤에 떠먹는 아이스크림.
인생 여행의 끝머리에서도 이런 달콤함을 만들어야 할텐데...
불현듯 돌아왔다.
많이 길들여지고 익숙한 내 베게를 베고 누워도
여전히 두 발은 "그곳"을 누비고 있고
입안에는 흥건한 "그곳"맛이 흐르고 있다.
추억속에 녹여 넣은 기억들이 너무 많다.
언젠가는 끄집어 내고 재활용해도 끊임없이 되살아날
화수분이 될 것이다
더 그리워하기 전에 일어나 잔치를 열어야 한다.
촛불 잔치를 열자.
내가 너가 되고 네가 내가 되고
우리가 여러분이 되어 촛불 잔치를 열어보자.
그래서 길에서 만났던 모든 이들을 불러모아
그 날의 얘기들을 다시 꺼내고 그리고 한바탕 웃음을 웃어보자.
술이 익었고 마음을 열었는데
어찌 님이 오지 않을 것이며 하객이 모이지 않겠는가.
오늘은 아무런 생각없이 날저문 날의 여행 노래를 불러야 한다.
오늘 여기 모인 이들과 함께 가장 자랑스러운 여행노래를...
잊지 말아야지.
오늘의 이 황홀한 뿌듯함을...
자랑스럽지 아니 한가
저 게절에 닳고 길섶에 시달리고 결국은 해져 누더기가 되어버린
나의 보물 1호 애장서.
카메라를 둘러매고 두 팔을 높이 쳐든 저 여인의 뒷태가 얼마나 매혹적인가
저 모습은 결국 내 뒷모습이 된 것을...
비에 젖어도 너는 아름답다.
때론 좌절을 느껴도 너는 장하다.
누군가 눈을 흘겨도 너는 많이 자랑스럽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너는 충분히 빛난다.
누가 시켰다면
어찌 장대비를 맞고 무식하게 1,500고지를 오르겠는가.
누가 등을 떠밀었다면
어찌 깎아지른 절벽을 네발로 올랐겠는가.
누가 임금을 준다고 했으면
태풍에 정면으로 맞서 섬으로의 여행을 도모했겠는가.
지나온 일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야!!
추억은 결코 과거 완료형이 아니다.
꾸준한 현재 진행형이며 때론 미래 예측형이기도 하다.
어차피 이 지구별로 여행을 떠나온 만큼
허투루 일상을 폐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틀과 울타리에 갖혀 살려고 했다면
애초에 이 지구라는 혹성을 찾지 말아야 할 일이다.
또 날이 밝았다.
그렇다면 다시 떠나야지.
이 지구별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미지의 곳을 찾아서.
「무지개와 뻐꾸기 소리는
다시 함께 더불어 오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무덤 이쪽으로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W.H.Davies의 "다시 없는기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