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타고 떠난 꽃한송이

[실크로드여행]26부-2200년의 왕국을 허물어 포도를 키우는 곳<고창고성>

작성일 작성자 김작가

 

[실크로드여행]26부-2200년의 왕국을 허물어 포도를 키우는 곳<고창고성>

 

 

영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옛날부터 청어를 좋아했다.

그런데 청어는 영국으로부터 먼 바다인 북해 연안이나 베링해에서 잡히는 탓에

살아있는 싱싱한 청어를 구하기는 매우 어려웠고 당연히 고가에 거래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런던 수산 시장에 이변이 일어났다.

살아 있는 청어가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청어를 수송하는 수조에, 살아 있는 바다메기를 몇마리 같이 넣는 것이다.

바다메기는 청어의 대표적인 천적!

청어는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전력으로 도망 다니게 되고

그러한 연속된 긴장이 청어를 오히려 오래도록 살아 있도록 만들었다고.

 

<역사의 연구>를 저술한 아놀드 토인비가

그의 유명한 논리인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을 부연 설명할 때 자주 인용했던

이른바 "메기의 법칙"이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문명이나 국가도 외부로부터의 적절한 긴장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도전을 극복하는 민족과 국가만이 계승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도전도 없고 긴장도 없이 너무 오랜 평화를 유지한 민족은 반드시 사라진다.

아울러 도전에 소흘히 응했던 민족도 사라진다고도 했다.

 

오늘은 책에서 배운 그 역사의 증거를 찾아간다.

도전은 받았지만 응전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곳.

 

골프 선수 박인비는 알아도

역사학자 토인비는 모르는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해

기분 좋게 꾸욱~!

 

 

 

고창고성(高昌故城).

 

오아시스 도시, 투루판(吐魯番)의 2200년 역사를 온몸으로 안고 있는 곳.

수많은 문헌의 유실과 수많은 왕조의 부침, 그리고 종교의 교차 훼손으로 인해

현미경 같은 미세 역사는 들여다 볼 수 없지만

 

몰락한 왕국, 허물어진 문명이 어떤 모습으로 햇빛을 받고 있으며

어떤 자세로 그 옛날의 영화를 연출하고 있는지는 가감없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일단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의 첫인상은....

고즈넉, 그리고 스산함!

 

 

고창고성의 실체적인 기원은 아무도 모른다.

부분적으로 밝혀진 기록과 추정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번성했던 차사전국(車師前國 B.C108~A.D450)시대에 군사요새로 시작하여,

한무제 시절 서역 정벌을 위하여 파견했던 장건(  ?~B.C 114)에 의해 입수한 정보로

서역의 명마(名馬)인 한혈마(汗血馬-등줄기에서 붉은 피와 땀을 흘린다는 전설적인 명마)를 강탈하기 위해

한무제의 인척인 이광리(李廣利 ?~B.C 90)를 대완국(大宛國-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에 파병했는데

첫 번째 전투에서 대패한 이광리 장군이 전열을 재정비 하기위해 군대를 주둔시킨 곳이

바로 여기 고창국이었다.

 

그 이후로 고창국을 포함한 이 곳 투루판 지역은

실크로드의 가장 중심적인 도시로 발전하여

쿠차와 카슈가르를 거쳐 지금의 파키스탄으로 들어가는 "사막의 길"과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아랄해로  진행하는 이른바 "초원의 길",

그 두 갈랫길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 이후로 중국의 중앙정부가 안정되면 신강성 주변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중앙 정부가 흔들리면 어김없이 강역의 주인이 바뀌는 현상이 되풀이 되고.

한족이, 위구르족이, 투르크(돌궐)족이, 다시 위구르 족이,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몽골족으로 주인이 바뀐 변란의 지역이기도 했다.

 

 

 투루판 남동쪽 46km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 있는 이 고성은

5km의 둘레에 220만 평방미터의 넓이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크기였다.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수도로 조성한 초기의 한양성과 비슷한 크기.

 

이 뙤약볕 아래에서 이 넓은 고성을 걸어다니며 둘러보라고 하면 누가 환영할까.

 

그래서 나그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는 마차 아니, 나귀차가  대기중이다.

아니지, 여기가 중국이니 그야말로 중국 나귀인 당나귀가 맞다.

우리나라의 나귀는 그냥 나귀이고.

 

나귀의 어원은 고대 중국어인 "라귀"에서 왔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컴퓨터에 내장된 한자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여기에 그 기원 한자를 밝힐 수 없슴은 안타까운 일!

 

 

이런 영광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타고 가셨다는 "나귀"!

그걸 이렇듯 멀리, 예루살렘도 아닌 고창성에 들어가면서 타고 갈 줄이야...

 

사실, 전설의 명마를 구하러 가는 길에 발전을 하게 되었다는 이 명마의 도시에서

우리는 명마가 아니라면 적어도 국산 고급 세단이라도 탈 줄 알았다.

국산 승용차 에*스가 "명마"라는 뜻이 아니던가...

 

 

우리의 나귀차도 세차 아니, 세귀 중이시다.

때빼고 광내고 먼지 털고 그리고 이불도 깔고...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탈 당나귀차가 온다.

마부 아니, 귀부라고 해야하나~?

후덕한 인상에 한쪽 바지 살짝 걷은 이른바 유원지 패션!

딱 마음에 든다.

 

 

눈을 반 쯤 감고 보면 리차드 기어를 억지로 닮은 귀부 아저씨.

머리에 쓴 또삐(Topi)가 우리는 무슬림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유독 왼쪽 바지만 접어 올린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탓에 영원한 미스테리로...

 

 

왼쪽에 4명, 오른쪽에 4명,

당나귀차의 최대 정원은 총 8명이다.

그렇게 나귀차는 나그네들을 실고 잃어버린 전설의 도시 속으로 들어간다.

 

 

어쩌다보니 마부아저씨가 내 옆에 앉았는데,

아저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열창한다.

위구르 말이라 노래 가사를 알아들을 순 없지만,

멜로디가 딱 우리나라 "아리랑" 을 닮았다.

 

 

폐허가 되어버린 고창고성의 황량함과 썩 잘 어울렸던 노래!

야은 길재 선생의 시조라도 한 줄... 아니면,

어르신들의 옛날 노래, "황성 옛터"가 생각나는 애잔한 분위기.

 

 

나그네들의 채색이 주변의 풍경과 대비되어 생경하다 못해 뜬금없기 까지 하다.

온통 낮게 가라앉은 그 옛날의 높이들...

그 옛날 숲이 우거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벽돌 건물이 촘촘했던 그 시절,

나그네들은 머리 속에 가장 화려한 모습의 고창고성을 그래픽 재생 작업중이다.

 

 

한무리의 여행자를 태운 나귀가 흰 먼지를 날리며 고창고성 속으로 사라진다.

옛 왕궁은 아직도 둔탁한 실루엣으로 남아서 그 날의 웅장함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다.

 

이 흙덩이들이 결코 자연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 흙의 집합체 안에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켜켜히 묻혀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나그네들은 저마다의 소설들을 만들고...

  

 

그 옛날 천산 산맥의 북쪽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차사인(車師人-일부 학자들은 거사인으로 표현-페르시아계)들이 남하하여

차사전국을 형성하고 한나라와 흉노(凶奴-Hun:"사람"이라는 평범한 돌궐어인데

중국인들이 이렇게 "흉칙한 노예"라는 의미로 둔갑시켰슴)의 간섭을 거치다가

서기 501년 한족 출신인 국씨(麴氏)왕조가 들어서면서

국씨 고창국으로 본격적인 고창성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국씨 고창국은 140 여년을 유지하다가

당나라에 의해 다시 멸망을 하게 되는데...(서기 640년).

이 전투에 훗날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의 책임자인 소정방도 총책임자가 아닌 장수로 참전했다고.

 

그런데 역사서마다 멸망 년도가 달리 표현 되어있는데 서기 640년에는 당나라가

고구려와 피터지는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이 곳 서역만리까지 20만 병력을 보낼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당시 당나라의 목표는 고창국 뿐만아니라 고창국의 큰 배후 세력인 서돌궐이었기에

38,000명이 인구의 전부였던 고창국에 20만 명이라는 대군을 파병했다)

 

어쨌건 성의 규모는 동서 1.4km 남북 1.5k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한창때는 성내 거주 인구가 20,000~80,000명을 넘나들었다고.

 

 

그러다 다시 9세기 중엽부터

북쪽에서 남하한 이슬람계의 위구르 족이 이 땅을 계승하여

위구르 고창국(카라코야 고창국 856~1209)으로 번성을 이어 받았다가

13세기, 세계를 휩쓴 몽고에 의해 또 한 번 멸망의 쓴 맛을 보게 된다.

 

 

햇빛이 너무 뜨겁다.

그늘 하나 없고 앉아 쉴만한 쉼터하나 없는 그야말로 고난의 현장!

벌겋게 달아오른 이곳 고창고성에도 양산의 그늘을 좀 나눠주고 싶은 마음!

 

 

멀리 고창성의 진산(鎭山)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염산이 내려다 보고 있다.

고창고성은 북으로 화염산을, 남으로는 쿠무타크 사막을 앞트임으로 하여

한 때는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서 만든 하류가 주변을 적시던

늘 푸른 시절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귀부는 우리를 내려놓는다.

당나귀를 자세히 보니 말보다 훨씬 예쁘게 생겼다.

특히 커다랗고 깊은 눈은 예술에 가깝다.

 

 

나귀의 외모에 넋을 놓으신 아주머니 한분은 나귀에게 먹이 주기를 시도하셨는데...

 

 

나귀가 사탕수숫대를 잽싸게 낚아채는 바람에...

십년쯤 급 연로하셨다고...

 

 

성은 외성 내성 궁성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내성 주변에는 절이나 귀족들이,

그 주변에는 서민용 민가들이 늘어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집이었던 듯한 터에 지붕이 없다는 것!

 

 

똑같이 흙과 진흙으로 만들었는데 지붕만 없어졌다고 추측하기엔 무리가 있고

그 당시 집들은 지붕 없이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가능하다.

비가 안 오니 지붕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지붕의 대부분은 풀과 나무로 되어있었는데

화목으로 비료로 죄다 주변의 후손들에 의해 없어졌다는 설도 있다.

 

 

이곳의 흙벽들은 마른풀이나 버드나무 가지등을 섞어서 만든 벽돌로 만들었는데,

폐허로 변한 뒤 이 벽돌은 주변의 농민들이 가져다가 비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창 고성은 접근성이 좋은 성의 가장자리는 황폐화되다시피 하고

중앙으로 들어갈 수록 보존 상태가 좋다고.

 

 

고창 고성은 수많은 상인들이, 수많은 나그네 들이 거쳐가는

실크로드의 집산지 였던 까닭에

많은 민족과 그에 따른 종교도 같이 넘나들었다.

 

일찌기 인도로부터 불교가 그랬고

유럽계인 네스토리우스 학파의 경교(景敎)가,

페르시아계인 조로아스트교(拜火敎)가,

이슬람교(回敎), 유교(儒敎), 도교(道敎)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저 흙무더기 속에는 그러한 세월의 흔적들과 신앙의 흔적들이

산더미로 묻혀 있을 것이 틀림 없다.

 

 

돔형 승방, 대표적인 인도식 건물이다.

밥주발을 엎어 놓은 듯한 이른바 복발탑(覆鉢形塔),

인도를 출발한 불교가 동진을 거듭하여 중국으로 유입될 때

건축 양식도 같이 따라 들어 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이 건물은 서유기의 삼장법사의 원모델인 현장법사의 숨결이 깊이 스며있는 곳이다.

 

특히 고창국은 "현장법사"와의 관련으로 인해 세상에 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당태종 시절인 서기 627년(629년이라는 설도 있슴),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가는 도중,

모진 고생 끝에 이오국(伊吾國-오늘날의 하밀)에 당도 했는데

마참 하밀에 와 있던 고창국의 사신이

현장법사의 동선을 자국의 국왕인 국문태(麴文泰)에게 제보했다.

 

이에 고창국의 왕이 수차례 간청한 끝에

현장법사는 1개월간(2~개월이라는 설도 있슴) 머물면서

이곳에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강의했다고 한다.

 

 

현장이 강의를 했던 곳. 부분적으로 복원공사를 했다.

현장 법사의 음성이 널리 퍼지도록 인공의 음향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고.

좁은 이 공간엔 귀족들만 들어오고,

일반 평민들은 밖에서 들었다고 하는데,

그 연인원이 10만명이나 되었다나?

당시의 인구를 감안 한다면 아무래도 믿기 힘든 수치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고창성 인구는 40,000명이 되지 않았다.

 

국왕은 현장이 귀국할 때 다시 들르도록 간절히 부탁하면서

인도 왕복의 노자로 황금 1백 량, 은전 3만 매, 능견 5백필, 말 30마리,

그리고 25명의 시종을 보내고, 현장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현장이 지나는 길에 있는 각지의 국왕에게 친서와 선물을 보내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이 귀국할 즈음에 고창국은 멸망하고 없었다고 하니,

뜨거운 불심으로도 국가의 존망은 어찌할 수 없었나보다.

 

현대의 일부 학자 중엔

현장 법사가 어쩌면 "스파이" 였을지도 모른다고 극히 조심스럽게 얘기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시절 현장 법사가 강연을 펼치고 지나간 실크로드 주변의 모든 나라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니 그렇게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일테지 설마...

 

 

서까래를 얹었던 자리, 불상을 안치했던 자리!

상당한 규모의 흔적이 엿보인다.

사실 그것 보다는 그늘이 더 반갑다.

 

 

복원 해둔 감실(龕室), 그 시절에는 아마도 불상들로 감실은 만원이었을 것이다.

처참하게 허물어진 주변의 모습과 깔끔하게 복원된 지금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옛 우물 자리!

지금은 물이 있을리 없다.

물이 흐를 날이 다시 올까?

 

 

고창국은 위구르어로 성(城)이라는 뜻의 "콰라호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혹자는 "고창국"이라는 나라의 개념을 버리고

"고창성"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무겁게 가라앉은 그 화려했던 시절의 높이들!

십년 대한에 이슬비 내리듯 귀하게 내린 빗방울도 높이를 낮추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고,

하늘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불어 닥치는 강풍도 토담벽을 깎아 내렸을 것이며,

물론 2200여 년 성상의 무게도 예전의 높이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의 파괴와 쇠락의 가장 큰 원인은 불행히도 인간이다.

인간의 무모함과 무지가 만든 현장의 참모습이 바로 이 곳이다.

 

문화혁명 시절,

인민의 입으로 들어가는 목적과 수단이 될 수 있다면

그 어떤 유물이나 유적이라도 감히 이용하고 파괴해도 좋다는

이른바 유물사관(唯物史觀)의 구체적 실천현장이 바로 여기 였으니.

 

성벽은 대책없이 뜯겨지고 분해 되어 인민의 밭으로 형질 변경되고

건물은 가까운 곳에서 부터 파괴되어 포도밭의 거름으로 소멸되었다.

그렇게 잊혀진 왕국의 흔적들 위에서 

지금 투루판의 보물, 포도가 여물고 있는 것이다. 

 

모르겠다.

울타리를 쳐서 유물을 간직해야 하는 유심사관이 옳은 것인지,

옛 사람들이 남겨준 소중한 거름을 자양분으로 하여

오늘날 달콤한 포도를 먹을 수 있는 유물사관이 옳은 것인지. 

영원히 규명할 수 없는 인간의 과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 있던 그 옛날의 영화가 사라진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닥쳐온 도전을 이겨내지 못한 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

 

열기에 지치고 여독에 찌든 나그네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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