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독서"는 결코 "취미"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의외로 독서라는 어휘를 취미로 삼는 사람이 많다.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서평을 써서 살림처럼 책을 수집하거나
헌 책방에서 덤핑으로 많은 책을 사서 책장의 전시용으로 진열하는 사람들은
독서를 취미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걷기"도 결코 "취미"가 될 수 없다.
걷기가 취미가 되는 것은, 고작 1년에 몇 번 있는 걷기대회에 나가서
십릿길 이내의 그렇고 그런 길을 완주하고서 자랑처럼 완주메달을
집안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 그런 경우이다.
독서도 걷기도 살아 있는 한,
그래서 시력이 살아있고 양 다리가 버틸 수 있는 한,
호흡처럼 습관처럼 계속되어야 할 일상이며 생활인 것이다.
계속해서 걸어 간다.
올레길 12코스 마무리를 위해서...
여기 신촌마을의 분기점은 12코스 전체 거리 16.9km중에서 6.9km지점.
아직도 가야할 길은 정확히 10km나 남았다.
재도 버디재보다 훨씬 높은 신촌재, 먹점재, 두개나 더 남았고.
가야할 길이 내게는 장장 태산 천리길이다.
지금의 내게는 엄청 부러운 광경!
옆지기 잘 만난 원주민 아주머니는 좋겠다. 이런 땡볕에 경운기도 탈 수 있고.
나는 배고프고, 다리 아프고, 땀나고.
화창한 봄날의 주말, 지구상에서 가장 편안한 베개를 베고 시체놀이나 할 걸...
그랬더라면 이렇게 생면부지의 외딴 산골에서
혓바닥을 빼물고 헥헥거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여기 하동을 거쳐가면서 반복해서 발견한 타지역과의 차이점 하나!
수많은 묘지 수호목으로 동백나무가 식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묘지목으로 선정하는 대부분의 나무는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갖게 마련인데...
동백나무를 묘지목으로 선정한 그 특별한 연유가 많이 궁금했다.
연세 지극하신 원로 어르신들도 그 유래는 잘 모르시겠다고...
계속해서 조사하고 밝혀볼 일이다.
제법 많은 농가에서 낙화생을 재배하고 있다.
지리산 땅콩 맛을 보기 위해서라도 올 가을에 반드시 다시 찾을 일이다.
이름처럼 저 낙화생 꽃이 떨어지면 땅콩이 될려나~!
인적드문 계단식 논에 설치된 무시무시한 전기 철조망.
포로 수용소에나 있을 법한 그 전기 철책을 대한민국 국립공원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날 줄이야!!!
야생 동물로부터 농작물을 지키려는 인간의 결연한 의지로 읽어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산길을 걷는 내내 오랜 시간을 생각하게 하는 구조물이었다.
신촌재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
거의 3km를 주구장창 지구 중력을 처절히 실감하며 올라야 한다.
게다가 길은 농로를 겸하기에 줄기차게 시멘트 포장도로!
싱그러운 꽃향기와 눈을 호강시키는 애기 초록마저 없었다면...
그래도 죽을 맛으로 오르긴 올랐겠지.
그럴려고 천릿길을 달려 왔으니까.
온통 꽃길이다.
이 계절에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고 행운이다.
검은 등 뻐꾹새의 애절한 울음이 나그네의 입을 다물게 한다.
봄산에 두루 울리는 이 새의 울음소리를 두고,
서울 경기 지방을 포함한 북부 지방에서는 "♬홀~딱 벗고 ♪홀~딱 벗고"
라는 소리로 들린다고 해서 별칭이 "홀딱새"라고 하고,
서부 경남을 포함한 남부 지방에서는 "♪엄~마 죽고 ♬아~빠 죽고"처럼
들린다고 해서 보릿고개를 알리는 설움의 새 "통곡새"라고 불렀다고.
남부 지방의 통곡새 가사는 제법 길이와 내용이 있는 민요로서
우리 민족의 구슬픈 애환이 묻어 있는 내용이기에
발굴해볼 가치가 있을 듯.
동작 빠른 민들레는 이미 홀씨를 만들었다.
부지런도 하지~
양지꽃이 피었다, 그런데 음지에서 피었다.
음지에도 결국은 봄이 왔다는 의미일 터...
이러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도무지 끝이 없다.
동행했던 친구는 나를 짐으로 취급하고 급기야 지리산에다 버리고 먼저 가버렸다.
그래도 가끔씩 뒤도 돌아보고 생사는 확인하더니
이제는 아예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냥 왔던 길로 확 돌아가 버릴까?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불쌍한 내 신세, 그래도 가야지.
에고~! 힘들어~!
세상에 믿을 수 있는사람,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산 길을 홀로 걷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목에 걸린 DSLR 카메라는 이미 내 목줄을 조이는 원수덩어리가 됐다.
예수가 돌로로사 언덕에서 지고 올랐던 십자가와 다름이 없다.
내가 미쳤지, 요즘 똑딱이들이 얼마나 잘나오는데~
내가 다음 번 둘레길에도 이 놈을 동반하면 성을 바꾼다~엉~엉~!!
이젠 돌아가기도 글렀다.
걸어 온 길보다 가야할 길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주사위도 던져졌고 루비콘 강마저 건넜으니 이젠 죽어도 앞으로~!
집에서 편안하게 뒹굴고 있을 걸~
괜히 왔나?
먹점마을이 지척이다.
먹점마을....점심을 먹어야 하는 마을~?
절묘한 타이밍에 절묘한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서 민생고를 해결~?
그런데 먹을거리는 죄다 친구의 배낭에 들었다.
그 배낭 맨 친구는 이미 내 시야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는데...
이건 다분히 계획적이야, 날 따라오게 만들려는 친구의 간교한 술책!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친구는 나를 버린게 아니었다.
신촌재의 정상부근에서 만찬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나물은 채취 금지인데 겁없이 언제 어디서 채취했을까?
튼실한 고사리도 벌써 씻어 놓았고, 애기 쑥도 향신료로 대기하고,
취나물 몇 잎과 산초잎 어린 순까지...
그리고 벌써 라면 물도 끓고 있었다.
근처에 물도 없는데 어디서 물을 떠 왔을까?
들어는 봤는가~?
고사리를 삼킨 산초 쑥라면...참으로 절묘한 향이 난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오묘한 스멜의 산채라면!
거기다 고추장도 약간 곁들이니
이건 신제품으로 개발해도 좋을만큼 맛과 향이 기발하다.
라면 회사에서 연락오면 레시피를 제공할 의향도...ㅋ
이 맛은 반드시 지리산 신촌재 정상에서 먹어야 알 수 있다.
세상의 그 어떤 라면도 여기다 견줄 수 없다.
다시 그립다, 그맛~!
생고사리의 화려한 변신, 그 맛과 식감은
울릉도에서 첫 맛을 보고 감탄했던 삼나물의 탄력있는 식감을 능가했고,
라면 스프가 배어든 미각은 담백하기까지...
고사리 넣은 라면,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이런 자리에서 이게 빠진다면 죄악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흔들어 마시는 부산 막걸리, 생탁~!
하동의 깊숙한 골짜기에서도 부산 막걸리를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역시 베개를 집어 던지고 지리산으로 달려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어!
내가 이 맛에 산을 오른다니까~
친구야 네가 차렸지만 많이 먹어!
그리고 고마워, 많이~!
혹여 결핍될 지도 모르는 단백질을 위해서 바다 영양소 참치도 한마리 눕히고.
고추장에 오이는 신선채.
지나가는 둘레꾼들에게 나눠준 오렌지는 어쩌다 사진밖으로 나가버렸지만
지리산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한 진수 성찬이다.
한 시간 정도 흡족하게 흡입과 휴식을 취하고,
다시 약진 앞으로~!
차도 한대 다니지 않는 길에 줄기차게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그러다 결국은 만난 비포장도로...반갑다, 흙길아~!
친구는 흥겹게 노래를 한다.
배낭에 있던 내용물들을 대부분 내 몸속으로 집어넣고 나니
짐이 가벼워져 하늘을 날 것 같다나~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본다.
저기 우계저수지도 괴목마을의 고즈넉함도 이젠 아름답다.
항상 지나온 고통은 추억처럼 아름답다더니...
길도 그런 것인가.
참으로 힘들게 올랐던 길인데, 이렇듯 아름답고 흐뭇하다니...
신촌재...
출발지로부터 약 10km지점이다.
남은 거리는 약 7km 정도!
고개도 하나 더 남았다.
할 수 있을거야, 암~! 해내고 말고~!
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랬을까...?
나무가지에 주렁주렁 물 가득찬 페트병이랑, 돌덩이를 달아둔 이유는?
친구는 알겠다고 하지만 나는 도저히 유추가 안된다.
한참을 뜸을 들인 친구의 답!
"나중에 열매 따기 편리하게 하려고 가지를 낮추게 하는 일종의 과일나무 길들이기"
헐~!!!
그렇게나 깊은 뜻이~!!
아무튼 인간의 포악함과 간사함의 끝은 어디일까?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어째...
천지에 매실이다.
새끼 손가락 손톱만한 애기 매실들을 주렁주렁 달고들 있다.
둘레길을 갈 때마다 느끼지만,
여름이면 농부들의 보물창고가 될 이런 길을 쉽사리 내어주신 농부들은
당연히 만수무강하고 복 많이들 받으셔야 한다.
감사합니다.
마냥 걷기 좋은 주말이라 둘레꾼들이 제법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중에서 몇몇 팀들은 벌써 면도 익혔고 간식도 주고 받았다.
스스로 자초한 고됨을 나누고 자연속에 스스로들 뛰어든 사람은 가슴도 쉽게 연다.
이것은 산에서 몸소 터득한 진리다.
물에는 빠지면 목숨이 위태롭지만 숲에 빠지면 황폐한 목숨도 살린다는...
미려한 지리산의 곡선을 휘감고 길은 계속된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옥의 티를 과감히 해량한다면 이 길은 정말 고운 길이다.
하지만 아스팔트의 견고함은 먼 길 걷기에는 정말 불편하다.
발밑의 체감 온도는 이미 비등점을 넘었다.
끓는다.
이윽고 먹점마을...
하동의 대부분 마을들이 그렇듯 매실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 엄청난 양의 각종 매실제품을 숙성시키는 숙성독이
오와 열을 형성한 채 하늘로부터 천혜의 자양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리산이 만들어 내는 매실의 진액.
그것은 매실이 아니라 이 계절이 빚은 축복이다.
해질 무렵도 아닌데 그토록 쾌청했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멀리 지리산을 호위하는 지봉들의 윤곽도 희미해진다.
지리산의 신묘한 기후변화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최첨단 일기 예보용 슈퍼 컴퓨터도 지리산의 기후만은 비껴갔으니...
그저 지리산 산신령님의 뜻대로 하소서~
대책없는 하생들은 그저 분부만 기다리겠나이다~
뿔난 시어머니 마냥 부은 표정의 하늘을 이고 길은 다시 오름을 탄다.
3재 중에 마지막 재인 먹점재로 오른다.
그나마 흙길이 많아 위안이 되고.
전형적인 우리네 산길의 모습, 낯설지 않아서 좋다.
그러나 힘들어 죽을지경이다.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다리와 발바닥에 감각이 떠난지는 꽤 오래 되었다.
그저 걷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습관처럼 괘종시계의 그것처럼 그냥 걷고 있을 뿐이다.
넋을 놓고 오르다 보니 또 친구가 시야에서 없어졌다.
결국 마지막 재에서 다시 버림을 받은 것인가!
친구의 의리를 다시 해부하고 심각하게 따져봐야겠다.
네발로 기어서 드디어 마지막 재인 먹점재에 도달했다.
여기서도 야멸찬 친구는 결국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여기, 먹점재는 출발지로부터 12.5km지점이다. 남은 거리는 4.5km!
길은 다시 두꺼운 시멘트로 옷을 갈아 입었다.
이럴 때 세발 자전거라도 있었더라면...
(두발 자전거는 브레이크 파열이 두려워서.)
잠시 쉬고 있던 산바람이 감미롭다.
인생의 내리막은 별로지만 산길의 내리막은 정말 좋다.
둔탁한 안개를 뚫고 섬진강이 불현듯 나타났다.
섬진강 너머 그 옛날 빨치산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던 백운산의 모습도 가물거린다.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의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경상과 전라를 장중하게 호령하다가 광양만으로 그 위용을 감추는
우리나라 남해안의 유일한 큰강이다.
고인 물 속에는 개구리들이 푸짐한 2세를 만들어 두었다.
교육 받은 일도 없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기막히게 소임을 다하니~?
우린 그 오랜 시간을 배워도 제 구실을 다 못하는데...
미동마을...14.2km 지점!
정말 낮시간 내내 미동도 하지 않던 하늘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비를 만나면 낭패를 볼텐데...
하지만 중도에 포기할 수 도 없다.
여기서 포기하는 유일한 방법은 16.9km를 완주해서 끝지점으로 가는 길 밖에는 없으므로!
그런데 길은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내려가도 쉬원치 않을 판에 다시 오르막이라고?
갈수록 태산이다.
시멘트 포장길마저 벗어서 팽개치고 길은 본격적으로 등반길로 접어든다.
구제봉 능선길이다.
그냥 체념하자, 길에다 그냥 맡기자,
고개는 딱 세 개라고 했는데 능선이라는 절묘한 이름으로 오름이 하나 더 있었다.
이럴 줄 진작에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엉~엉~
남루해지고 만신창이가 다 되어가는 나그네지만,
그래도 반갑다, 각시 붓꽃...
너 역시 탐내는 길손들이 많은데 용케도 살아 남아서 이토록 정갈한 꽃을 피워냈구나!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이 길을 간단다.
그래, 너희도 그 시린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이렇게 고운 색을 지켜냈는데,
나도 가야지.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그런데...
장대같은 비가 세찬 바람까지 데리고 왔다.
간간히 좁쌀같은 우박도 섞였다.
우리는 슬기롭게도, 정말 현명하게도 지리산을 오면서 우산도 우비도 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친구와 더불어 점심때 깔고 식사했던 돗자리를 스틱에 꿰어 뒤집어쓰고 비를 피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돗자리는 흡사 지리산에 저항하는 깃발 같았다.
이럴 때 우렁차게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도 불러야 하는데
세찬 빗방울이 우리의 입을 막았다.
아~ 어리석은 사람의 창대한 종말이여~
그래도 할 일은 다한다.
비에 젖을세라 비닐에 꼭꼭 숨겨두었던 카메라도
무엇인가 담아야 할 자리에서는 비닐 벗겨
돗자리를 지붕삼아 그 사명감만은 지켜냈으니...
둘레길 내내 연약하고 병약하다고 수시로 나를 버렸던 친구야,
그래도 사진 찍도록 돗자리로 하늘 높이 비를 가려준건 고마우이~
지리산 둘레길 12코스, 16.9km.
수치상의 의미로는 하찮지만,
내거 체감한 거리는 160km도 더 되는그 위대한 끝점...
무려 여덟시간의 사투(?), 내게는 그랬다. 그것은 분명 사투였다.
괜히 왔어, 정말 잘 왔어...
수십번도 더 되는 후회와 자찬을 거듭하면서 나를 다시 쳐다보게 해준 길.
여기 지리산 둘레길 12코스의 끝점에서 최종적으로 단언하건대,
오늘 나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비록 옷은 비에 젖었고 발은 벌써 화석이 되어버렸지만,
내 안의 알수 없는 그 무엇은 나로 하여금 다시 이 자리에서
다음번의 13코스를 얼른 도모하라고 벌써부터 아우성이다.
그런 것이다.
사랑없는 결혼의 자리에,
결혼없는 사랑이 생긴다고 했다.
열정없는 도전에서 성취가 생길 수는 없다.
도전없는 열정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이라는 성취가 사랑이라는 열정이 전제 되듯,
어떤 일에도 열정과 도전은 성취의 필수 조건이다.
머지않아 이 자리에서 다시 등산화 끈을 묶고 있을
내 안의 열정과 도전이 벌써 눈에 보인다.
친구야~!
다음에도 나를 13코스의 어느 오르막에다 오늘처럼 버려줄래~?
글 * 사진
느려도 너~무 느리지만 무엇이건 작정하면 반드시 끝을 보는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