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타고 떠난 꽃한송이

[상해여행] 지켜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작성일 작성자 김작가

「부끄러움에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습니다.」

<백범 김구(1876~1949)>

 

그렇습니다.

어떤 곳을 여행을 하다보면 울컥 눈물이 날 때도 있고

불현듯 가슴이 벅차 오르는 그런 곳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너무나 죄송스럽고 안타까와서 분통이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곳이 그랬습니다.

 

상해 제1의 번화가인 남경로의 한 곳,

상해 지하철 1호선 신천지 역 6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

상해 지하철 7호선 황피난루 역에서 역시 도보로 10분 거리.

이른바 중국속의 유럽이라고 불리는 거리,

골동품의 거리인 동타이루를 끼고

예술인의 거리라 불리는 타이깡루를 품고 있는

 

신천지(신티엔티-新天地)거리...

 

 

그 요란한 거리에 우리의 정통성을 알려주는 소중한 공간이

있는 듯 없는 듯 웅크리고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건물.

 

 

지극한 관심과 집중력을 보태지 않으면 찾아 내기도 힘든 곳.

고작 차 한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으슥한 골목길,

95년 전, 우리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숨어 들어와

언제 이룩될지도 모르는 머나먼 과업을 펼쳐내고자 했던 우리의 성지.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인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야말로 남이 남긴 흔적.

 

그렇게 그곳에 우리의 눈물겨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멀리서 물건너온 조국의 나그네들이 스산한 적막을 깰 뿐,

대륙의 젖꼭지 같은 이웃의 작은 나라에게는

 이 곳이 제법 의미가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만 

이웃 주민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곳.

 

이 곳이...

빼앗긴 나라의 정부 요원들이 숨어 살았던 한과 능욕의 현장입니다.

 

 

남의 나라의 슬픔과 애환을 간직한 이런 곳에

굳이 물적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중국인이나 제3국인이 입장할 리는 없고,

 

전설처럼 잊혀져 가는 이곳 현장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오로지 황해 상공의 거센 제트 기류를 뚫고 달려온

독립 운동 한 번 해본 경험조차 없는 모국의 후손들 뿐.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당시의 세계적 트렌드였던 민족 자결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자,

나라 잃은 우리 민족도 그에 호응하여 반도에서는 1919년 3.1항거가 일어나고

같은 해 4월, 김규식을 대표로 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외교독립의 당위성을 표방하게 되는데...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일, 4월 13일은 이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한 날),

여기 이 곳에서 나라 잃은 정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동년 4월, 윤봉길 선생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 의거로 인해

임시 정부는 일제의 가혹한 핍박에 의해

항주(杭州,1932년), 진강(鎭江,1935년), 장사(長沙,1935년),

광주(廣州,1938년), 류쥬(柳州,1938년),중경(重慶,1940년)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헤매는 정처없는 유랑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1992년까지 중국은 우리의 강력한 적대국이었습니다.

국가의 호칭도 공식적으로 국가가 아닌 중공(중국 공산당)으로 불렀을만큼.

심지어 중국과 밀접했던 북한은 상해 임시정부를 아예 민족의 정통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해방이후 이 곳은 폐허로 방치되고 마는데.

 

1992년 바야흐로 중국을 인정하면서 양국의 국교가 수립되고

비로소 이 곳도 중국의 협조로 복원과 보수를 거쳐 늦게나마 그 흔적을 찾게 되고

2001년 다시 재보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3.1 운동에 의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 북한의 경우 그들의 헌법 서문에 나타난 정통성을 보면,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김일성 동지는 사회주의 조선에 시조이며, 민족의 태양"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까닭에

북한에서는 오로지 김일성 동상만 우러러 받들고 숭상하면 될 일이지만

우리는 정통 민주 헌법을 추구하고 있으니 그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의 임시정부 건물은,

1층에는 시청각실을 두어 항일 투쟁시기의 기록물을 시청하고

2층은 김구 선생의 집무실과 정부 요원들의 부속실로 구성,

3층은 당시의 태극기를 비롯한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물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곳곳엔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감시자까지...

우리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이렇게 불편하긴 처음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솔직히 그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실내에서 안내하는 모든 복무원들은 중국인입니다.

물론 그들의 급여및 지휘도 중국 정부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내부의 해설사도 안내인도 모두 중국인이고 그러다보니 중국의 관점에서 해설을 해줍니다.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 건물인데,

우리의 관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관람을 마치고나면 입장료와는 별도의 기부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낸 금액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사은품을 받습니다.

기부금 만원을 내고 받은 사음품은 젓가락 세트였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낸 그 돈이 어떻게 쓰여질지 그 용처가 불확실해 보입니다.

하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 안될까요?

시도는 해 보았을까요? 

이렇게 의미있는 건물을 국가에서 매입하고

우리가 직접 관리하고 치장하고 우리 것으로 세세손손 후세에 물려줄 수는 없을까요.

 

매입 용도가 애매하다면 상해 영사관의 부속 건물로 매입하여

우리 교육을 받은 사람이 우리의 사관으로 해설을 곁들이면 안되는 것일까요?

 

수년전, 우리나라 외무부에서는 미국 워싱턴에 있었던 초기 대한민국 주미 대사관 건물을

어렵게 찾아내고, 적지않은 금액을 들여 구입하고 

복구와 고증을 거쳐 우리의 자랑스런 흔적으로 다시 살려낸 기억도 있으니,

하물며 우리 나라 항구불변의 정신적 구심점인 임시정부를

남의 손에 맡겨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모금에 엄청남 에너지를 모으는 민족입니다.

터무니 없는 평화의 댐도 모금으로 만들었고

외환 위기도 핏덩어리 아이들의 돌반지를 모아서 이겨냈습니다.

따라서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입니다.

 

우리는 일찌기 그 당시의 독립 유공자들에게 엄청난 결례를 범한 후손입니다.

낯선 대륙을 피와 땀으로 배회하던 임시 정부의 애국자들이

1945년 기치를 높이들고 개선 장군으로 조국에 당당히 돌아 왔건만

정작 그들이 받은 것은 미군정으로부터의 정통성 부정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마저 그들을 온전히 안고 보듬지를 못했으니...

 

우리 정부 유물을 남의 손에 맡겨 남의 사실(史實)과 관점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듣고 본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됩니다.

요즘 모처럼 대륙의 위정자와의 사이도 나쁘지 않은 시절입니다.

빚을 내서라도, 대륙의 옆구리를 간질어서라도

이 곳은 당장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외롭게 목숨 걸고 충절을 다 바쳤던 그 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뻔뻔한 거울 속 내 모습을 위해서.

아울러 우리 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조국에서 살게될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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