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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 : 1 - 10 ; 시편 119 : 71 2018년 1월 8일 주일예배

작성일 작성자 V-maker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2018년 1월 8일 주일예배
                             고린도후서 12 : 1 - 10  ;  시편 119 : 71


어느 날 농부가 호박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연약한 줄기에 이렇게 무거운 호박을 달아주시고, 왜 튼튼한 참나무에는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달아주셨을까?" 며칠 뒤 농부가 참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는데 도토리가 이마에 떨어져 잠을 깼습니다. 그 순간 농부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휴, 호박이면 어쩔 뻔했을까?"


세상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힘의 대결의 장으로, 힘센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기에, 오직 이 힘만이 정의라는 냉철한 힘의 철학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모택동은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고 했고,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태초에 힘(권력)이 있었다"며, 세상은 힘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말컴 머거리치는 "이런 힘을 추구하는 철학이야말로 현대 정신사의 타락의 징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겉으로 보기엔 약한 자가 먹히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이론대로라면 약한 동물은 모두 사라지고 강한 동물만 남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사자와 양을 보아도, 양은 완전히 사자의 먹인데 사자는 거의 멸종됐고 양은 더욱 번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맹수들은 거의 멸종되어 사람들이 보호하지 않으면 맹수들은 아예 없어지고 말 것 같습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지하교회지도자 윈 형제의 [하늘에 속한 사람] 책에서 폴 해써웨이는 말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약한 사람들이다."


일본의 '미즈노 겐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로 심한 고열에 뇌성소아마비에 걸려, 보고 듣는 기능, 깨닫는 기능과 내장기능 외엔 모두 마비되어 손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평생 누워지내야 했습니다. 그가 불구된지 5년쯤 됐을 때 미야오 목사님이 찾아와 복음을 전하여 성경을 읽으며 믿음이 생겨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질병의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세 번 고쳐달라고 간구하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응답에 불치의 병에도 주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족한 줄 깨달았고, 이런 시를 씁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그는 일본어 '아이우에오' 50글자를 시력검사표처럼 걸어놓고 어머니가 한 자씩 막대기로 짚으면 그가 의도한 글자에 눈을 깜빡거림으로 시를 써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NHK방송에 특집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강하기를 소원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일본 크리스천 작가 엔도 슈샤꾸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갈릴리에서 자라나 예루살렘 성 밖에서 살해된, 마르고 수족이 가는 사나이, 개같이 살해되면서도 숨을 거둘 때까지도 오로지 사랑만으로 산 사나이. 그는 생전의 현실 속에서 무력했으며, 다만 사랑만을 말하고, 사랑만을 살고, 사랑의 하나님을 증명했을 뿐이다. 왜 이토록 무력하게 됐던 사나이가 사람들로부터 망각되지 않았는가? 왜 그토록 개같이 살해된 사나이가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 그들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어놓았던가? 이 예수의 신비성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해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무력성이 승리의 비결이었고, 그리스도는 그 약함으로 세상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고통의 문제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 생을 위탁하여 온 운명을 하나님 앞에 바쳐 하나님께 헌신한 충실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적어도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복을 베풀어주셔야 합당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부귀는 없다하더라도 건강은 주셔야할 것 같은데 그에게 이 건강이 없었습니다. 가정도 없이 오직 주님만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에게 최소한 명예는 주셔야할 것 같은데, 그에겐 이 명예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가정이 없었고, 건강도 없었고, 칭찬 대신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고, 동역자들의 오해와 동족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그에겐 특별히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육체에 가시'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안질'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강한 빛을 본 일로 인해 눈이 멀었었는데, 아나니아의 안수로 낫기는 했지만, 그 후로도 안질로 고생하여 편지도 구술하여 다른 사람이 대필하고는 끝에 가서 문안인사만 친필로 쓴 것을 보면, 아마도 안질로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말라리아 같은 '열병'이나, 혹은 견디기 어려운 '두통'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더 나아가서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간질'로 보는 견해까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4:14)고 말했는데, 여기 '시험하는 것'을 간질로 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눈이 좀 나쁘거나 열병이나 두통이 좀 있다고 해서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순 없으나, 만일 간질이라면 이것은 교인들에게 시험이 됐을 것입니다. 정말 바울이 간질에 걸렸다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라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었기에, 이것이 그의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도 말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이런 약함으로 힘들 때, 신앙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 고통을 제거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로 고통스러울 때, 이 가시가 없어지길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12:8). 우리 주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며 그 고난이 옮겨지도록 세 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라며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로 다루지 못할 고난은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고통의 가시가 찾아올 때, 우리는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일생동안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는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바로 그 연약함이 주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가 됩니다. 찬송을 받으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는 자기의 힘을 나타내시려고 더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들의 궁핍이 크면 클수록, 그가 친히 우리의 친구이심을 믿을 수 있는 더 큰 근거를 우리는 갖게됩니다. 이것은 70여 년 살아온 나 자신의 체험입니다. 시험이 크면 클수록 난관이 크면 클수록, 주님의 도우심은 더 가까이 나타납니다. 때로 나는 완전히 어쩔 수 없는 막다른골목에 든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많은 기도, 더 깊은 신앙, 더 많은 인내와 실천이 그 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할 일은 우리들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은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시간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아뢰면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고쳐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주님께 아뢰면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첫 번째,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그 고통을 제거해주십니다. 주님은 병자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저들의 병을 고쳐 저들의 소원을 만족케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통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통해 우리의 고통을 제거해 주십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4-15).


직장에서 현장 책임자로 일하다가 담벼락이 무너지는 바람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자리에 눕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직장에 나가지 못하여 생계를 부양할 수 없는데다가 계속 집에서만 지내다보니 합병증이 생겨 급성 폐결핵까지 걸렸습니다. 몸은 점점 꼬챙이처럼 말라서 40Kg이 되었고, 입에서는 피가 넘어와 그대로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장모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보게, 자네도 예수를 믿어야 병 고침 받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네"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아무 것도 모르는데 웬 눈물이 쏟아지는지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서 실컷 울고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가서 울고, 또 가서 울고 하며, 삼 주일이 지났는데, 하루는 친구가 와서 그의 혈색이 좋아졌다며 다시 검진 받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재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깜짝 놀라며 "당신 몸에는 폐결핵 균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은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건강을 되찾고, 건강진단서를 직장에 제출하여 다시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울기만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가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가시를 제거해 주십니다.


두 번째, 그 고통은 그대로 두시지만 이 고통을 통해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중국의 유명한 부흥사요, 저술가인 워치만 리는 20대에 중한 병을 얻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죽음을 앞에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런 환상이 보였습니다.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난데없이 큰 바위에 부딪혔습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 답답해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위를 치워주랴, 물이 불어나 물위로 배가 지나가게 하랴?' 물으십니다. 워치만 리는 바위는 그대로 두고 물이 불어나 그 위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지나갔답니다. 이 환상을 본 다음, 그는 큰 은혜를 받아서 평생토록 귀한 일을 하는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치워달라고만 기도하는데,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만 높아지면 어떤 문제도 능히 넘어설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미국에 에디 폴라드라는 아주 똑똑한 여인이 학교를 졸업하고 보스턴에서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뇨에 걸려 병을 앓았습니다. 교회엔 나갔지만 신앙에 확신이 없는 휴머니스트에 불과했는데 몸이 아프니까 그 때문에 기도하면서 이로 인해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빨리 낫지 않습니다. 낫는 것 같다 또 아프고 또 아프고, 하여 "하나님 어째서 끊임없는 질병 가운데 인생을 보내야합니까? 하나님 혹시 제게 다른 계획이 있지 않습니까?"하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마음속에 어떤 감동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교수직을 내놓고 선교사로 헌신합니다. "하나님 제가 아픈 모습이라도 좀 제대로 신앙생활 하다가 죽을게요." 헌신하던 그 밤에 마음속에 감동이 임하여 붓을 들어서 찬송가 하나를 작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 425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나를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 그런데 기도해도 고통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12:8b). 바울은 자기의 육체의 가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을 제거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기도했고, 그래도 응답이 없자,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세 차례를 기도하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가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도 고난이 옮겨지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그대로 남겨두시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다른 말로 '나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이 고난의 가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이 많았습니다.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란 말씀대로, 바울은 신비한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이 체험이 얼마나 신비로웠던지 자기가 몸 안에 있었던지 아니면 몸밖에 있었는지 모를 만큼 신비했습니다.


신비한 체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분명한 도움이 되지만, 그런 신비체험은 영적으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나는 보통 교인들이 모르는 신비로운 세계와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계시로 체험했고, 하나님의 세계를 아는 영빨이 대단한 사람이다'며, 영적 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도하면서 '아! 이래서 하나님이 내게 이 고통을 허용하셨구나, 내가 건강까지 하면 교만해질까봐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은 건강한 삶보다도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한번 설교를 하다가 도중에 말을 더듬었고, 어찌 허둥대었던지 이 설교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니 형편없는 나의 설교를 축복하여 주소서." 그리고 그 주간 내내 한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엔 깜짝 놀랄 설교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주일 설교는 정말 성공적이어서,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은 침이 마르도록 그의 설교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흐뭇했는데, 그 날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설교는 마흔 한 명의 회심자를 냈는데, 그렇게 칭찬 받은 설교는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지 않았는가?' 스펄전은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도움 없이 우린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셋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으면 그 뜻을 기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묻자 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족하도다'는 헬라어 '아르케이'는 '충분히 필요를 채우고 있으며 그것은 영속적이다'는 뜻으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바울에게 충분한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로 고생했지만 이것도 주님이 베푸신 충분한 은혜란 말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뻐했던 충분한 은혜는 무엇입니까? 첫째,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하나님께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했을 것이지만, 그는 고통 중에 더욱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람이 평상시에는 그냥 타성에 젖어서 형식적인 기도를 드리기 쉬우나 깊은 고난 속에서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게 되고, 보다 간절하고 보다 진실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 고난을 통해 겸손하게 하신 은혜를 깨닫고 기뻐했습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고, 겸손해야 은혜를 감당하고, 겸손해야 은혜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백만 원 벌 땐 겸손했는데, 천만 원 벌게 되니 교만해졌다면 이 사람은 천만 원을 벌어선 안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겸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어야 겸손하게 됩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열심이 있었고, 헬라철학과, 로마법률에 대해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이 있었고, 당대 최고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위험을 느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칫 교만하여 실족할 뻔했으나, 육체의 가시로 인해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그는 연약할 때 도리어 강하게 하시는 은혜를 깨닫고 기뻐합니다. 자신의 약함으로 주님을 의지하여, 무릎꿇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덧입고, 그럴 때 주님의 더 크신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W.A. 크리스웰이 말했습니다. "가장 잘 무릎 꿇는 이가 가장 훌륭히 서는 자요, 가장 연약하게 무릎 꿇는 이가 가장 강하게 서는 자이며, 가장 오래 무릎 꿇는 이가 가장 오래 서는 자이다"


글래디스 아일월드는 1902년 영국의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14세 때부터 어느 부잣집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공급받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녀로 불리는 가정부 일은 할 일은 많고 임금은 적었으며, 단조로운 생활 가운데 유일한 소일거리는 공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20세가 되어서 교회에 나가 주님을 영접한 후에 공상 아닌 해외 선교사가 되어서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선교사가 되기에 자질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어서 책으로 공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중국 내지 선교회에 지원했으나 탈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하고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고, 침낭, 옷가방 두 개, 냄비와 곤로, 프라이팬을 들고 중국에 갔습니다. 그녀를 환영하는 데라고는 없었고, 유일한 일은 노새몰이꾼을 위한 여인숙을 운영이었습니다. 고된 일과 적은 보상이었으나 그녀는 일을 점점 더 잘해갔습니다. 노새몰이꾼들에게 중국어를 배웠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입양한 백여 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태국국경을 넘어 피하기도 했습니다. 펭지엔 지방에서 우연히 옆방 학생들이 티베트지도를 펼쳐놓고 '누군가' 그 지역에 들어가 선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자, 그녀는 그 '누군가'를 자신으로 받아들여 티베트에 가서 선교하기도 했습니다. 20년 만에 영국에 돌아와 간증하여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스토리가 [여섯 개의 행복 여인숙]이란 영화가 잉그릿 버그만의 주연으로 만들어져, 시사회에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초청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택한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아마 남자, 훌륭한 남자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교육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저 아래를 내려다보시다가 작고 보잘것없는 글래디스 아일월드를 찾으셨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존 스토트는 "주님의 능력은 인간이 약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약함은 가장 실제적으로 그분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스 모어도 "우리가 약하다고 인정하는 순간보다 우리가 더 강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파스칼은 "자기 연약함을 모른 채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만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참담함만을 아는 자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갈 때 그 약함은 주님의 큰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우리는 무조건 고통이 없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모든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오늘 우리가 겪는 약함을 인해 기도함으로 주님의 크고 위대한 뜻을 이루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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