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 이따금씩 말에서 내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타고 간다.
혹시 너무 빨리 달려 나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했을까봐 잠시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두 발로 온전히 걸으며 여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차를 타고 다니며 여행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면 나는 파란 신호등 앞에서도 브레이크를 밟곤 한다.
그저 이정표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이 발동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논짓물이었다.
제주의 지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논짓물 또한 제주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들만의 암호 같은 지명이다.
논짓물은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에 형성되어 있는
거대한 풀장 같은 곳이다.
현무암으로 구성된 제주도는 비가 내리면 땅으로 다 스며드는데,
그 스며든 물이 다시 땅위로 샘솟는 것을 용천이라고 한다.
제주도에는 약 1000개 가량의 용천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서귀포시 하예동에 있는 바닷가 쪽에 솟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곳에 생성된 논짓물!
논짓물은 '논에서 나는 물'을 의미하는데,
용천수로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 그 이름에 남아있는 듯 하다.
바다로 용출하는 물이 저 앞에 있는 돌에 막혀 자연스럽게 고이면서
옛부터 마을 사람들이 천연 물놀이장으로 삼았던 곳이라는데...
여름이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할텐데,
겨울이라 한적한 모습이다.
그런데...
뒤로 돌아가보니 <여탕>이라고 적혀 있는 게 보인다.
뭐지 뭐지?
하며 돌아 들어가봤더니...
끊임없이 물이 샘솟고 있는 작은 탕이 보인다.
설마 이곳에서 묙욕을?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남탕도 보인다.
남.탕. 두글자에 괜히 두근두근...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남자들은 어릴 때 엄마 따라 목욕탕을 가니
여탕을 가봤겠지만,
여자들은 아빠 따라 남탕에 갈 일이 전혀 없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있어 남탕은 영원한 미답지.
그래서 아무도 없을 줄 알면서도
그 남.탕. 이라는 두 글자에 가슴이 뛰는지도.
혹시 몰라서,
"안에 누구 계세요?" 불러보니,
답이 없다.
그래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빼꼼 들여다본 곳.
역시...
이 계절 누가 홀랑 벗고 목욕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남탕을 보고 든 첫 느낌!
"뭐야~ 여탕보다 더 넓잖아~!!"
그렇게 나의 남탕 첫 체험은 다소 허무(?)하게 끝났다.
이 곳 논짓물은
제주 올레길 8코스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설레는 리본.
세상에서 가장 가슴 설레게 하는 화살표!
올레길을 안내하는 그 표시들이 보이면
굳이 올레길을 걷고 있는 중이 아니어도
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것들을 잠시 응시해본다.
내가 가는 인생길에도 이런 친절한 이정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인근에 있는 마을 벽에 무서운 경고문이 걸려 있다.
개조심!!
어휴~ 도대체 어떤 개길래?
하고 주위를 돌아봤더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설마...너였니?
꼬리치고 있는 녀석...
작고 앙증맞아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긴 한데,
꼬리 치면서 물 수 있다니,
한발 물러나는 걸로...
잠시 차를 세우고 돌아본 논짓물.
그 부근에는 한참 빌라촌이 만들어지고 있다.
경치 좋은 곳은 예외없이 그곳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누리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니,
이 맑고 깨끗한 논짓물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까, 슬며시 걱정이.
차를 세우고 꽤 오래 있었다.
너무 빨리 달려 따라오지 못했을 나의 영혼이 쫓아온 듯 하니,
또다시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