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금송아지냐 여호와냐? (출애굽기 32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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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송아지냐 여호와냐? (출애굽기 32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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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냐 여호와냐? (출애굽기 32장 1-14절)

 

 

잔치가 점점 흥겨워져 갈 때 갑자기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져서 그 고조된 분위기를 삽시간에 망쳐 버리게 되는 일을 우리가 가끔 경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불신자들의 술자리에서는 처음에는 흥청거리며 신이 오르다가도 누군가가 대취해서 술주정을 시작하고 추태를 부린다든지 할 때 그런 경우가 자주 생길 것입니다.
  때로는 회식을 하면서 별 것 아닌 말이 점점 가열되다가 말싸움이 되어 버려서 그 좋던 분위기를 일순간에 썰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데리고 간 아이들이 함께 놀다가 서로 티격태격하고 한대 쥐어박고 맞고 그래서 고래고래 울고 하는 바람에 그전까지는 화기애애하게 시간 보내고 있던 어른들 사이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경우도 또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여튼 흥겹고 즐거워야 할 잔치의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깨어져 버린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내산 밑에 모여서 민족적인 큰 축복의 잔치를 벌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사실 일생일대의 최고의 잔치를 벌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수백 년 동안 염원해 왔던 출애굽이 드디어 이루어졌습니다.
  온 백성의 생사가 엇갈렸던 홍해를 기적적으로 통과하는, 정말 신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마침내 하나님의 산, 시내산에 모여 큰 성회를 열고 십계명을 위시한 하나님의 계시를 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문자’로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할 때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분위기가 충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엄청난 축복의 잔치를 한 순간에 망치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금송아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그 복스러운 분위기를 한 순간에 앗아 갔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기까지 하는 큰 비극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중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최고로 악명 높은 일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금송아지 사건을 가리켜 “우리의 거울”(고전 10:6)로 삼아야 할 일이라고 신약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사건의 거울을 통하여 사람이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될, 우상과 하나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심령에 새겨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이 만들어낸 금송아지 우상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최악의 죄인이 되게 하는 무능하고도 악한 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까지 어쨌든 하나님 믿는다는 백성이었지만 그 신앙의 기본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를 이 사건이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본문 1절에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사건의 발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모세의 장기간의 부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라고 했듯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지내는 동안 그들의 심령에 시험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세가 그들 중에 없다는 사실이 마치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모세 대신에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요청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즉 ‘모세’라는 사람이 ‘자기네들을 인도하는 신’과 동격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순전히 모세에게만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모세가 일일이 지도해 주고 모세가 손잡고 인도해 주어야만 간신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에 철저히 뿌리박은 신앙이 아니라 모세라는 사람에게만 의존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기초부터가 잘못되어 있는 신앙은 그 모세가 그들 곁에 없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의 신앙을 결코 사람에게 의존해서는 아니 됩니다.
  부모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고 자식이 주일마다 교회에 모시고 나오니까 그럭저럭 참석하는 예배로 끝나서는 아니 됩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구역장이나 심방장이 강권하는 손에 이끌려 겨우 영위되는 교회 출석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혹 ‘목사님이 좋아서’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이 그처럼 사람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신앙으로 끝나서는 절대로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기본 뼈대조차 갖추어지지 못한 신앙으로서, 우상의 미혹에 아주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허약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곁에 있는 성도나 교역자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그 출발 단계에서는 도와 줄 수 있고 또한 먼저 믿는 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에 인도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 말씀 위에 자기 신앙의 기초를 세우면서 자립하지 못하고 계속 그처럼 다른 사람에게 끌려만 다니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쉽게 시험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의존하던 사람이 사라지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시 하나님을 자기네들 편리한대로 정의하고 판단하면서 새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2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들이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려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불렀고, 또 아론도 그 금송아지를 두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신을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믿어 왔던 하나님을 이제 그 금송아지를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으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금송아지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서 정의해서 만들어낸 신이었던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다시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애굽 사람들이 신을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습읍니다.
  소는 특히 애굽의 우상 신상을 만들 때 자주 사용되던 형상이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으로 ‘오시리스’라는 신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형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멋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생각해 낸 것은 바로 그들이 이전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 보았던 그 이방신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종교제도는 그 조직과 규모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라 할 만큼 잘 짜여 있었고, 그것은 고고학적인 증거와 자료들을 통하여 오늘날의 우리들까지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날 애굽에 살고 있을 때, 그들의 그런 화려한 신상들과 웅장한 신전, 그리고 위엄 찬란한 사제들의 모습을 흔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오직 모세 한 사람이 전해 주는 말씀만을 통해서 믿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초라하고 촌스럽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더라도 당대 최고의 문화와 국력을 자랑하던 선진국 애굽 사람들의 종교를 모방하는 것이 그들 딴에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바로 그와 같은 금송아지 종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세상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따라 제멋대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기는 하되 그것을 어찌하든지 세상의 조류와 맞추어 보려고 애들을 쓰는 것입니다.

  세상의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주장하면, 소위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창조론을 포기하고 그 진화론에 하나님을 뜯어 맞추려고 합니다.
  유수한 대학교의 소위 종교학 교수들이 ‘종교 간의 장벽 제거’ 어쩌고 말 한 마디 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나 다른 종교의 신이나 나중에 가면 다 같은 것이라.”고 서슴없이 그 훌륭한 박사님들께 맞장구를 치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사람들이 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 섬기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면, 그저 친구로의 하나님만 가르치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기”만 하면 되는 아주 편리하고 재미있는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소위 ‘열렸다고 하는’ 교회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그런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참으로 금송아지처럼 멋있게만 보일 것입니다.
  불신 세상의 첨단과학이나 철학이나 유흥적 문명과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잘 융화되는, 또한 매우 세련된 현대적 하나님처럼 보일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굽의 우상종교를 따라가는 금송아지에 불과하지 결코 참 하나님은 아닌 것을 우리는 꼭 깨달아야 합니다.

  참 하나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계시해 주시는 그것 이외에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증거의 돌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밝히 보여 주시는 계시인 반면에, 금송아지는 사람이 스스로 정의하고 싶은 하나님을 반영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증거의 돌판을 통하여 계시되는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만을 그대로 섬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통해 하나님을 마음껏 즐기는 것보다 훨씬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신앙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금송아지는 사람에게 구원은커녕 아무 구체적인 복조차 내릴 수 없는 지극히 무능한 우상일 뿐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가장 악한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자기 편리하게만 섬기는 것 - 바로 이것이 금송아지 종교이며 하나님을 극단적으로 모욕하는 최악의 죄가 되는 것을 깨닫고 한시라도 잊지 않고 늘 스스로 경계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죄인 된 사람에게 용서와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인자롭고도 선한 신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사건을 통하여 저지른 죄는 한마디로 죽어 마땅한 극악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7절로 10절까지의 말씀은 그런 악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하신 진노를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네가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지, 모세 아니라 그 누구 앞에서도 ‘네 백성’이라고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여기에 와서는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네 백성”이라고, ‘이 백성은 이제 내 백성이 아니고 모세 너의 백성이다.’라고 아주 쌀쌀하게 말씀하고 계실 정도로 크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즉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백성은 이미 당신의 백성이 아니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결코 부르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이 곧은” 즉 걸핏하면 하나님께 고집스럽고 교만스럽게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예 다 진멸하여 없애버리고, 그 대신에 모세 한 사람의 자손을 통하여 완전히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을 아예 새로이 만들어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생각을 의인화해서 하는 말이며 또한 과장법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사람들의 사회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저지르는 온갖 못된 짓들을 매일같이 뉴스를 통해 듣다보면, 이런 흉악범들이나 사기꾼들은 아예 깨끗이 씨를 말려 버리고 그저 착하고 준법정신이 된 사람들만 모여서 사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가끔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듣고 모세는 어떤 기도를 올렸습니까?
  이어지는 11절 이하 14절에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기도하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그 자비의 속성에 전적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자기 백성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모세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바로 그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일깨우는, 그 자비가 발동되도록 만드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주의 백성”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의도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그들이 결코 자기의 백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님 당신의 백성’이라고 자기편에서 고쳐서 아뢰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진노하셨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원래 ‘자기백성’된 자들을 결국에 가서는 용서하지 않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변치 못할 인자의 성품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하시도록 가만히 두면 훨씬 더 편할 일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불평 원망하고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서도 며칠 지나지 않으면 또 다시 불신앙적인 짓들을 반복하는 그 골차 아픈 백성들은 이 기회에 깨끗이 싹 처리해 버리고 아예 완전히 순수한 씨만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나간다면 그보다 더 편하고 이상적인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세는 아무 문제없는 완벽한 사람들만 모인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문제 많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완벽한 백성으로 만들어 나가는 쪽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을 여기서 다 진멸시키시면 애굽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탄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구원해 주신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호소하면서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기를”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이스라엘 백성을 번성시키고 축복해 주시겠다고 이전의 선조들에게 내려주신 ‘언약’을 따라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그대로 일치하는 기도였기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 바로 이것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서 그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직결 심판하신다면 그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일 이 세상에서 모든 죄인들을 다 깨끗이 진멸하시고 의인 한 사람만 남겨서 그 자손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세워나가고자 작정하셨더라면 저와 여러분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오늘까지 견뎌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너무나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천국 백성들의 숫자를 채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스스로 의로운 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주가 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러서 그들을 회개케 하시고 용서해 주셔서 의인을 만들어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을 이루시는 방법이 이 얼마나 오묘하고도 은혜로운 것입니까?

  바로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으신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 그리고 죄를 벌하시는 공의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오히려 당신의 성자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이 설명할 길 없이 지극히 선하신 성품 -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소망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죄용서의 감격과 구원의 즐거움을 맛보고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될 때 거기에는 참된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교회가 만일 의인들만 모여서 누가 더 잘났는지를 겨루는 자리가 된다면 거기에 도대체 무슨 은혜란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곳은 여전히 서로의 못난 점만을 찾아내려는 비판의 눈길,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점잖고 예의바르지만 속으로는 교만의 경쟁만 날카롭게 대립하는, 지상 최대의 외식자 집단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일 스스로 의롭게 되어 구원 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되면 거기에는 결국 무엇만 남게 되겠습니까?
  옛날 종교개혁 이전의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 이전의 셀 수도 없는 숱한 사람들이 1000년에 걸쳐 꼭 같이 겪었던 끝없는 절망의 시행착오, 즉 ‘내가 이 정도 의롭고 선하게 살아서는 과연 구원 얻기에 충분한 것인가?’라는 그 불안, 그 불확실의 고민 속에서 평생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의 확신이 체험되는 교회는 결코 그런 곳이 아니라, 오히려 창녀와 같은 죄인이 와도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기쁨을 나누고 설사 죄인 중에 괴수라 할지라도 ‘이제는 아무도 나를 정죄할 수 없다.’는 구원의 확신을 한 순간에 얻게 되는,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죄용서의 은혜는 내가 선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백성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성품에만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한때에는 금송아지 숭배와 같은 최악의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조차도 베풀어질 수 있는 실로 무한한 인자와 선하심으로써 오늘도 죄인을 찾아와 주시고 불러 주시는 이 여호와 참되신 하나님을 영접함으로써 그 구원의 기쁨과 은총을 만끽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 육신을 애굽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은 여전히 애굽의 우상 아래 종으로 매여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거울’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또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 시작한 후에도 성경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이 만들어낸, 혹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금송아지를 따라가기 시작하면 다시금 죄 아래 종노릇하던 시절로 되돌아가게 될 수 있다는, 아주 엄중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같이 치명적인 금송아지 숭배의 죄를 저질렀을 때 인제는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듯이 보였습니다.
  사실상 그런 극악한 범죄는 다시는 회복할 길이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에 그 모든 절망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역전시키는 일, 즉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롬5:20) 역사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악명 높은 죄악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력하게 작동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사랑이요 은혜입니까?
  이런 ‘거울’을 보면서도 어떻게 ‘금송아지’와 ‘여호와 하나님’을 구별하지 못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기독교도 다른 종교들과 본질상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나, “어떤 신을 믿어도 꼭 같이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있고 또 그 말에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모든 사람은 ‘금송아지냐 여호와냐?’라는 선택을 일생동안 한번은 꼭 하게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신을 정의하고 판단하느냐, 아니면 스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에 의지하여 참되고 유일하신 여호와를 찾고 영접하고 믿게 되느냐, 결국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자 역시 ‘신이 없다.’라고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의를 내리는 사람이니 역시 본질적으로는 ‘금송아지 숭배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선택을 잘못하게 되면 그 후유증은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끔찍하고 비참한 것이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짜 무서운 진노와 영원한 저주에 빠져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믿으려 하는 금송아지 종교에 다시는 미혹 받지 말고, 이미 지난날에 저지른 그 어떤 극악한 죄도 당신의 인자로써 깨끗이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나타난 당신의 선하심으로 완전히 구원해 주시는 이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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