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타고 떠난 꽃한송이

[순천] 사람 산다는 것... 이 머꼬~?<조계산 송광사>

작성일 작성자 김작가

 

사람 사는 것, 그저 세월따라 흔들리며 사는 거지...

흔들리면 멀미 한다구요?

그래도 누군가가 흔들면 흔들려야죠,

살아있다는 표시는 해야하므로...

 

이 세상에 오기전에 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그렇게 전개되는 우리네 삶,

 

"이게 뭐꼬(시심마, 是甚麽)?"

 

세모(歲暮)에 들면 누구나 한해를 돌아보며 회억(懷憶)에 잠긴다.

그래서 연초에 했던 딱 그만큼의 후회를 내려놓기도하고

또 다른  후회를 위해서 그만큼의 미래를 다시 장만하기도 한다.

 

이무렵,

겨울산은 모든이들의 내려 놓음이 있어서 좋다.

그 겨울산에는 세월을 안고사는 산사가 있어서 더욱 좋다.

겨울산과 산사(山寺)가 다같이 묵언수행에 들 무렵,

철부지 나그네도 혹여 그들의 겸허함을 배울 수 있을까하여

겨울 산사를 찾는다.

 

순천 송광사.

 

일단 꾸욱~한번

누르고 가실게요~^^

 

 

 

 

불교에서는 귀한 보물로 간주하는 세가지가 있다.

즉, 불(佛-부처),법(法-경전), 승(僧-승려)의 세가지 보물(三寶)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세가지를 대표하는 삼보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양산 통도사,

팔만대장경의 불경을 수장하고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 합천 해인사,

그리고 여기 열 여섯의 큰스님을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 순천 송광사.

이름하여 해동(海東)의 삼보사찰로 대접받고 있다.

 

 

뿐만아니라 송광사는,

한국 불교 조계종의 8대 총림(叢林)에 해당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총림은 승려들의 참선 수행을 위한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교육기관인 율원(律院)등을 모두 갖춘

대학으로 치자면 종합대학과도 같은 사찰이다.

 

금정총림 부산 범어사, 영축총림 양산 통도사, 가야총림 합천 해인사,

팔공총림 대구 동화사, 쌍계총림 하동 쌍계사, 덕숭총림 예산 수덕사,

고불총림 장성 백양사, 그리고 여기 조계총림 순천 송광사를 더해 여덟 곳이다.

 

 

송광사(松廣寺)는,

 

신라말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당시에는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나 고려조에 들어와서

한국 불교 조계종의 원류를 만든 보조국사 지눌이

지리산에 있던 정혜결사(精慧結社)를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비로소 중창과 불사를 거듭하여 대가람으로 융성하기 시작한다.

 

그무렵 송광산이었던 산 이름도 중국 조계종의 시원산(始源山)이었던

지금의 광동성 곡강현의 조계산(曺溪山)과 동명으로 개명하고

원래 산 이름이었던 송광은 오히려 사찰명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찰들이 그러했듯,

외침(임진왜란, 정유재란)과 동란(6.25동란), 내란(여순반란사건)등의 재난을 겪고

중창과 복원을 거듭하면서 오늘의 송광사에 이르렀다.

 

 

 

조계산 숲길을 부단히 걸어서 일주문을 지나면 묘한 전각이 울안에 자리잡고 있다.

다른 사찰에는 없는 독특한 형태의 전각, 고작 한 칸짜리 작은 가옥 두 동(棟)이다.

 

이름하여 세월각(洗月閣)과 척주당(滌珠堂),

이름 그대로 달을 씻는 전각이요, 구슬을 씻는 집이라는 뜻이다.

 

관욕(灌浴)을 하는 곳이다.

불교에서는 죽은 후에 영혼을 천도할 때 영혼에 대한 목욕의식을 행하는데

이는 영혼이 세속의 인연과 오염을 씻어서 청정한 영혼으로 천도를 하기 위함이다.

 

세월각의 달은 여성의 성을 의미하여 여성의 영혼을 목욕시키는 곳이고,

척주당의 구슬은 남성을 뜻하며 남자의 영혼을 씻는 곳이다.

산 사람으로 간주하면 여탕과 남탕인 셈이다.

 

이 곳에서 관욕을 통해 청정한 영혼으로 거듭나면

비로소 지장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묘한 것은 남탕에 해당하는 척주당은 부처가 계신 대웅보전을 향하는데

여자의 영혼을 관욕하는 세월각은 입구인 일주문을 향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여자의 영혼은 부처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했는데,

어떤 의도를 숨기고 그렇게 설계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는.

 

 

송광사의 연혁에 의하면,

송광은 18명의 큰 스님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는데,

나무 목자(木)를 파자(破字)하면 (18:十八)+ (스님:公)이 나서 세상을 넓게(廣) 편다라고.

 

 

지금까지 16국사(國師)를 배출했으니

앞으로 두 분의 고승이 더 나올 거라고하는가 하면,

혹자는 법정 스님을 17번 째 큰스님으로 보면

앞으로 한 분의 큰 스님이 남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어쨌건 송광사는 우리나라 33 관음성지중에서

열 세 번째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다.

 

 

 송광사가 배출한 제 1대 국사,

보조국사 지눌(知訥)스님(1158~1210)의 진영(眞影),<보물 제1043호>

 

 

재물을 훔치면 일개 도적이 되지만 나라를 훔치면 영웅이 된다는데

부처를 대신하는 큰 스님의 진영을 훔친 이는 지금 무엇이 되어있을까,

도적의 품에 보관되어 있는 큰스님들은 과연 도적인 그를 용서하실까.

 

 

송광사의 대웅보전은 인간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부처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 면적을 108평으로 제한 했다.

 번뇌라는 것은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쉬이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던가.

부처의 법력으로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세속이고 번뇌인 것을...

 

 

 

송광사에는...

그 다양한 의미만큼이나 보유하고 있는 보물들도 많다.

국보 4건(4점)에, 보물 19건(135점), 그리고 유형문화재 38점등,

6,000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불교 박물관이기도 하다.

 

 

송광사는,

여러 대찰과는 달리 배산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고(조계산-887m)

가람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도드라져서

육중한 산세들이 가람을 보듬고 있는 듯한 여타 사찰과는 달리

송광사는 가람이 뒷동산을 업고 있는 듯한 편안한 자세를 하고 있다.

 

 

승보사찰답게 다른 사찰에는 없는 승보전(僧寶殿),

다른 전각에 비해 규모나 꾸밈새가 특별하다.

 

 

 

 

 

 

대웅보전을 온통 감고 있는 불교 이야기들...

 

우리나라의 불교형태인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덕목인 여섯 바라밀(六波羅密)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섯 바라밀은...

베풂인 보시(布施), 율법을 지키는 지계(持戒),참을성인 인욕(忍慾),

그리고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의미한다.

 

바라밀은 피안(彼岸)으로 한역(漢譯)되기고 한다.

 

그중에서 첫번 째가 보시(布施)수행, 

왼쪽 그림은 부처님이 수자타 여인으로부터 죽 보시를 받는 장면이고

오른 쪽 그림은 과거불 중에서 맘가라 부처님께서 전생에

자식들을 스스로 보시하는 장면이다.

 

 

지계(持戒),

가죽주머니에 목숨을 싣고 표류하는 다섯 비구앞에

나찰(羅刹-악귀)가 나타나 가죽주머니를 빼앗으려 하지만

기어코 지켜내었듯 불교의 계율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인욕(忍慾),

부처님을 시기한 가리왕(歌利王)이 부처님의 몸을 칼로 난자할 때도

남을 원망함이 없이 참아내는 부처님의 모습에서 인내를.

 

 

정진(精進),

높은 벼랑위에서 떨어지지않도록 모둠발로 버티면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아나존자의 7일간의 수행을 가르친다.

 

 

선정(禪定)

달마조사의 아홉 해 동안의 면벽 수도,

 

 

지혜(智慧),

당나라로 수학을 떠나던 원효대사가 해골물 한바가지로

불현듯 깨우친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

그렇게 심야에 달디 달게 들이킨 해골물 한바가지가

그를 신라의 석학고승으로 만들었다.

 

역시 지혜는 책으로 배우는게 아니다.

 

 

1.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선다.

곧 부처를 수소문하는 것이며 진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겁없이 덤비기는 하지만 처음의 의지만큼 만만치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 소는 부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의 속명은

"고타마 싯타르타"이다.

여기서 고타마(Gotama)는 성(姓)에 해당되는데,

부족어로 "가장 멋진 소" 혹은 "위대한 소"라는 뜻이다.

 

불교는 선(禪)을 추구하는 종교이고 그 선의 최종 목적지는 "깨달음"이다.

곧 깨달음이 부처의 경지이고 그 깨달음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소"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오늘의 송광사를 있게한 최대의 공로자인

고려 명종조의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호도

'소치는 사람'이라는 "목우자(牧牛子)"였고

경허선사(1846~1912)는 '깨어 있는 소'라는 "성우(惺牛)"였으며,

만해 한용운선생(1879~1944)은 자신의 초라한 집을 일러

'소를 찾아가는 곳'이라하여 "심우장(尋牛莊)"이라 불렀음도

석가모니의 속명에서 그 연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여러 사찰의 벽면을 휘둘러 그려놓은 심우도(尋牛圖),

송광사의 심우도는 우리나라 조계종 선종 불교의 태두라 할 수있는

보조국사 지눌을 생각한다면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2.견적(見跡).

소를 찾으려면 일단 발자국부터 더듬어야.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찾아 읽고 명산 대찰을 부지런히 찾지만

소는 여전히 묘연하다.

 

절에 왔다고 하여 부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3.견우(見牛).

비로소 소를 찾았다.

그런데 너무 멀리 있다.

먼 발치에서 소를 바라만 볼 뿐 그 진리는 아직...

 

 

4.득우(得牛)

드디어 소를 얻었다.

그런데 소는 아직 들소일 뿐이다.

야생의 소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법문도 알고 부처도 알겠는데 겉으로만 알 뿐이다.

 

아직도 많이 멀었다.

 

 

5.목우(牧牛).

소를 길들이다.

코뚜레도 장착하고 말귀도 트고나니 비로소 소가 내 뜻대로 순해졌다.

 

그렇다고 진리조차 다 내것이 된 것은 아니다.

 

 

6.기우귀가(騎牛歸家).

드디어 소를 타고 집으로 간다.

소등에 올라 앉아 한가롭게 피리도 불어본다.

 

편안한 진리가 내안에서 보인다.

 

 

7.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어느덧 사라지고 사람만 남았다.

사람은 더없이 한가롭고 평화롭다.

 

 

8.인우구망(人牛俱忘).

소와 사람이 모두 없어졌다.

시작도 끝도 없어지고 주객도 없어졌다.

 

이제는 비로소 깨달음이다.

 

 

9.반본환원(返本還源).

이제는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본래부터 청정했던 자기의 본심에서 눈을 뜨다.

 

 

10.입전수수(入廛垂手).

비로소 세상에 나아가서 중생을 제도할 때다.

이웃과 함께 티끌 속을 같이 뒹굴며 세상에 자비를 내린다.

 

깨달음을 찾고 나를 찾는 일이 그림처럼 이렇게 단순하고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절집 밖 세상은 허울뿐인 도매금으로 거리마다 야단(惹端)인데,

그게 무슨 좋은 것인양 이제는 절집까지 따라 나섰다.

 

 

관욕(灌浴)까지 해야먄 들어 올 수 있는 특별한 고승지찰(高僧之刹)에

돈을 부르는 상혼이 열렬하다.

발소리도 낮추고 목소리도 죽이며 모처럼 사람사는 뒤안길을 생각하는

겨울 산사의 모습은 세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면 안될까.

산사를 떠나는 나그네는 의외의 곳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역시 사는 것은 여러모로 어렵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일까...

 

혹시 무엇인가 내려놓을 수 있을까하여 산사라도 찾을 때면

어떤 때는 더 많은 무엇인가를 잔뜩 짊어지고 발걸음을 옮길 때가 많다.

어쨌건 사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많이 어렵다.

 

불경원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어쩌다 한국 선종 불교의

자의반 타의반으로 최대 화두가 되어버린 경상도 말,

 

"이게 뭐꼬?"

이른바 "시심마(是甚麽)"

 

"산다는 것,

이게 뭐꼬?"

 

이 말을 오히려 화두(話頭)가 아닌 화미(話尾)로 처음 쓴

중국 선불교의 태두인 육조 혜능(六組 慧能 638~713)은,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無頭無尾)라고 했고

이름도 글자도 없으며(無名無字)

뒤도 없고 앞도 없다(無背無面)라고 하여

그 조차 탄식을 내려놓으며 물었으니,

 

"이것이 무엇인고(是甚麽)?"

 

고승에게조차 어려운 화두를 목에 가시처럼 걸 이유는 없다.

겨울 산사를 떠나며 나그네는 옛날 어느 수행자의 말을 기억해본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타인을 위하는 데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자신을 위하는 데서 온다.」

 

또 새로이 한해를 시작하는 시점에,

이게 무엇인지 참으로 애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차분히 내가 아닌 내 주변과 이웃을

진정으로 한 번 생각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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