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타고 떠난 꽃한송이

죽음의 5단계를 겪은 후 만나게 되는 것? 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

작성일 작성자 김작가



어릴 때, 우리집엔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아마도 엄마친구가 출판사에 계셨던 것 같은데,

샀다 하면 전집으로 들여놓는 바람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압박이 은근히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폭풍의 언덕,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죄와벌, 노인과바다...

하지만 그 책들은 20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의 나는 그런 고전들을 이해할만큼의 소화력을 갖추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때 그 책들은 번역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특히 러시아 문학 같은 경우는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이중번역의 과정을 거쳤던 때라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나의 교양 부족과 얄궂은 번역 때문에 고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시 고전 붐이 일어 고전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한달에 한번 있는 독서토론모임 <북세통>의 8월 선정도서가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으로 정해지면서

그동안 멀리 했었던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러시아 문학이라고 해서 그렇게 난해한 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100년 전에 사망한 톨스토이가 글을 새로 썼을리는 없고,

확실히 번역이 매끄러워서 그런가?

아님 나의 교양이 이제 이런 고전을 소화할만큼의 수준이 된 것일까?



이 책의 첫장은 이반일리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다.

이 죽음이 가져올 자신과 지인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관한 생각을 하거나 

"죽은 건 내가 아닌 바로 그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갖거나.


그 때까지만해도 이반일리치라는 인물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고 산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장부터 펼쳐지는 이반일리치의 삶을 엿보면 그의 삶은 매우 평범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평범했던 삶이 과연 정상적이고 가치 있는 삶이었을까라고 물음표를 찍으면

'그렇다'라고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 것 같다.


당장 결혼만 놓고 봐도

이반일리치에게 결혼은 적당한 여성을 아내로 맞아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서 결혼이 복잡하고 힘겨운 것이라는 걸 깨닫고

결혼생활을 따뜻한 식사와 집안 관리, 잠자리만 요구하는 걸로 결정한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가정의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사교 생활도 즐기는 데서 기쁨을 느꼈는데, 

공적 업무에서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 생활에서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는 표현이 참 절묘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날 고통이 찾아오는데, 

옆구리에 묵직한 통증이 찾아오면서 화목하고, 경쾌하고, 품위있는 삶이 망가진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5가지의 단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이 책의 주인공 이반일리치도 어쩌면 이 죽음의 5단계를 고스란히 밟아가는 것 같다. 


카이사르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었고, 그러니 죽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 이반일리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음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다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아픔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냐며 분노한다.

자신이 누워 있는 상황에서 문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 이반일리치는 생각한다.

"저들도 언젠간 죽을 거야!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저들은 나중에 가는 것일 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야!

그런데도 마냥 즐거워하는구나! 저 짐승들!!"

그렇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미움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원하는 타협의 단계를 넘어서면

사람들의 위로가 오히려 이반일리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단계에 이른다.

모두들 이반 일리치에게 병이 들었을 뿐 죽는 것은 아니라며

안정을 취하고 치료 받으면 훨씬 좋아질 거라는 위로를 하는 걸

당사자인 이반 일리치는 거짓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가 바라는만큼 아파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몹시도 괴로웠다. 


마지막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영혼의 목소리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지독한 외로움이 서러워서

그는 한참을 울게 된다.

'대체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왜 저를 이렇게까지 만든 겁니까?

왜 대체 저를 이렇게 끔직이도 괴롭히는 겁니까?'


그 때 들려오는 영혼의 목소리.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가 처음으로 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명한 개념의 질문이 던져진다.

이반일리치는 대답한다.

'고통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다시 영혼의 목소리는 묻는다.

"사는 거라고? 어떻게 말이냐?"

"예전처럼 사는 것,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

영혼의 목소리는 다시 묻는다.

"예전에 네가 어떻게 살았지? 건강하고 즐겁게 살았던가?"

그 때 이반일리치는 이상하게도 예전 즐거웠던 모든 순간이

이제 와서는 그 때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걸 경험한다.

그 시절에는 기쁨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눈앞에서 녹아버리면서

보잘 것 없고 추악하기까지 한 뭔가로 변해버렸다.

활기라곤 없던 공직생활과 돈에 대한 걱정,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만큼 발밑에서는 삶이 멀어져갔던 것.

이제 남은 건 죽음 뿐이었다.


이반일리치는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의문에 봉착한다.

마땅히 해야할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

그러다가 내 삶이 정말로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결국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죽기 전에 올바른 것을 하고자 마음 먹는데,

그 올바른 것은 그가 눈을 감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난다.

아들이 그의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린 것.

그 때 이반일리치는 한줄기 빛을 보았다.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아들 뿐 아니라

그 동안 자신이 증오했던 아내와 딸마저도 측은하게 느껴진다.

결국 그를 통증으로 해방시켜 준 것은 

진정으로 그를 위해 흘려주는 눈물이었을까? 

그 순간 통증은 사라지고 마지막 죽는 순간 이반일리치는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렇게 마무리되는 <이번일리치의 죽음>!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죽음이다. 

살아가기도 급급해 죽음까지는 생각해보기 힘든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죽음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며 당장 나의 이야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접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이반일리치처럼

나 또한 그저 내 삶을 평범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 또한 당장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내 삶을 돌아보며 어떤 후회를 하며 부끄러워하고 어떤 미련에 안타까워할지...

그저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한 남자의 시선과 생각을 짧게 접했을 뿐인데,

그 여운은 책을 읽은 시간보다 오래 남았다.

책을 덮으면 금세 잊혀지는 요즘의 책과는 확실히 다른 고전이 갖고 있는 힘인 것 같다.


토론 중에 언급되었던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

<안나카레리나>를 비롯해 <전쟁과 평화> <부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많은 땅이 인간에게는 필요한가?> 도 이번 기회에 읽어 보고 싶어졌다. 


다음 달 토론도서는 최인훈의 <광장>!

학창시절에 그렇게 많이 언급되었던 책임에도 아직까지 안 읽은 책 목록에 있음이 부끄러웠는데,

드디어 다음 달엔 마음의 빚을 청산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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