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빠랑 술 한 잔 할래?"
"좋지요~"
설날이라고 온 가족이 모였다가 오빠네가 떠나고 난 밤,
아빠는 허한 기분을 술로 달래고 싶어하셨고,
전 흔쾌히 아빠의 술친구가 되어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빠는 선물로 받은 복분자주를 들고 나오십니다.
명절 치르느라 몸살 나 누워계셨던 엄마는
그 와중에도 일어나셔서 안주상을 봐주시는데요.
달짝지근하게 맛있는 복분자주는 술술 잘도 넘어가고
차례상에 올랐던 전이랑 엄마가 맛있게 양념하신 더덕무침은
이 밤, 환상의 안주들입니다.
더 맛있는 안주는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는데요.
"아빠, 그게 어디였죠? 어떤 마을에 쓰레기 소각하는 데 옆에 서있다가 가스통이 터져
저 앞머리랑 눈썹, 홀라당 탔었잖아요. 하하하~"
아버지는 당연히 기억하십니다. 지금은 웃으며 떠올리지만 그 땐 정말 아찔했었다시며...
"제가 7살 때였나요? 눈내린 가야산에 오르는데 길은 미끄럽고 옆으론 절벽이라 무서워서
저 엉엉 울었던거 기억나세요. 그 때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고소공포증이 있어
등산할 때 절벽 지나갈 때는 다리가 안 떨어져 울잖아요~ 하하하~"
아빠도 기억나신다며 웃으십니다.
내겐 아직도 생생한 그 낭떠러지길이 아빠는 그리 위험한 길도 아니었다고 반박하시며...
"어릴 때 지리산으로 피서갔을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계곡물이 불어났는데
그 때 아빠가 저를 안고 허리까지 오는 계곡물 속으로 들어가 거세진 계곡물을 가로질러 건너셨잖아요.
그 때 난 아빠한테 안겨 있으면 무조건 안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아빠도 저를 안고 그 계곡을 건널 때 불안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땐 전쟁이 나도 아빠 품에만 안겨있으면 안전할 것 같았답니다.
내겐 절대적인 안전지대로 느껴지는 곳이 아빠 품이었으니까요. 하하하~"
저는 신나서 얘기했는데, 어느 순간 아빠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계셨습니다.
제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그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에 울컥 하신듯 했습니다.
저는 애써 모른 척 하며 "아빠랑 같이 마시니 술이 더 맛있네요." 하며 한 잔 들이켰는데,
마음으로 전한 이 말이 아버지께 꼭 전달되었길 바랍니다.
'이제는 제가 아빠의 울타리가 되어드릴 차례잖아요.
아버지는 여전히 그 존재만으로도 제겐 든든한 울타리랍니다.
부디 오래오래 제 곁에 계셔 주세요.'
명절에 아버지 곁에와서 이렇게 함께 술잔을 나눌 일이 제겐 얼마나 더 허락될까요...
그 생각에 이번엔 제가 울컥...
하지만 그 순간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