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달려왔다.
지리산이다.
계절이 바뀔 때면 어김없이 나를 유혹하고 마침내 불러 내는 곳,
숲이 있고 계곡이 있고 흙 내음이 있고 마침내 길이 있는 곳,
지리산이다.
이맘때의 지리산은 엄마의 품 보다도 더 포근하다.
이 무렵의 지리산은 잘 차려진 잔칫상보다도 더 푸짐하다.
그래서 숨도 쉬지 않고 새벽길을 한 걸음에 달려 왔다.
지리산이다.
지난 봄에 파김치가 되어 등산화를 벗어둔 그 곳.
지리산 둘레길 14코스의 끝점,
아니, 오늘은 지리산 둘레길 15코스의 시작점.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가탄마을.
지리산 둘레길 15코스다.
지리산 둘레길 15코스는,
화개면 탑리 가탄마을-0.7km-법하마을-1.4km-작은재-2.1km-기촌마을-3.7km-
목아재-3.4km-송정마을을 잇는 총길이 11.3km의 고약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저질 체력 기준으로 7시간.
하지만 평소 체력을 단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5시간은 족히 걸리는
난이도 "상" 코스이다.
그리고 그동안 이어져 오던 경상도를 벗어나
전라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기도.
가탄리(加灘里).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와서 신선이 내려와 낚싯대를 드리웠다는 개울,
그 신선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 학자로,
이황,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5현(賢)으로 추앙받는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선생을 이른다.
그는 무오사화로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사사(賜死)당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갑자사화로 다시 끔찍한 부관참시(部棺斬屍)까지 당한다.
여기 하동 태생이지만
현재 그를 기리는 서원인 남계서원(濫溪書院)과
그와 관련된 일두고택은 함양에 있다.
어느덧 15코스의 시작 포인트가 되어버린 길가슈퍼.
길가에 있는 구멍가게 이름이 길(吉)하고 아름다운<佳> 가게로 화려한 변신,
하긴 여기는 대학자가 머문 자리이니
가게 이름 하나에도 교양이 묻어난다.
화개천을 가로지르는 가탄교.
화개천은 개울임에도 불구하고 한 때 화개동천(花開洞天)이라고 불렀단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무는 곳을 말한다고 하니
예로부터 그 경관의 수려함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항상 그렇듯 시작은 씩씩하다.
아스팔트 위를 걸어도 콧노래가 절로다.
앞으로 닥쳐올 고난의 행군은 아예 무시한지 오래다.
앞으로~♪ 앞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둘레길 이정표가 이렇게 무겁고 엄숙할 필요가 없다.
보다 많은 이정표를, 보다 험준한 곳까지, 보다 손쉽게 설치하려면
이정표는 보다 간소하게, 저렴하게,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제주 올레 이정표는 정말 효율적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 무렵의 지리산 둘레길 15코스는 밤이 지천일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지,
밤송이 하나가 미리 아스팔트 도로 위까지 마중을 나왔다.
아예 도로 한 편을 밤으로 채웠다.
여기는 법하(法下)마을,
예로부터 주변에 많은 사찰들이 있어서 사하촌(寺下村), 법가촌(法家村)등으로 불리다가
부처님의 설법 아래에 있다하여 법하(法下)마을이 되었다.
그 길을 걸으면 청춘 남녀의 사랑을 완성시켜준다는 혼례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오른 십리 벚꽃길인
1023번 도로를 지나고.
주변의 가을 풍경과 여유로운 눈길도 주고받는다.
대추도 가을 다이어트에 돌입하여 체중을 줄이고 있는 중.
계속되는 오르막에 솜사탕같이 가소로운 체력을 실감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술꾼들에게는 최고의 명약,
간 질환 환자에게는 기사회생의 구세주,
숙취해소의 특효약이라는 헛개나무 열매도 익을 준비를 마치고.
아무도 털지 않았는데, 아무도 지키지 않아서인지,
은행이 털렸다.
제 풀에 지쳐 떨어진 은행들이 곱지 않은 체향을 뿜어
나그네들 후각을 괴롭힌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마저도 가을 향기로 느껴진다.
가파른 오르막 길을 만나면 무조건 최저 속도로...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다보니 남의 담장 안 풍경도 시야에 들어온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콩 종류 발견,
작두콩이다,
비염 축농증 등의 모든 코 질환에는 특효라는 슈퍼 콩.
이름처럼 작두를 닮았다.
잎도 열매도 같이 익어간다.
열매는 익어서 사람들의 입으로 가고
잎은 역할을 마치고 땅으로 가서 내년의 거름으로 다시 돌아가고.
해마다 가을이면 실감하는 일이지만
그들의 어김없는 순환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새들이 먹고 남긴 이 가을의 농익은 과실들.
맛있는 과일은 인간보다 새와 곤충이 먼저 알아본다.
그런 면에서 전혀 고등적이지 못한 인간들은
그들이 먹고 남긴 것 만으로도 황송하게 한 입~!
며느리는 내 보내도 딸은 내 보내기 싫다는 따가운 가을 볕,
며느리도 딸도 내 보내기가 아까워서 직접 고개를 숙이신 할머니,
할머니의 휜 세월 위로 가을 햇살이 부서진다.
할머니는 그렇게 부서진 따가운 햇살을 긴 세월 주워모아
올 겨울,
대처에 나간 딸 며느리의 식탁 위에 따끈한 고구마를 올려주실 것이다.
할머니의 흰 머리 같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누군가가 말했다.
이 즈음의 지리산 둘레길 15코스는 유혹의 길이 될 것이라고.
길 바닥 위의 욕심을 애시당초 버리라고,
초록과 단풍이 한 이불을 덮고 고즈넉히 누웠다.
아스팔트를 벗어버린 지리 속살은 더 없이 부드럽고 소복하다.
하늘은 쳐다 보기조차 두렵다.
시선만 닿아도 푸른 물결이 쏟아져내려 세상을 덮을 것만 같아서...
바다 건너온 사철채송화(송엽국)도 버젓이 지리산에 앉았다.
그래, 세상의 어느 산이 나그네를 내 쫓더냐,
너도 어차피 고향 떠나 외로운 몸 우리랑 더불어 살자꾸나.
지리산은 예로부터 다향(茶香)이 각별한 산이다.
철부지 차나무는
동으로 드리운 한 가지에는 열매를 달고
남녘으로 뻗은 가지 끝에는 함초롬히 꽃을 매달았다.
이럴 때 넋 나간 나그네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이냐.
여름 내내 튼실하게 꽃떨기를 드리운 주홍서나물도
일찌기 제 할 일을 다하고 이젠 길 떠날 채비마저 마쳤다.
이 녀석도 일찌기 태평양을 건너온 이주민 야생화였지...
어느 하늘을 날아 어느 땅에다 새로운 뿌리를 내릴지,
그래서 내년 봄에 또 다른 모습으로 새 꽃을 피울 수나 있을지...
초피나무도 열매를 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녀석이다.
조피, 제피, 젠피, 심지어 황당하게도 산초라고도 부른다.
우리 한국에서,
주로 추어탕에 넣어 먹는 초피(椒皮)는
기름을 짜 먹는 산초(山椒)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산초는 향신조미료로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초피를 두고 산초가루라고 혼동하여 부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사람 탓이다.
일본에서는 우리와 달리 초피를 산초(山椒)라고 부른다.
일본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인 시치미<七味>의 주재료가
우리말로는 초피인데, 일본말로는 산쇼(산초)라고 부르기 때문.
참고로 중국 사천 요리에 많이 들어가는
화자오(花椒)도 우리의 초피와 같은 종류의 향신료이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지리산에서 채집한 초피를
최상급의 산초로 대우한다.
온통 곁눈질로, 게걸음으로 우왕좌왕 걷다보니
거북이 걸음도 어느덧 고개를 넘는다.
더불어 급격히 불어나는 지구 중력의 체감과 체중의 과부하,
이럴 때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
이 길의 끝에서 시간 맞춰 나를 기다리는 어떠한 사람도 없기에...
때 맞춰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작은재,
스틱의 오른 쪽은 전라도 방향 왼쪽은 경상도 가는 길.
그 옛날 경상도 하동에서 전라도 구례로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남부여대로 넘나들던 민초들의 길,
그렇게 전라도와 경상도를 구분했던 분기점이 여기다.
전라도로 진입한지 불과 1분도 안 되어 만난 휴식터.
주구장창 오르막으로 구성된 경상도 길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던 고마움이다.
나도 경상도 보리 문둥이이지만 이런 것은 제발 좀 배우자~
어쨌건
떡 본 김에 아니 의자 본 김에
여기에서 곰삭은 육신을 쭈욱 펼치기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청명한 10월의 심산유곡에 차려진 우리의 진수 성찬이...
있을 건 다 있고,
없는 건 애시당초 필요하지 않은 것들...
단백질이 부족할까봐
한 줄의 김밥은 특별히 치즈 김밥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참기름과 참치살로 버무린 수제 쌈된장까지...
지리산 중턱에서 베어먹는 아삭이 풋고추의 맛은 또 어떻고.
아삭~!
그리고 한 잔의 막걸리~!
캬아~ 바로 바로 이 맛이야~!
친구의 뒷 배낭에 들어있던 꽤 많은 질량을 나의 뱃속으로 옮겨 담은 후,
친구의 발걸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날고.
날개도 없이...
또 있다.
또 쉬라고.
그래서 또 쉬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너무 배가 불러서...
전라도 의자 인심
느으무 조아부러~
작은재를 넘어 기촌 마을로 가는 길은 온통 밤밭이다.
하늘 가에도 머리맡에도 발 끝에도 보이고 걸리는 게 지천으로 밤이다.
모두들 예외 없이 알알이 속이 꽉 찬...
토실토실 밤토실 주워서 올 테야~♪
그건 아이들 노래에서나 듣고 흘려야 한다.
탐이 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줍고 싶지 않다면 나그네가 아니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뼈를 깎는 인내심으로 참았다.
내 평생 그렇게 참아 보기도 처음이다.
내가 생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건 야생 동물에게 양보하세요~!
친구의 추상같은 명령탓에
잠시 내 손바닥 위에 머문 인증 샷만 남기고 그들은 조용히 땅으로 되돌아 갔다.
밤, 밤, 밤, 낮에도 밤, 밤에도 밤...
Bam Bam Bam~♬
밤, 밤, 밤
길섶은 밤들의 잔해 투성이다.
역시 지리산 둘레길 15코스는 밤을 빼고는 설명이 안된다.
밤밭 주인니임,용서해 주세요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석고대죄를 하는 마음으로
송이를 이탈한 한 녀석을 살 떨리는 심정으로 주워서 애교를 섞었다.
이토록 알찬 이 가을의 여묾을
도저히 그냥 보고만 갈 수가 없어서.
멀리 보인다.
반의 하늘 색과 절반의 가을 색을 담고 있는 섬진강.
옛 터를 버리고 물러난 원주민들의 자리에 새로이 들어서고 있는 외래 문물인 팬션마을,
은어마을이 섬진강을 훑어보고 있다.
가을 지리에 혼줄을 빼앗기고
토실 밤에 정신줄을 놓은 나그네는 내리막 길도 후덜거린다.
이 모든게 벌건 대낮에 먹은 막걸리 탓일까?
기촌 마을에 당도했다.
기촌마을의 젖줄인 외곡천은 지리 단풍의 절경인 피아골을 휘감고 내려온다.
머지 않아 이 외곡천에도 피같은 붉음이 넘실대겠지.
연곡사의 단풍도 많이 아름다울 텐데...
지리에는 철마다 갈 곳이 너무나 많다.
이래 저래 나그네는 신발 벗을 틈이 없다.
내 탓이 아니다.
이 땅이 너무 아름다운 탓이다.
지리의 그림자는 길고 지리의 골은 더 길지만
지리의 해는 노루 꼬리보다도 더 짧다.
15코스의 두번 째 고개인 목아재를 넘어선 가을 해는 벌써 꼬리를 내리고 있다.
가을산에서 바라보는 심산의 나그네는 이럴 때 바빠진다.
산 속에서 어둠을 맞이한다는 것은 상상마저 불허한다.
서둘러야 한다.
중간에 많이 노닥거린 만큼.
댓가를 치러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지리산 산삼 썩은 물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지.
가을 하늘만큼 청량한 계곡수에 찌들대로 찌든 발 한 번 담그고.
앗!
차거 차거 차거~
으앙!
시려 시려 시려~
그 영상은 환경 단체의 밀물같은 저항이 예상 되는 탓에
생~략!
고기 타는 내음이 진동하던 발바닥도 식히고
뒤틀릴 것 같이 아려오던 종아리도 추스리고나니 어느덧 15코스의 마무릿점.
해도 지고
배도 고프고
찾아 오는 이도 없고
때는 바야흐로 가을 저녁 어스럼.
나는 생면부지의 이곳에 서있다.
지난 번 14코스 때 그랬던 것처럼 역시 파김치로 끝났다.
이름 그대로 완전 방전이다.
친구야 나 좀 메고 가줄래?
가서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이라도 좀 구워줄래?
앉을 힘도 없다.
말할 힘도 없다.
에고~ 힘들어!
내가 뭐하러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계절이 바뀐 어느 날.
나는 다시 이 곳에 서있을 것임이 틀림 없다.
지리산 둘레길 15코스의 끝점이 아니라
16코스의 시작점이라는
전혀 새로운 이름을 장착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