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처럼 즐기려 하지말자.
나처럼 떠나서
우리처럼 머물다 가자」
오랜 세월 내 여행길의 길라잡이가 되어주고 있는
내 소중한 길동무의 의미심장한 여행 지침 말이다.
길봇짐을 싸는 순간부터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생활 속의 내가 아닌, 얽매임 속의 내가 아닌
여행속의 내가 될 것이며 자유로움 속의 내가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항상 집을 떠난 길손은 온전한 나와 온전한 우리로 거듭나야하고
매 순간을 우리 식으로 즐기다 가야한다고 친구는 언제나 목젖을 세운다.
아직 채 마무리도 되지않은 올 해,
내가 달린 대문 밖 거리만 해도 벌써 30,000km가 훌쩍 넘었다.
온전한 나와 온전한 우리의 모습으로
집을 떠나서 새털처럼 나부끼며 달려온 의미로운 흔적이다.
그 흔적은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가을 햇살이 밀어부치는 설렘 탓으로
목적지조차 없이 피난처럼 떠나온 남도 여행,
국도와 지방도로만 고집하며 달려온 이 곳은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20,000여개의 사찰 중에서
전통사찰의 범주에 들어있는 절은
933개...
그 중 하나인 곳.
깎아지른 절벽에 둥지처럼 매달린 부처님 당우(堂宇)가 있다는 말만 듣고
내비양에게 물어물어 찾아왔다.
그런데.
개인의 승용차는 못 간단다.
길 눈 서툰 나그네는 위험하단다.
차를 버리고 해발 500m 경삿길을 포복하듯이 기어 오르든지...
그게 마뜩잖다면 여기 이 동네에서
노련과 숙달로 무장된 사찰행 영업용 택시를 이용해야 한단다.
그마저 가납하기 싫다면 아랫동네로 가서 셔틀버스를 이용하든지.
천릿길을 달려온 나그네에게 선택의 폭은 넓지 않다.
객지에서 난제에 빠졌을 때에는 가장 눈앞에 있는 타개책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택시를 이용하기로~
들머리에서부터 개인차량 진입을 막은 것을
현지 택시 기사들의 상술로만 오해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최근에 국가 문화재로 격상이 되고 사찰 진입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도로의 상태가 일반 차량이 넘나들기에는 분명한 무리,
그 경사도 마저 아찔하다.
일반 차량의 진입을 막은 것은 현명한 조치였다.
게다가 도로폭마저 협소하여 차량 두대가 비껴지나는 것도 불가능,
그래서 이렇게 무전기로 서로의 진행 상황을 무시로 교신을 해야만
서로 마주서서 진퇴양난에 빠지는 사고를 막을 수 있단다.
실제로 저 무전기 덕분에
윗쪽에서 내려오던 차량 몇 대가 우리가 타고 올라가는 차량이
일정한 위치에 올 때 까지 대기하고 있었다는.
그런데...
걸어가면 도로가 이마에 닿을 정도의 경삿길을
자전거로 오르는 할아버지 한 분,
경악할 노익장...
역시 나이는 언제 어디서든 생략 가능한 괄호 속에 넣어 써야 해~!
꼬불꼬불 터보 엔진까지 가동해가며 그렇게 오르기를 20여분,
튼튼한 내 두 다리 대신에 더 튼실한 네바퀴를 이용해서
간사하게 오르막을 올라 당도한 곳은
내가 가고자하는 사찰,
사성암을 만나기 전 100m 전.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 정도 거리는 너의 두 발로 걸어서
부처님을 배알 하란다.
우리의 둔중한 무게를 여기까지 실어다 주신 기사님이
마음껏 산과 절을 음미하고 하산의 기척이 있을 때 전화를 달라며 건
건네주신 명함.
혹시 이 산과 절이 마음에 들어 머리를 깎을 요량이라면 전화 안해도 좋으시단다.
어차피 선불로 받은 요금에는 왕복요금이 합산되어 있으니...
가을볕이 아직은 따갑다.
하지만 해발고도를 다소 높인 탓에 귓목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은 더없이 감미롭다.
가을 산사로 가는 길은 이 계절의 마지막 호흡을 토해내는
온갖 수목과 꽃향으로 인해 향기롭기까지.
그 느낌이 참 좋다.
사성암(四聖庵),
하지만 이 건물은 간판만 그렇게 달았을 뿐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이 곳은 일종의 종무소.
사성암(四聖庵),
이름만 듣고는 불교의 기본 깨달음인 4가지의 진리,
사성제(四聖諦)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란다.
여기서 수행을 했던 네분의 고승을 의미하여 만든 사찰명이란다.
즉,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 625~702), 도선(道詵 827~898)국사와 더불어
인근 수선사(현재의 조계산 송광사)에 주석했던
진각(眞覺 1178~1234)대사가 이 곳을 거쳐갔으며
사성암의 사성은 그들을 의미하는 것이란다.
적어도 1,400년의 연륜을 가지고 있다는 말.
사성암은,
신라 진흥왕(백제는 성왕)조(서기 544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생몰연대 불명)에 의해서 창건했다는데...
지리산 주변엔 연기조사와 관련된 사찰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다.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법계사, 천은사 등등...
그런데 최근에 조사된 바로는 이 연기조사 창건설들은 대부분 고쳐야 한단다.
생존 연대와 국적이 불분명한(인도 승려라는 설) 연기조사는
신라 경덕왕(재위742~765)때 만들어진
대방광불 화엄경사경(大方光佛花嚴經寫經-국보 196호)이라는
백지 묵서에 연기조사의 제작 참여 기록에서 발견된다.
현존 세계최고(最古)의 화엄경 사경(寫經)으로 인정받는 이 신라 화엄경사경은
서기 754년에 시작하여 755년에 완성되었다고 자체 사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말은 연기조사가 6세기가 아닌 적어도 8세기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말이다.
결국은 200여년의 시차가 발생되게 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머물렀다고 하는 원효대사(617~687년)와
의상대사(625~702년)와의 연관성도 의문점을 갖게 된다.
창건주가 잘 못 알려졌거나 머물렀던 고승의 명단이 잘 못 되었다는 말이다.
굳이 연기 조사 창건 설이 맞다면,
사성암의 창건 연대 뿐만 아니라,
주변 사찰들의 창건 연대도 8세기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며
더우기 원효와 의상은 창건 되지도 않은 절에서 머물렀다는 묘한 이야기가 되는데...
누군가의 명쾌한 답변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럴 때 현명한 나그네는 머리속에 물음표만 남긴 채
더 이상의 말은 아껴야 한다.
어쨌건,
사성암은 독특하고 수려하다.
평지와 아늑함을 지향하는 일반 사찰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속세와는 숲과 골의 담을 둘러 깨달음(돈오)을 위한 은폐의 안식처를 만들고
흩어지는 정심의 방향을 한 곳으로 모으는(점수) 엄폐를 추구하는 게 산중의 사찰인데
여기는 만천하를 굽어보는 곳에 당당히 우뚝 섰다.
절벽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도려내어 만든 계단길은
그 고풍스러움 덕에 인기 드라마 <추노>에도 선을 보였다고.
여기는 바위가 부처고 담쟁이 덩굴이 불전함이다.
담쟁이 덩굴도 서서히 낙엽이 지고
독실한 유학자이신 퇴계선생의 낯빛(천원권 지폐)도
계절에 맞춰 그 안색이 예사롭지 않다.
세속에 찌들대로 찌든 나그네는
여기서도 불제자들의 불심은 보지 못하고
바위에 붙은 현금의 액수를 계산하고 있다.
...스물 하나..스물 둘...
이 지폐들이 바위틈에 붙어 있지 않고 바닥에 붙어 있었다면...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속세의 미천한 속심을~!
건물 10층 높이다.
사성암의 본존 부처가 계시는 곳은...
아찔할 정도로 현기증을 수반 하는 곳.
세상에서 못 갈 곳이 없고,
안 계신 곳이 없는 부처님이라고 하지만
왜 이 곳 부처님은 하필 여기까지 올라 오셔서
가녀린 나그네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고소 공포증을 안겨주시는지...
후덜덜~
그래도 절묘하다.
가을 하늘 허리를 한토막 툭하고 잘라서 작정하고 이 땅에 둘러친 섬진강과
한여름 공들여 익혀놓은 가을즈음 구례 뜨락의 황금 밥상들...
아무리 절경을 앞에 두고 있지만,
여기는 법당 앞.
뒤에 계시는 부처님 부터 먼저 배알을 하고 볼 일.
우바이(여성신도)한 분이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린다.
법당을 물러나면서도 연신 두 손이 모이고 마냥 쉴 새없이 고개는 숙여진다.
그리고 나즈막히 부른다.
나무 아미타불...나무 관세음보살...
굳이 구분하자면 여기는 약사여래불을 배알하는 전각이다.
아무리 모든 부처가 여럿이 아니고 둘이 아니며,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이 셋이 아니라
결국은 공(空)이며 그래서 하나의 부처라고 말하지만,
정작 본불 앞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어떨지.
부처도 어차피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진대....
김선생 앞에서 남의 이름인 이선생을 목 놓아 부르는 상황이다.
「나모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약사유리광여래불의 약칭으로,
이 세상 모든 중생의 병을 고쳐주고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부처이다.
왼손에는 뚜껑없는 약병이나 뚜껑있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약사여래불은 유리광(琉璃光)세계의 주인 부처이다.
그래서 여기 전각의 이름도 유리광전(琉璃光殿).
오른쪽에는 월광 보살을, 왼쪽에는 일광보살을 협시불로 대동한다.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닿는 모든 세상의 질병을 구제하겠다는 의미이다.
체고(體高) 약 4m의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상으로
광배(光背)가 같이 새겨지고 왼손에 들려진 약병은
본불이 약사여래불임을 말하고 있다.
학자들은 불화의 특색이 고려의 불화를 닮았다고 한다.
음각 그림은 전설로는 원효대사가 불력에 의해 손톱으로 그렸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약사불 신앙은 대체로 8세기 무렵에 성행했다고 하기에
그 말을 믿기에는 약 1세기 정도의 아리송한 시차가 존재한다.
절벽 25m상공에 매달리듯 모둠발로 버티고 선 유리광전,
아무튼 누가 그렸던 어느 독실한 불제자가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매달린 채
약사미래부처를 모신 탓에 후대에 건립된 전각마저
천인단애의 벼랑에 매달리는 운명으로 귀결.
마침내 이렇게 기막힌 이국적 사찰 풍경을 연출했다.
유리보전에서 다른 전각을 올라 가려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전각을 하늘 위에 매달 수는 있어도
이 바위 옆에서 저 바위 너머로 연결할 수는 없었나보다.
수령 800년 성상을 자랑하는 귀목나무(느티나무).
사성암이 자랑하는 그늘목이고 쉼터를 제공하는 은혜로운 나무이다.
귀목나무 할아버지의 그늘을 이고 맞이했던 단 꿈같은 휴식을 내려놓고
돌계단을 잠시 오르면 숨은 그림처럼 수줍게 나타나는 극락전(極樂殿).
무량광불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삿갓같은 산 허리를 버혀내고
골목보다도 더 좁은 마당까지 마련하여 손바닥만한 크기로 극락정토를 마련했다.
여기는 이마저도 어쩌면 사치고 이름대로 대궐<殿>이다.
가을 햇살을 마음껏 받은 산사의 울타리는 차분히 오수에 빠졌다.
나그네는 절로 뒷꿈치를 올리고
행여 아미타불이라도 깨실라 날숨마저 삼키고.
나그네의 발 아래에 깔려 바스락거리는 자갈 소리마저 조심스럽다.
여물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가을 햇살아래에서
주말을 비껴 평일을 선택한 이방인은 사뭇 절간의 침묵에 더욱 숙연해지고.
불신충만 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의 몸은 세상에 두루 퍼져있으니,
보현일체 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부처님은 널리 중생들 앞에 나타나시니,
수연부감 미불주(隨緣赴感靡不周)
인연을 따르고 감동하여 어느 한 곳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이항처차 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그러니 부처님은 언제나 이 곳에 계시나니.
연기조사가 옮겨 적었다는 대방광불화엄경(줄여서 화엄경)의 네 귀절을
극락전의 주련으로 걸었다.
극락전에서
귀목나무 이파리 만큼의 작은 소원 하나를 내려놓고 나오면
이제 마음 껏 소원을 빌어보라는 소원 바위가 나온다.
극락전에서는,
가장 큰 소원인 다음 생애에서의 극락왕생을 빌었으니...
빌고 비는데 익숙하지 않은 나그네는
항상 소원 발복에 서툴다.
온통 소원들이 주렁주렁...
남들의 의견으로 이미 인쇄까지 마친 소원도,
보다 견고하게 나무토막에 새긴 소원도,
소원 입력의 재질에 따라 1천원 짜리 소원도,3천원 짜리 소원도,
때에 따라서는 거금 1만원 짜리 소원도...
취업에, 합격에, 사랑 성취에, 건강회복에, 무병 장수에, 로또에,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에...
그래, 내 소원은...
저 분들이 바라는 모든 소원
다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
바위 틈을 넓혀서 작은 전망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돌담 바로 앞은 끝이 안보이는 수직 절벽...
이럴 수가...
비교적 높은 산이 귀한 전라도 땅에서 이렇게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니.
구례시가, 곡성 평야가, 그리고 섬진강이 한 화면에 모였다.
눈과 가슴에서 절로 소리가 난다.
뻥~!
여기 사성암이 차려진 이 산의 이름은 오산(鰲山)이다.
산세가 거북이 사촌인 자라가 섬진강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하여
그 어려운 한자(漢字)인 자라오(鰲)를 써서 오산이란다.
그래서 사성암의 원래 이름도 오산암이었고.
산아래로 굉장하게 펼쳐진 굉장한 광경에 떨어진 턱을 부여잡고
천인단애의 바위골목을 휘감아 한 허리를 돌아가니 나타나는
오산의 산신령을 모신 산신각.
신(神)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왕(王)으로 모셨다.
그 앞에도 수없는 속세의 소원들이 기와불사로 진열되고.
산왕각 바로 옆에는 자연산 관음보살이 있다는데...
그게 보이지 않으면 불심이 약해서라는데...
찾았어요~
나에겐 불심(佛心)이 있는게
확실해요오~!
한 평 남짓,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정진을 했다는 전설의 도선굴이란다.
하늘이 덮힌 한 평의 바위틈이라도 있으면 수행굴로
가랑잎 이파리만한 하늘 뚫린 평지라도 있다면 당연히 당우(堂宇)로 만들어야 할
좁디 좁은 바위산의 공간 활용법이 낳은 전설일 터...
깜깜한 여기도 촛불이 밝혀지고
마침내 화강암으로 조성된 불전함이 있다.
두어 명이 어깨를 비틀어 서로의 가슴을 내 주어야만 가까스로
비켜갈 수 있는 절벽 위의 잔도(棧道)같은 바위골목,
절벽에다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가을 색을 눈앞까지 나부끼고.
좁디 좁은 길은 이미 사찰 경내를 벗어나서 산길을 지향한다.
갑자기 고도를 높이는 산세는
목책 계단이 그 위세를 대신하고.
그나마 목책의 끝에서 하늘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높이의 끝점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의미.
일단 힘차게 오른다.
예상대로.
그 높이 지향의 길은 멀지 않았다.
급한 경사도의 계단길에서 잠시동안 품을 팔고 난 그 위의 세상에는
온통 아늑하고 편안한
이른바 막걸리 마시기 딱 좋은 곳.
가을 잎은 그늘을 만들어 피부 노화를 막고
잎새로 스며드는 가을 볕은 적당한 조명을 밝히고...
하지만 부처님을 뵈러 온 나그네에게는 아쉽게도
막걸리가 없다.
봄산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는
단풍꽃도 가장 먼저다.
노란 꽃에 노란 단풍,
올 때도 갈 때도 한결같은 노랑,
어쩌면 너를 배울 수는 없겠니?
땀 한 방울 흘릴 겨를도 없이 벌써 정상.
오산은 해발고도 530.8m
인근 매봉, 선바위를 이어 둥주리봉(690m)까지
연계 산행으로 봄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단풍,
그리고 산행내내 지리 천왕을 알현할 수 있는 인기 산행 코스의 하나이다.
정상석은 여기에 어색하게 서 있지만
실제의 정상은 조금 더 가야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이 실제 오산의 최고점.
오산 전망대.
다 보인다.
구례시의 모든 몸체가.
구례의 모든 속살이, 모든 혈관이, 모든 삶터가...
산동면, 용방면, 구례음, 광의면, 마산면, 문척면, 토지면, 간전면이 모두 보인다.
저 멀리 지리산의 웅장함도 보인다.
성삼재가, 노고단이, 반야봉이, 왕시루봉이...
곡성평야를 헤짚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가던 물줄기가
이 오산을 만나 부득이 북으로 물길을 돌려야하는
섬진강의 안타까움도 여기서는 다 보인다.
평야지대의 해발 530m는 결코 낮은 산이 아니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호령하는 호연지기는
단언하건대 수천미터 고봉준령에 버금간다.
사성암 주차장까지 네발 짐승의 힘으로 오른 탓에
등반의 고통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정상에서의 통쾌함마저 박탈 당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 산 오산은
참으로 통쾌한 산이었다.
그렇게 통쾌한 산
정상 조망대에서 도발을 감행했으니...
세상을 모조리 내 발아래에...
예로부터 오산은
좌선대, 우선대, 신선대를 위시한 열 두 바위의 선경(仙景)과
빼어난 주변 풍경, 그리고 사계절을 쉴 새 없이 수놓은 곡성 평야와
지리산의 조망등을 인정하여
전라도의 금강산이라 부르고 그 별명을 소금강이라 불렀다.
<1800년 구례향교 刊, 「봉선지」>
소금강, 오산.
그 소금강이 지금 내 발아래에...
사성암도 오산도 크지 않았다.
사성암도 오산도 크게 유명하지도 않았다.
사성암도 오산도, 그 어떤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오지 않았다.
여행을 즐기는 나도 잘 모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성암도 오산도 아름답고 절묘했다.
여행은 걸어다니면서 읽는 독서라고 했다.
사성암과 오산은 그 어떤 베스트 셀러보다도
더 감동적이었고 재미 있었으며 경이로왔다.
구례 사람들은 이구 동성으로 말한다.
구례에서는 두 번 후회하는 여행이 있다고.
오산을 가지 않으면 후회하고
오산을 한 번 만 가게되면 또 후회 한다고.
오산과 사성암에 모자라는 것은 유명세 뿐.
오산과 사성암,
아무래도 봄 진달래 필 무렵
한 번 더 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