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타고 떠난 꽃한송이

[실크로드여행] 24부-땅 속에서 죽은 자를 만나다! <아스타나 고분군>

작성일 작성자 김작가

 

어느 학자(정수일)는 이곳 투루판을 일러

"문명의 용광로"라고 정의했다.

 

동양의 문명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넘어가다가 여기서 무릎을 꿇었고

서역의 문화 역시 이 곳 까지가 동진(東進)의 한계였다.

이슬람 세력의 동쪽 마지막 종착지가 여기였고

기독교(경교-네스토리우스 학파의 기독교) 역시 동쪽 끝이 여기였고.

중국의 유교가 서진을 거듭하다가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춘 곳도 이 곳 투루판이었다.

 

문명과 종교라는 태풍급 세력들도 여기,

타림 분지의 열기와 혹한은 넘을 수 없었으니...

 

동과 서가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결국은 사람과 신이 서로 만났던 곳.

 

그리고 그들이 쉬어가는 곳,

그들의 영원한 쉼터의 공간을 찾아간다.

 

신과 사람은 만날 수 없어도

우리는 만나야하기에

일단 꾸욱~

 

 

 

아스타나(阿斯塔那)고분군!

이곳은 "투루판 문서의 보고"로 불리는 지하 박물관이다.

"아스타나"는 편히 쉬는 곳, 또는 영원히 쉬는 곳이라는 뜻의 위구르어이다.

이름처럼 이곳엔 고창국과 당나라 시대 귀족들의 지하 묘지가 있다.

 

이 곳에는 두 개의 고창국이 존재했었다.

하나는 한족인 국씨(麴氏 高昌國 501~640)이고

또 하나는 카라코야 고창국(856~1209)으로 위구르인들이 건설한 나라이다.

여기에 묻힌 고창인들은 전부 한족인 국씨일가의 고창국 사람들.

 

 

이 곳은 수백 년 동안 10㎢(가로 5km, 세로 2km)의 모래벌판에 묻혀 있었는데

최초에는 오렐 스타인(Mark Aurel Stein, 1862~1943)을 포함한

영국 탐험대(중국에서는 도적떼라고 부른다)에 의해서 1914년에 최초 발굴, 약탈되고

일본에 의해서 재차 도굴 되었다.

 

그러다 1950년대부터 20여 년에 걸친 중국 정부의 발굴 탐사에서

500여개의 고분이 발견되면서

2700여점의 고대문서를 포함,

1만여점의 미술품, 농기구, 생활도구들이 쏟아져나왔다고 한다.

이 유물들은 당나라 때와 그 이전의 물건들이 대부분이어서

이곳이 역사와 문화의 옛 고도임이 증명되었다고...

 

 

건조지대라 습기의 영향이 별로 없어 발굴 당시 사체와 유물의 보존 상태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발굴된 것은 대부분 투루판 박물관과 우루무치 신강위구르자치구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곳엔 다른 곳과 다른 도표 하나가 있는데,

투루판의 연중 월별 기온을 나타낸 그래프!

가장 더운 7월의 경우 기온이 50℃에 육박함을 알 수 있다.

그래프 옆의 글에 연평균 강우량이 16㎜, 증발량은 3000㎜ 라고 적혀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사실 아스타나 고분은 카라호자 고분과 함께

두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통상 아스타나 고분으로 통일하여 부르고 있다.

 

 

"휴식처"라는 이름답게 분위기는 꽤 고즈넉하다.

하지만 이 안에 무수히 많은 미이라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좀 섬뜩하기도...

 

 

일부 묘소는 수직으로 땅을 파서 시신을 모시는 수혈식(垂穴式)형태지만

대부분의 무덤의 구조는 비스듬하게 경사진 계단식 묘도를 따라 내려가게 되어 있다.

 

 

석실에 들어가면 가장 안쪽에 묘 주인의 사체가 있는데

대부분이 부부 합장묘이며

건조 기후인 탓에 사체는 자연 미라 상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후 근육의 경직화에 따라

대부분의 미이라들은 무릎을 세우고 있고.

 

 

벽화에는 묘 주인이 좋아했던 글귀나 글이 적혀 있거나,

주인의 신조를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었다.

 

실제로 고인들이 좋아한 것인지,

아니면 남겨진 유족들이 좋아한 것인지,

시신들이 벌떡 일어나서 알려 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

 

 

당시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다.

 

 

 또한 여기에서 발견된 수많은 의류나 생활 용품들을 보면

그 당시를 엿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현장이기도.

 

이 곳, 아스타나 고분에서 발굴된 것고 같은 종류의 유뮬들은

우리나라 용산의 국립 중앙박물관에서도 전람이 가능하다.

이 역시 일본의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이가 약탈하여

당시 조선 총독 이었던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 正穀)에게 뇌물로 바친 것이,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뜨거운 햇살 아래 그늘 한점 없는 아스타나 고분!

그나마 지하 무덤은 살아있는 이들에겐 좋은 피양처가 되어준다.

 그러나 천 수백년 전의 시신을 맞이하는 기분 만큼은 상쾌할 수가 없다.

 

 

아스타나 고분 입구엔 특이한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중국 신화에 인간을 최초로 만든 창조의 신인 여와와 복희.

천지에 인간이 없음을 슬퍼한 여와가 황토와 물로써 최초의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대를 잇게하는 것도 여신인 여와의 역할이고

남신인 복희(伏羲)는 인간에게 농경과 불을 내리는 역할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동서 문명이 만나는 곳이어서인지,

동방에서는 복희씨를 창조의 신으로 삼았고

서쪽인 유럽에서는 여호아(여와)를 주신으로 삼았는데,

동서가 부딪히는 여기는 문명의 용광로 답게 두 신을 아예 합쳐 버렸다. 

 

이 곳에서 중국의 최대 국보급 그림 한점이 발굴되었는데

그 그림의 주인공은 여와와 복희였다.

그 그림은 현재 이 곳 박물관과 묘실에 걸려 있지만 둘 다 모사품이고

진품은 우리나라 용산의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 보관중.

 

 

<사진 출처-국립 중앙 박물관>

 

아스타나 고분군 제 40호 묘실에서 출토된 여와 복희도.

중국에서도 신성시하는 여와와 복희의 그림인지라 그 가치는 상상 이상이다.

이 역시 일본의 약탈자인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이다.

 

오른 쪽은 남신인 복희인데 그는 왼손에 측량을 위한 굽은 자(曲尺)을 들고 있다.

여신인 여와는 가위(혹은 캠퍼스)를 들고 있다.

 

두 신은 어깨를 껴안고 두사람이 하나의 옷을 같이 입었으며

하반신은 몸을 꼬고 있는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세상의 조화와 만물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뱀이라...

 

군대 의무대의 상징이 두마리의 뱀이 지팡이를 감고 올라가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즉,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전령과 치료의 신 헤르메스의 뱀이고

세계 보건기구의 상징인 한마리의 뱀도

역시 신화속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뱀이 아니던가.

 

결국 동과 서의 정 반대 방향에서 만나는 서로 다른 뱀도

결국은 생명을 다룬다는 공통점으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인류가 뿌린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내려놓고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

나그네는 대책없이 다음 길을 간다.

 

고창고성으로 향하는 길,

길가에 민가가 늘어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집안의 침대가 모조리 마당, 아니 길가로 나와 있다는 것!

 

 

이곳 사람들은 여름철에 너무 더워서 아예 침대를 밖으로 빼놓고,

잠도 밖에서 잔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고, 물이 귀한 곳, 당연히 모기도 없다.

낮동안 적당히 데워져 있는 침상, 충분히 수긍이 간다.

 

근데 신혼 부부들은...?

한가한 나그네는 별  염려를 다한다.

 

여와와 복희씨가 가까이 있으니 그들의 2세 걱정은 내가 안 해도 될듯...

 

 

낮에는 저 침대가 사랑방 노릇을 하고,

식사때는 식탁이 되고,

길가는 나그네에게는 편안한 의자가 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침대의 활용성마저 대륙적이다.

 

 

길옆으로 도랑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데,

이게 그 유명한 "카레즈"이다.

카레즈는 천산의 눈 녹은 물을 투루판 분지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건조 지역에 만든 지하 용수로인데 곳에 따라 이렇게 지표면으로 노출 된 곳도 있다.

 

 

마을 끝 도로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경찰차까지 동원된 걸 보면 큰 사고라도?

 

 

길 옆으로 차 한대가 전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차에 탔던 두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두어 시간 쯤 뒤에 다시 이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도로 변에 붉은 비단천을 덮고 누워있는 두 구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사고라면 아이들에겐 안 보여주고 싶을텐데,

어른들은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나와 구경중이다.

심지어 마을버스는 아예 멈춰 서서 갈 생각을 안 한다.

알고보니 위구르 족들은 죽은 사람을 보면 재수가 좋다고 여긴단다.

그래서 맘껏, 실컷 보며 재수를 부르는 중이라나...

  

 

우리나라의 어느 학자는 이런 학설을 펼치기도 했다.

"아스타나"라는 지명의 어원은 우리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즉 아사달과 같은 뿌리라고.

 

고어에서 "아사" "아스"는 "불타는"이라는 의미의 뜻이고,

"달", "탈라", "타스"는 우리 말에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는 "양달", "음달"의 뜻인

"언덕", 혹은 "초원"의 의미이다.

그래서 아스타라, 아스탈라, 아사달은 같은 뜻이라고.

 

서기 751년,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과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대승한 이슬람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세력권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던 전투현장인

"탈라스 전투"의 탈라스도 같은 어원이라고.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의학지의 이런 발표도 흥미롭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머리 골격과 유전자를 보유한 민족은

이 주변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바로 카자흐 족이라는...

 

보다 섬세하고 치밀한 논증이 필요한 부문이다.

 

1500년 전에 고인이 되신 분들과의 만남,

그리고 바로 몇 시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달리 하신 분과의 조우,

여행과 삶의 수레바퀴에 지친 나그네는 더욱 말이 없다.

 

그저

그 분들의 명복을 빌 뿐...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