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라는 것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이지만
과거 완료형이기도 하고 때론 과거 진행형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되돌릴 순 없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나그네는 사람을, 나라를, 세월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잃어버린 사람의 흔적, 몰락한 나라의 흔적, 이 땅에 아스라히 부서진 시간의 흔적.
그런 것들이 교묘하게 엮이고 섞여서 길이되고 역사가 되었을
실크로드.
그 역사의 길에서 또 하나의 역사적인 범죄를 만난다.
사람 하나를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백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던가!
은행을 털면 교도소로 가고
나라를 털면 대궐로 간다고도 했던가!
그렇다면,
남의 나라 보물 창고를 털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텅 빈 보물 창고를 보기 전에
일 단 한 번
꾸욱~!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색깔만은 화려한 화염산!
저 화염산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린 건 바람일까, 빗물일까.
화염산 골짜기를 지나가는 내내 화염산의 경치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엄연히 지구별 속에 있지만 전혀 다른 혹성을 닮은 곳,
이런 곳에 생명의 흔적인 길이 있고 나그네들이 있다는 것,
어쩌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화염산의 위용 앞에선 높은 다리도 큰 트럭도 어울리지 않는 소품일 뿐이다.
계곡 밑으로 흐르는 만년설이 만든 하천도 생경하기만 하다.
우리가 내린 곳은 화염산의 명소 천불동!
실크로드의 길섶에는 꽤 많은 천불동이 있다.
돈황의 막고굴, 쿠차의 천불동, 키질의 천불동, 유림굴, 서천불동 등....
천불동은 보통 불상이 많은 곳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에 해당하는데
이 곳은 무르투크(木頭溝)계곡의 서쪽 산허리에 은밀히 감춰진 석굴이다.
투루판 시내에서 약 45km거리에 있는
이곳 천불동은 특별히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위구르어로는
"아름답게 장식된 집" 이라는 뜻!
타클라마칸 사막 남북에 걸쳐 펼쳐진 서역 북로와 남로에는 수많은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국가가 남로의 호탄왕국(和田王國)과
북로의 쿠차국, 그리고 고창왕국(高昌王國)인데,
이 곳은 고창왕국을 대표하는 불교 성지였다.
남북조시대에 처음 만들어져서 당, 송, 원대를 거치면서 불교문화를 기록했는데
설법을 주로 하는 "차이티아 석굴"과
스님이 주로 거주하는 "비하라 석굴"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57개의 석굴이 발견되었지만 더 늘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고개를 살짝 숙여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니
비로소 베제클리크 천불동이 보인다.
강 옆 절벽을 뚫어 만든 석굴 사원!
주변의 황갈색과 대비되어 백양나무 숲이 유독 푸르게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돈황의 막고굴은 국가에서 잘 관리하고 있는 반면
화염산의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약간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6세기 남북조 시대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를 오가던 승려들이
이곳에 석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천불동의 기원이다.
그 때부터 14세기 원나라 때까지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
11세기~12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고창왕국이
수도를 투루판에서 지금의 감숙성 융창으로 옮기면서
동굴에서 수양하던 승려들이 떠나고 동굴은 800년간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걸 어떤 농사꾼이 우연히 발견해 지금의 관광지가 되었다고.
13세기 말엽,이슬람 세력이 뻗쳐오면서 이곳의 벽화나 경전이 불에 타 훼손되었을 뿐 아니라
20세기초 서구 열강과 일본의 탐험대들까지 거들어
현재 이곳 베제클리크 천불동엔 텅 빈 석굴만 남아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 1902년 부터 1914년 까지 무려 네번에 걸쳐 "탐험대라는 미명으로
도굴꾼들을 이 곳에 파견하여 대규모로 약탈을 감행했다.
2차 도굴단으로 동행했던 르 콕(Albert Von Le Coq 1860~1930) 의 경우는
아예 이 곳 석굴에 집까지 장만해놓고 계획적인 도굴을 했다.
그는 10여년 간을 여기 투루판 뿐만아니라 하밀, 쿠차, 돈황, 카슈카르까지
샅샅이 누비고 다니면서 수많은 유물들을 본국으로 빼 돌렸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유물"이라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수량도 지금은 알 수 없다는 사실!
다른 서구 열강의 유물은 비록 남의 땅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 반면,
독일은 2차 대전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엄청난 유물들이 모조리 파괴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천불동에는 83개의 석굴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57개 뿐!
도굴꾼과 이슬람 교도들, 그리고 자국의 군인들에 의해 석굴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곳이 서른여 곳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20개 정도 밖에 안된다.
중국 역사상 중국 전통 종교인 3교(불교, 도교, 유교)를 동시에 박해한 정부는
현재 정부인 중국 공산당이 유일하다.
1966년 봄에 시작된 이른바 "문화 대혁명"에서는
"낡은 것 4가지 버리기"(破4舊)의 대표적인 행동강령이 문화와 종교의 파괴였다.
불상과 벽화, 그림과 글, 사찰, 탑, 그리고 골동품은
봉건주의, 부르조아, 수정주의라는 죄명을 달고
그들의 행동조직인 "홍위병"들에 의해 확실히 파괴되었다.
반달리즘(Vandalism)의 대표적인 현장.
이 곳을 포함한 실크로드의 모든 석굴과 불교 문물 또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유적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에
보란듯이 채워져 있는 자물쇠!
그 옛날, 많은 유물을 도난당한 것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이겠지만,
개방된 방에서도 사진 촬영은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공안 한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이 천불동은 몽골의 침입에 의해 크게 손상되었고,
명나라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이 타종교에 배타적이기 때문이었으리라.
특히 이슬람인들은 불상과 벽화에 그려진 모든 눈들을
재앙의 원형질인 흉안(凶眼-아이눈 랏마)이라 여겨
통째로 도려내거나 칼로 긁어내는 훼손을 감행했다.
그래도 20세기 초까지는 어느 정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독일, 영국, 러시아, 일본의 탐험대들에게 알려지면서 훼손도가 심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앞서 거론한 독일의 르콕같은 경우는
이곳의 유물들을 모두 가져갈 순 없으니,
"내가 가져갈 수 없을 바에야 뒤에 오는 사람도 못 보게 하리라!" 하며
남은 유물들을 모조리 깨부수고 갔다고 한다.
<구체적인 또 다른 약탈의 사례는 필자의 "돈황의 막고굴" 편,
[실크로드 여행기13부]-2013년 8월 23일자 참조>
일본인 약탈자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도
돈황의 막고굴에 이어 이 곳까지 마수를 넓혔다.
그는 이 곳에서 주로 벽화를 뜯어내어 본국으로 옮겼는데....
그 중에는 우리나라 수중으로 불시착하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벽화도 꽤 있다.
이름하여 "오타니 컬렉션"이다
다음 사진의 벽화와 이 곳의 환경을 오버랩하여 감상하면
조금 더 현실감이 있으려나....
<사진 출처-용산 소재 국립 중앙 박물관>
불타가 출가를 감행하기 전의 모습이다.
용산 국립 중앙박물관에 이처럼 돈황과 베제클리크의 유물들이 있는 까닭은
오타니(일본 정토종의 승려)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사찰이 도산하게되자
자금 마련의 일환으로 조선의 광산 채굴권을 얻을 목적으로
뇌물로 약탈하여 개인 보관중이던 유물들을 조선 총독부에 증여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실크로드의 유물 1700여 점은
우리 땅에 유물(流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국립박물관에 모아서 전시하게 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아시아실>
<사진출처-국립중앙 박물관>
동굴의 벽에 볏짚과 진흙을 섞어 바르고, 회칠을 한 후에 그림을 그렸는데
중요한 것은
회칠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 그림선이 약간 번지도록 하여
전체 선의 부드러움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프레스코" 기법!
<사진출처-국립 중앙 박물관>
100여 년 전까지 위의 벽화들은 베제클리크 천불동에서
그 화려함의 진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의 보물 약탈꾼들은 힘주어 말한다.
"그 무렵 우리가 그 많은 유물들을 가져가서 보관하지 않았다면,
중국 너희들의 손으로
"정화(精華-문화 대혁명시 내걸었던 중국 공산당의 캐치프레이즈)"라는 이름으로
죄다 파괴하고 지금은 흔적도 없어지지 않았겠냐"고...
씁쓸할 뿐이다....
v
자신들의 손으로 파괴하고,
그리고 자신들의 손으로 다시 보수하여
지금은 수많은 순례자와 여행객들로 부터 엄청난 입장료를 거둬들이고 있으니,
이 무슨 역사의 모순이라는 말인가~!
어느 순간 이곳 천불동에 몽환적인 음악이 흐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위구르 할아버지 한분이 위구르의 전통 악기 "러와프"를 연주하는 소리!
그 소리가 참 구슬프다.
만신창이가 된 천불동에서는 음악조차 애잔하다.
나그네들은 한결같이 말을 잃고...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할아버지가 오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묻혀 있었던
이곳 베제클리크 천불동을 새로이 발견한 사람이라고 한다.
1년 365일 이곳에 앉아 연주를 하니,
천불동의 마스코트와 같은 분이라고 했다.
유물은 앞선 시대를 살다간 인류의 유산이다.
그 시대를 살다가신 "그 분들의 장소"에서 "그 분 들의 호흡"을 간직한 채
"그 분 들의 모습"으로 있을 때 비로소 유물(遺物)의 진정환 가치를 갖는다.
그 장소를 벗어나면 유물(遺物)은 유물(流物)이 된다.
주인의 무관심으로 흘려 보낸 것이라면 불쌍한 유물(流物)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게 약탈과 범죄의 목적으로 장소를 옮긴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장물(贓物)이다.
장물을 인류의 보물로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장소를 옮겨야한다.
장물의 다음 목적지는 당연히 주인이어야하고.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현생 인류의 후손들이라는 것.
이집트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 영국이나 프랑스로 가야하고
베제클리크 벽화를 보기 위해 대한민국 서울로 가야하는
이 불편한 진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후손들의 보물을 온전히 선조의 모습 그대로
지키고 보전하는 일,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