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가 있다.
아무데도 갈 데가 없을 때가 있다.
사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얘기나눌 사람조차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풀밭에 앉아
민들레 목걸이를 만든다....<제프 스완> 』
여행은 낯섦을 그리워하고 낯섦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 낯섦 속에서 찾아낸 보석같은 익숙함은 어느덧 기억이 되고
그러한 기억들이 모이고 진액으로 쌓여 결국은 추억이 되는 것.
여물어가는 봄을 찾아서 떠난 남도로의 여행!
어처구니 없이 순천만의 정원 잔치에 절반의 넋을 놓아버리고,
해마다 찾아가는 님의 무덤같은 지리산 둘레길에서 나머지 넋을 빼앗기고
온갖 꽃향에 취하고 황홀한 애기 초록에 그나마 남은 시력까지 잃어갈 무렵,
내게는 쉴 곳이, 3박 4일간의 피로독소를 해소할 힐링캠프가 필요했다.
3년 전...
끓어 넘치는 삼복의 열기를 머리에 이고 시도했던 지리산 둘레길!
6, 7, 8 코스에서 조우했던 나만의 숙소가 있었다.
외갓집 같고 친정집 같았던 곳!
<흙속에 바람 속에...>!!!
지리산 둘레길 12코스를 마무리한 지점은 하동군 악양리 대축마을이었다.
여기 <흙속에 바람 속에 (이하 "흙바람")>는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
무려 60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만만치 않은 산길 150리를 그렇게 단숨에 날아서 달려갔다.
흡사 그렇게 가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마치 사무치게 그리운 님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3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은 여기만 비껴서 지나간 듯 했다.
3년 전에도 그랬듯이 어서 오라는 듯,
문은 역시 예상 그대로 활짝 열려 있었다.
실내로부터 풍겨오는 익숙한 향취, 세월에 녹아나온 예스런 풍경도 그대로였다.
그래, 이런 풍경이었어~!
저렇게 오밀조밀하고 다채로운 소품들이 다소곳하게 저 자리에 지금처럼 앉아 있었지!
어제 본 듯, 사진 속에서 매일처럼 마주한 듯,
낯설지 않은 그 때 그 시절의 모습들이 우리를 반긴다.
많이 그리웠는데... 반갑다~ 많이!
지구상에 단 하나씩 밖에 없는 유일한 샹들리에들도 하나같이 화촉을 밝혔다.
해 넘어가는 지리산 자락은 아직도 싸늘한데
실내 공기는 겨드랑이 속처럼 포근하다.
오늘 밤 산길 들길에서 묻혀 온 피로를 덜어줄 아늑한 나의 공간!
깨끗하게 정돈되고 이부자리에는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이 묻어나고,
침실의 창 밖에는 지리산의 봄이 한창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취미가 만들어낸 자연 염색 창작품들!
요즘은 탐내는 사람들이 많아 부업으로까지 진화했다고.
지난 세월만큼 삶의 진화도 예쁘다.
3년 전에 비해 바뀐 것들도 있다.
3년 전에는 씩씩한 남자인 "토리"군이 이 집의 치안을 담당했는데,
지리산의 자연 치안이 워낙 훌륭해서 "토리"군은 치안이 필요한 우범지역으로 보내고
그의 여동생 "똘똘이"양이 그의 첫딸 "깜쥐"양과 같이 치안대신 비주얼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마도 "깜쥐"양은 털색깔을 보아하니 아빠를 닮았나 보다. ㅋㅋ
<흙속에 바람 속에>의 안주인이신 한미나님.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스스로 염색하고 디자인하고 손수 기워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하수인 '똘똘이'와 '깜쥐'양의 다정한 풍경!
그리고 한미나님의 옆지기이자 오늘 지리산 대표 무허가 셰프로 옷을 갈아 입으신 강길한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이미 구이담당의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는 증거.
아울러 온전히 귀농에 적응하셨다는 또 다른 반증이기도!
신기한 것은 3년 전에 비해 훨씬 젊어지셨다는 점이다.
그 비결은 멀지 않은 곳, 그의 곁에 있었다.
오늘 일용할 모든 신선채들은 이 집 울타리 안에 다 있다.
눈 건강과 간 기능 개선에 탁월한 약효를 갖고 있다는
"가시오가피"의 새 잎은 훌륭한 고기 쌈채소!
연하고 부드러운 새순으로 우리가 직접 골라서 한소쿠리 장만했다.
원래 지리산 바람이 씻어놓고 있는 관계로 구태여 씻을 필요도 없다.
애기 손바닥만한 적상추는 마당 한켠에서 한 장씩 따서
흐르는 지하수에 살짝 씻어놓고...
평소에는 화단에서 화초처럼 꽃단장을 하고 있다가도
우리같이 식탐 왕성한 나그네가 침입하면
제 몸 잘라내어 식탁으로 스스로 올라가 자세를 잡는 "방풍나물"도 향취를 더한다.
"방풍나물"은 중풍을 막아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나~!
울타리 옆에서 왕성하게 자생하다가 불행히도 나그네의 눈에 띄어
창졸간에 식탁으로 숙소를 옮긴, 남자를 더욱 남자답게(?), 여자를 더욱 여자답게(?)
만들어 준다는 야생 "두메부추"도
오늘은 특별히 먼데서 오신 손님의 식탁에서 다소곳하게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4월은 모춘이라 했던가,
이 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죽순도 옷을 벗고 부끄럽게 속살을 드러낸다.
죽순은 변비 해소에 효험이 있으나 어린 아이들에겐 금기시하는 성인용 식품이다.
이 계절에 자연은 초대형 마트보다 더 다채롭고 신선하다.
님도 있고 친구도 있고 술도 충분히 있고
신선이 먹는 모든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앞에 놓였다.
데쳐온 죽순은 그 순백의 정갈한 모습으로 초고추장 앞에 그냥 앉았다.
차려진 주안상의 색깔도 다채롭다.
죽순은 유일하게 순수한 백색 담당이다.
색깔을 벗어나서 입안에는 이미 침이 한강 아니, 섬진강이다.
<흙바람>의 모든 발효식품의 맛을 보관하는 토굴!
변함없이 토속적인 식탁의 맛은 대부분 여기서 비롯된다.
예사롭지 않은 김치의 맛, 그 비결은 역시 발효과정에 있었다.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 하나도 별스럽다.
잔치 준비는 다 끝났다.
참석할 사람은 다 왔고 마련될 음식은 다 차려졌다.
이웃 주민이신 귀촌 2년차 부산 출신 김선생님도 특별히 동참하셨다.
순백의 머리색 그리고 역시 순백의 턱수염!
얼굴에 그려진 눈 코 입의 윤곽이 없다면 위아래가 불분명하신,
그래서 즉석에서 붙여진 별명은 거창하게도 지리산 산신령!
그의 해학과 노래는 이 날, 지리산의 별미였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마련된 잔치의 주인공이었다.
지금부터는 무한한 흡입과 웃음, 그리고 행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바야흐로 지리산 흑돼지도 속옷을 벗었다.
선홍색 속살에서 지리산 봄향기가 난다.
황홀하지 않은가!
낙조가 깔리는 아름다운 지리산 자락에서 은은히 울려퍼지는 저 고기향이~!
똘똘이도 교육 잘 받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환장할 정도로 유혹적인 고기향을 잘도 참고 있으니...
얼마나 먹고 싶을까, 하물며 많이 점잖은 나도 임종 직전인데...
하동 쌀과 지리산 산삼을 섞은 물로 지리산 자락에서 빚은 신의 음료,
신의 넥타르...오늘 우리가 일용할 "막걸리"!
청계호수에 석양이 내리고 있다.
우리의 축제를 위해 오늘의 하늘을 밝히던 태양의 마차가 은은한 조명을 만들고 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이야기, 좋은 음식과 좋은 술...
세상은 이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
그래요~ 아름다운 밤이에요~!!!
여기는 산청군, 하동술로 전주를 밝혔으니 산청술도 맛을 봐야~!
캬~ 이 맛도 일품일쎄!
하긴 세상에 맛 없는 술이 어디 있기나 하던가!
맛 없는 술자리는 있지만 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최소한 내 입맛에는!
밤이 새도록 정말 많이 달렸다.
시원한 밤공기, 실바람 속에 섞여 오는 지리산 봄꽃의 향기,
유머와 해학이 녹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의 소낙,
그리고 신들의 음식보다 더 귀한 암브로시아와 넥타르.
영원히 잊지못할 "그날밤"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밤새도록 써 내려갔다.
정말 어디서도 만들 수 없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흙바람>에는 나그네가 쉬어갈 방이 2개밖에 없다.
그러나 노래방은 있다.
그날 밤 우리는 다시 노래방에서 서로의 필름을 사정없이 끊었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나누고 부르고...
그렇게 흥청거리는 밤을 보냈는데도 아침은 거짓말처럼 깨끗했다.
그토록 흔한 숙취도 속쓰림도 없다.
역시 좋은 공기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나눈 잔치의 흔적은 참으로 정직했다.
지난 날 화개장에서 구입해온 우리의 선물, 7년생 만리향 한 그루를 직접 심었다.
만리 밖에 있더라도 <만리향>처럼 인연이 이어지길 희망하면서...
늦여름, <만리향>이 지리산을 어루만지면 그 때 다시 만나기를 아스라히 기도하면서...
만리향의 꽃말이 '당신의 마음을 끌다'가 아니던가...
지리산의 보석같은 아침공기를 놓치기 아쉬워 집 주변을 거닐어 본다.
온통 유실수며 꽃나무다.
주인 아저씨의 고운 수목 욕심이 눈에 보인다.
해당화, 오랑캐꽃, 큰개불알꽃, 붓꽃, 꽃잔디, 패랭이, 범부채, 작약, 아마릴리스...
내가 식별하는 꽃과 나무이름이 여기까지임이 서글프다.
매화는 애기 열매를 줄줄이 달고 있고 감나무는 새순을 밀어 올리고 있으며
철쭉은 한창이고 모과나무도 일찌기 꽃을 피웠다.
철마다 피고 열매 맺을 그들을 보러 또 와야 할 듯하다.
집과 가재도구는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구석구석에 수많은 해학과 재치를 은근히 감추고 있다.
금가고 깨어진 항아리는 하늘을 향해 굴뚝이라는 새이름으로 발칙한 탈바꿈을 했고
짝을 잃은 항아리 두껑은 굴뚝 지붕으로 화려한 변신을 마쳤다.
간밤에는 먹고 마시는데 정신이 팔려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새 식구들이 여기 또 있었구나.
얘들아~ 인심 좋은 주인이 많이 준다고 많이 먹고 빨리 크는 것은 생각을 좀 해봐야 한단다.
너무 빨리 크면 그 끝이 결코 창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창가에 있는 소품들과 장식들도 어제의 그것들이 아니다.
아침에 꽃도 바뀌고 그들의 위치들도 바뀌어 있다.
문을 열면 지천으로 깔려있는 자연 소품을
때에 따라 어떻게 배치하고 연출할 것인지는
순전히 주인 아주머니의 몫!
그 계절이나 철지난 계절이나,
자연에서 주우면 모든 것이 장식용 재료이고, 소품이 된다
그들끼리 섞여서 자연의 향기를 내고 그들끼리 모여서 색채를 만든다.
꾸미고 보탰지만 그렇지 않은 듯,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정겹다.
"아침 식사하세요~!"
3년 전, 감동적인 아침을 사흘이나 받아봤기에 기대가 높았는데,
3년이 지난 지금
역시~! 명불허전이다.멀리서 봐도 식욕이 앞선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식도가 넘치도록 내부를 채웠는데...
그 내용물이 아직도 복부를 온전히 채우고 있는데...
단지 습관화 된 아침 식사 시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침상을 받았는데...
그런데도 식욕이 발동하는 이 기괴한 현상은~?
아~! 지리산에서는 결코 다이어트를 할 수 없다는 말인가~?
목이버섯 돈나물 오이무침.
엄나무 새순 무침.
엄나무 순은 관절염과 허리 통증에 놀라운 효험을 지니고 있다고...
고사리 무침.
두릅 된장무침.
춘곤증을 막아주고 원기를 올려준다는 봄의 귀족보양채.
가죽나물 무침.
독특한 향기가 입맛을 돋게 할 뿐만아니라
피를 맑게 하고 몸속의 독소를 제거하는데 으뜸이다.
그리고...현미 밥과 들깨 쑥 된장국.
토종 진액 참기름을 아끼지 않고 듬뿍 썼다는 것은 이미 향으로 감지가 된다.
전혀 먹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던 아침인데...
국 한 그릇, 밥 한 공기 말끔히 비웠다.
역시 위대(胃大)한 김작가~!
빈틈없이 채워진 아침공양의 끝에는 다향의 시간도 마련되었다.
김작가 한테 어울릴 거라고 추천해 주신 차는
이름하여 금은화(金銀花)차!
인동초의 꽃으로 만든 차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금은화를 인삼보다 상위에 둘 정도의 만병통치약으로 대접한다고...
은은한 향과 감미로운 맛이 특별한 풍취를 더한다.
두통해소, 해열에 특히 효험이 있단다.
이렇듯 간 밤을 건너온 이 아침은 충분히 힐링의 시간이 되었다.
이 집에는 아주머니의 손을 거치면 모두가 작품이 된다.
꽃잔디도 명품 꽃이 되고 어성초 잎사귀도 훌륭한 소품으로 격상되는가하면
담쟁이 어린 줄기도 화려한 변신을 거쳐 품격을 달리한다.
<강길한 한미나> 부부...
아저씨는 말했다.
귀농 7년차, 도시에 살 때는 전혀 몰랐는데 지리산에 들어오고나서
60평생에 처음으로 기묘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고...
"요즘 우리 아내가 너무너무 예뻐서 죽겠다"고...
"이 봄에 온통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여도
내 아내 만큼 예쁜 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그래서......
"아내가 보면 볼수록 더 예쁘다"고...
그랬다...
지리산은 멀리서 온 나그네들만 치료하는 곳이 아니었다.
지리산은 그 곳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을 치유하고
재충전해주는 화수분 같은 곳이었다.
그 곳에 처음처럼 <흙바람>이 있었다.
<흙속에 바람속에>
010-4875-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