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타고 떠난 꽃한송이

[지리산둘레길-13코스] 그 길에서 또 하나의 가을을 보낸다.

작성일 작성자 김작가

 

학창시절에 영어공부를 하면서 가장 많이 암기했던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명문장에 속한다.

총 272개 어휘로 구성된 민주주의에 대한 이 위대한 연설문은

정작 민주주의라는 어휘는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가을...

그토록 눈물나게 아름다운 이 가을을 설명하면서

나는 가을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않고 이 아름다움을 설명할 방법을 알지못한다.

그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가을이 떠나가고 있다.

벌써 가을의 짧은 그림자를 밟고 시린 바람이 눈시울을 훔치고 있다.

이미 상당한 지역에는 거나한 눈소식으로 전국이 때이른 동장군에 떨고 있다는데...

 

불과 며칠 전까지도 미처 하직인사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 가득한 가을의 생생한 흔적을 찾아간다.

 

지난 봄에 지리산 둘레길 12코스를 완주하고

나는 여기서 또 한번의 등산화를 벗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대축마을, 지리산 둘레길 13코스의 시작점.

 

그리고 굳게 약속했었다.

절묘하게 하늘이 푸르르고 불현듯 세상이 높아지면

여기서 벗어둔 등산화를 다시 신겠노라고... 

 

신발끈을 고쳐매기 전에

부담없이 꾸욱~!  

 

 

 

 

지리산 둘레길 13코스는 대축마을을 시작점으로 하여

이 곳 악양천 축지교(0.3km)-입석마을(1.9km)-개서어나무 숲(2.3km)-아랫재(0.6km)

묵답(2.5km)-원부춘(1.0km)에 이르는 총 8.6km의 중산간 길이다.

 

거의 산행수준의 둘레길이며 도중에 식수 및 편의 시설이 전혀 없으므로

사전에 미리 준비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무릎 건강을 생각한다면 등산 스틱도 준비하는 게 좋다.

 

지도상의 양갈래 길중에서 왼쪽길을 선택하면 약 1.7km정도 둘러가게 되지만

소설 "토지"의 생생한 현장인 83만평 "무딤이 들"을 온전히 둘러볼 수있으며,

옆길로 잠시 우회라도 하게 되면 드라마 토지의 촬영 현장도 덤으로 볼 수 있다.

 

 

여기가 지난 봄 마침표를 찍은 둘레길 12코스의 끝점이다.

소낙비를 맞으며 마무리했던 지난 봄의 후유증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하늘도 공기도 제대로 축복이다.

 

 

오늘 이런 이정표를 몇 개나 거쳐야 마무리가 될지...

지리산이 마지막 가을 성찬을 위해 어떤 풍경을 연출해줄지...

배낭엔 기대와 설렘을 가득 채웠다.

 

친구와 함께 힘차게 출발~!

 

 

악양은 소설 <토지>의 고향이다.

4대에 걸쳐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바탕으로, 개인과 가족의 애환과 사랑을 불러낸 곳.

그래서 악양에는 평사리를 깃점으로 둘레길과는 또 다른 소설속의 길

"토지길"도 있다.

 

 

그 길은 일정부분 둘레길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하고.

취간림쪽으로 가다보면 상신마을에서

소설속 최참판의 실제 모델인 조씨고택을 만날 수도 있다.

 

 

'악양천'을 굽어보며 '악양들'을 아우르며 걷는 길은 평화롭다 못해 콧노래까지 나온다.

가을의 끝자락을 애써 놓지 않으려는 나그네는

최후의 한모금까지 가을 향을 붙들고 간다.

 

 

지리산이 최후의 용트림을 하다가 그 끝자락에다 의외로 만든 넓은 들 악양평야!

이 뜻밖의 황금 들판을 보고 소설가 박경리는 대하 소설 <토지>를 구상했다.

그리고 그녀는 소설에서 이렇게 악양 들판을 묘사했다.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약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이라고.

 

 

매화밭에 고즈넉히 마련된 소나무 두 그루는 이제

악양들판의 대표브랜드가 되었다.

 

"부부송(夫婦松)"이라는 이름과 함께.

 

땅 한뙈기 아쉬운 그 옛날의 악양 주민들이 넉넉한 인심으로 마련한

들판 한가운데의 여백(餘白)이 이렇듯 큰 결실로 영근 것이다.

 

 

악양은 지리산의 연봉인 성제봉(형제봉1,115m -"형"의 경상도 방언인 "성"으로 현지인들은 부름)

을 진산(鎭山)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악양과 지형이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악양.

 

악양은 거지가 들어와 한 집에 한 끼씩만 얻어 먹어도

1년이면 여섯 집이 남는다는 말이 있을만큼 풍요로운 곳이다.

 

 

지리산이 진액을 토해 흘려보낸 악양천의 물길.

왜가리 몇마리가 먹이사냥을 통해 이 물은 청정수임을 자랑하고 있다.

 

 

여름내내 살을 더하고 자양분을 채웠던 83만평의 무딤이 들판은

그 알곡들을 인간에게 알뜰히 비워주고 이제 휴식의 계절로 간다.

또 한 해의 소임을 마친 그들이 마냥 존경스럽다.

우리 인간도 언젠가는 저렇게 체념하고 그저 그렇게 소멸되는 거겠지.

 

 

그런가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겨울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자연은 언제나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는 순환의 공간이기에

어디서든 비우는 곳이 있으면 채우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지리산 둘레길 13코스는 산길이다.

길은 악양천과 무딤이 들판을 미련없이 과감하게 벗어놓고 일찌기 오름을 만든다.

미리 예상했던 그 고난의 길이기에

일단은 발걸음도 씩씩하게...

 

 

길지 않은 마을길을 동네개들이 깨지 않도록 숨죽여 지나고.

행여 주민들의 마당속이 보일까봐 발밑만 바라보고 지나간다.

 

 

하동은 대봉감의 본향이다.

한여름의 뙤약을 고스란히 농축시켜 진노랑색 숙성으로 마음껏 여물었다.

올해에는 감을 제외하고는

땅에 뿌리를 두고 가지 끝에 열린 모든 과일이 대풍이라는데...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하는 배도 수확중이다.

세계로 나가는 하동의 명산품, 배.

한 두개 사서 맛보려고 주변에 있을 주인을 찾았으나,

30분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다.

입엔 침이 가득 고인 채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입석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수종(樹種)은 푸조나무, 수령은 300년을 넘었다고.

열매의 달콤함을 기억해내고 주변을 살폈지만 떨어진 열매는 없었다.

역시 입맛만 다셨다.

 

 

둘레길 13코스 최초이자 최후의 주막!

파전에 막걸리 한사발이 눈앞에 가물거렸지만 이 길에 오르막이 태산이란다.

친구의 추상같은 불호령에 멱살을 잡힌채 끌려 나왔다.

또한 입맛만 엄청 다셨을 뿐이다.

쩝~!

 

늦가을의 지리산 둘레길 13코스는 침만 흘리고

입맛만 다시는 그런 고약한 코스이다.

 

 

멀리 500리 물길 섬진강이 머리를 풀고 있고

그 너머로 요즘 22번 째 우리나라 국립공원 지정으로 논의중인

광양의 백운산(1,222m)이, 억불봉(997m)이 듬직하게 하늘을 이고 있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치닫고 내려오다 여기다 마지막 봉우리인 형제봉을 만들고

섬진강 앞에서 잠시 대간을 낮추다가 남은 기력을 끌어모아

마침내 최후의 발악으로 치솟은 지맥들이다.

 

 

보라색 꽃들이 지천인 가을 끝자리에 마지막 남은 붉은 꽃 한송이.

늦여름에 피는 꽃이 양지 쪽이라 늦가을까지 꽃을 달고 있다.

붉디 붉은 꽃 속에 별을 품은 꽃,

채 반나절도 못피고 사라지는 명 짧은 꽃.

 

둥근잎유홍초(留紅草).

 

바다 멀리서 물 건너와 온 몸으로 버티며 이 땅에 뿌리내린 너!

참으로 대견하다.

 

 

차나무꽃.

지리산이 자랑하는 천연 차나무도 꽃을 피웠다.

모든 나무의 낙엽이 지고 풀이 마를 무렵에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데,

은은한 향기를 뽐내는 이 녀석의 꽃말은

향기처럼 은은한 "추억"이다.

 

 

어느 누가 이 곳에 콩 씨앗을 흘렸을까,

홀로 외롭게 자란 메주콩도 알차게 여물었다.

내게 모든 산과 길에는 이 녀석의 깍지가 씌어있는 듯!

 

 

호젓하게 산으로 오르는 길,

거기서 마지막으로 만난 인공 화장실,

이후로는 나그네의 모든 생리 현상은 필히 주변의 자연과 의논해야 한다.

 

 

소설 <토지>에는 다양한 사랑이 스며있다.

그 중에서...

 

양반이라는 무거운 겉옷과 부잣집 안주인이라는 허울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서희라는 영특한 딸까지 버린 채,

근친이자 머슴인 구천이와의 파격적인 사랑을 끌어안은 채

야반도주를 감행한 별당아씨가 지리산으로 사랑도피를 할 때 넘었던 그 길이

아마도 이 길이 아니었을까...

 

 

사람의 발자국과 사연들의 흔적,

그리고 세월의 나이테를 섞어 만든 길!

 

 

그 길에는 지금 가을이 소복히 쌓였다.

지천으로 내려 놓은 것들이 모든 채색을 동원하여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나그네의 눈에는 아름답지만 그들에게는 실로 처절한 생의 마무리.

 

 

푸름과 붉음이 서로를 독려한다.

먼저 가라고, 머지 않아 따라 가겠노라고...

그래서 이 가을, 그들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리라.

 

 

그들 곁에 자리한 길도 덩달아 아름답다.

햇살이 스며들어 온기를 머금은 숲속의 길은 아늑하기까지 하다.

겨울로 가는 이 가을의 정겨움이 길마다 가득이다.

정말 정겹고 아름다운 길...

 

 

길이 조금 거칠어도 무슨 대수이겠는가.

평탄하고 정제된 길을 걷고자 했다면 도회에 지천인 아스팔트를 줄겼어야 했다.

호흡이 거칠어도 이젠 푸념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산이란 당연히 숨차고 다리 아픈 곳이거늘...

 

그런데,

친구가 또 나를 버리고 갔다.

까마득히 앞서간 친구는 흔적도 없다.

 

 

전에는 이런 고갯마루 쯤에서 가장 얄미운 자세로 앉아서

혀를 있는대로 빼어물고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가녀린 친구를 기다려 주곤 했는데...

이젠 고갯마루에도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세월따라 친구도 변한건가?

 

 

형제봉의 능선을 넘고 배신의 한을 곱씹으며

그렇게 죄없는 낙엽을 짓이기며 한참을 가는데...

 

어디선가...

코끝을 파고드는 것이 있었으니,

오잉~ 이 심산유곡에 웬 양파냄새~?

 

 

조망이 활짝 트인 절묘한 곳에서 발견된 친구는,

이렇게 턱하니 미리 자리를 깔고 지리산의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친구는 나를 버린게 아니었다.

 

 

화려하지 않은가,

양파 잔뜩 넣고 끓인 친구사랑표 라면과 정성들여 산(싼x) 김밥,

그리고 역시 정성들여 산 김치,

나를 위해 잰걸음으로 앞서 와서 마련한 이 시간의 기막힌 식단!

 

역시 넌 내가 버릴 수 없는 친구라니까~

 

 

거기다 이 계절의 가장 효율적인 디저트인 감,

감 떨어 졌을 때 감이야말로 가장 감각있는 과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트남 커피까지,

둘레길을 걸을 때면 꼭 동행하는 친구!

그 친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튼실한 식사를 마치고 육신의 충만감을 한껏 드높이며

다시 산행 시작~!

 

 

길은 황공하옵게도 편안한 평짓길이 이어지고,

필름 끊긴 콧노래가 다시 스멀거릴 무렵,

 

 

길은 자만과 오만에 빠진 나그네를 오르막으로 준엄하게 질책한다.

"심하게 잘 못했습니다."

 

 

해발고도 778m.

 

평짓길에서 시작한 둘레길은 바야흐로 어지간한 산높이를 헤아린다.

그저 정신줄을 놓고 걷다보면 평짓길이요,

그렇게 다시 걷다보면 다시 오르막이다.

 

 

지리산 둘레길 13코스는...

이제 드디어 오르막의 꼭짓점이라고 섣부른 판단을 할 무렵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오르막이 다시금 펼쳐지는

끊임없는 배반의 길이다.

 

 

둘레길의 오르막은 정말 피곤하다.

특히나 "재"라는 이름을 지닌 지리산 둘레길의 오르막은 더욱 힘이든다.

그러나 이름조차없는 오르막은 그야말로 배반의 언덕이다.

지리산 둘레길 13코스에는 그런 오르막이 너무 많다.

 

 

그렇게 나그네를 희롱하는 길섶에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을이 몸서리치게 내려 놓은 한 해의 결실들,

다람쥐가, 청설모가, 배고픈 나그네가 습득한 이 가을의 결과물들.

그저 보람차고 그저 탐스러울 뿐이다.

 

밤 몇 톨, 도토리 몇 알...

그저 대견하고 흐뭇할 뿐이다.

까닭은 그저 지금이 눈물나게 아쉬운 가을이라는 것 뿐이다.

 

 

떠나가는 가을.

어디서든 떠나는 이는 그저 소박하게 소리없이 떠나주면 좋겠는데,

지리산의 가을은 그렇지 못하다,

 

온갖 색깔로 제 말을 다하고 제 소리마저 다 외치고 떠나는 이들.

 

그래서 지리산의 가을은 더없이 각별하다.

때로는 눈물을 흘릴만큼 그들은 서럽게 떠난다.

 

 

다시 올 것이다.

불과 서너달의 기간은 인간이 설정한 시한부일뿐,

그들이 작정하고 그들이 내정한 그들의 귀환은 인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땅으로 돌려준만큼 내년 봄,

다시 우리들의 자양분을 돌려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푸르른 녹음과 찬란한 채색으로 다시금 지리산의 빛깔을 재현할 것이다.

 

 

걷다보면 콧노래를 섞어도 좋을 푸서릿길이고

어느덧 산길에 취하다보면 자드락길이 새로이 펼쳐지는가 하면,

평짓길을 만나 정신줄을 놓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는 오르막,

그렇게 허약한 나그네를 농락하는 지리산 둘레길 13코스.

 

그렇게 야속했던 변덕의 길도 산죽터널을 지나면서

지리산세의 거친 호흡을 마지못해 내려 놓고 있었다.

 

 

 

지리산 둘레길 13코스의 막바지.

이름만 사찰인 조운사를 지난다.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은 분 없으니...

 

장엄염불(莊嚴念佛)의 후렴귀를 사찰 벽면에 담았다.

세상을 밝히는 부처님의 가피를 찬양하는...

 

그런데 이 길은...

 

天上天下無如路

세상에 이렇게 힘들여 걷는 길은 없으니...

 

세상의 걷는 길은 부담없이 걸어야 비로소 좋은 길이다.

구태여 산행을 강요하고 체력을 강권해서는 좋은 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로소 반가운 이정표를 만난다.

지리산 둘레길 13코스의 마지막 종착역 원부춘.

 

해도 떨어지고 달마저 등을 돌린 저녁 무렵,

세상의 모든 피로를 온 몸에 등짐처럼 이고지고 도착한 곳.

 

 

다시 또 하나의 끝점에 왔다.

 

또 다른 어느 새로운 날 여기는 전에 그랬듯 또 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아무도 권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란 올 때에는 자신의 통곡으로 왔지만

갈 때에는 타인의 통곡을 들으며 이승을 떠난다.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올 때에는 설렘으로 다가오지만

그 길을 떠날 때에는 보람과 흔적을 얹어서 그 길과 작별을 한다.

보통의 길은 그렇다.

 

하지만 둘레길은 조금 다르다.

약속처럼 또 올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이 곳은 작별의 공간이 아니다.

 

다음에 다시 찾을 길이 있어서 참 좋다.

이 가을이 가도 이 길에는 또 다른 계절이 있어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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