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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순절신앙의 한국전래와 순복음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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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신앙의 한국전래와 순복음신앙

배현성 교수


순복음신앙의 특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모체(matrix)는 오순절신앙에 기인한다. 즉, 순복음신앙은 오순절신앙이 한국의 교회상황에 토착화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순복음신앙은 지친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침투력을 지닌 채 다가가 한국 사회에 순복음운동을 확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복음운동은 한국교회의 주된 교파들(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에 의해 외면 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이단시 되어 많은 핍박을 받아 왔음이 사실이다. 본 강의는 오순절 신앙의 한국 전래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적 정체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러한 오순절 신앙이 순복음 신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다양한 요인들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I. 오순절 운동의 시작

늦은 비 성령의 역사로 표현되는 현대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각종 은사를 통해 교회와 사회에 갱신의 바람을 주입하면서 20세기에 이르러 가장 큰 기독교 운동으로 자리잡았다. 현대 오순절운동은 당시에 교회에 나타나던 다양한 신학적 요소들이 함께 연결되어 발전되었다. 즉, 현대 오순절 운동은 John Wesley의 성화개념과 복음전도자 Charles G. Finney의 체험을 중시하는 신학적 요소,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의 전천년설과 신유를 강조하는 신학 경향과 초대교회의 사도행전적 능력과 기적을 염원하는 신학적 조류가 함께 섞여 발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새롭게 구성된 오순절 교단과 전통 교단 내에서 성령운동을 일으켰다.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 성령의 역사들이 20 세기 초에도 새롭게 나타나자 교회들은 이러한 일련의 오순절적 역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전세계 많은 교회들은 요엘이 말한 늦은 비 시대를 현대로 이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늦은 비 시기에 교회 역사상 전례 없는 큰 기사와 이적들이 복음의 승리로 연결되어 나타남을 믿고 있다. 늦은 비는 그 규모나 범위에 있어서 이른 비를 훨씬 능가하게 됨을 본다. 현대 오순절운동은 미국을 중심으로 20세기 초에 확산되었다. 특히 미국의 토페카시에서 발생한 이 오순절운동의 불길은 신속히 확산되어 칸사스, 오크라호마, 미조리, 텍사스주까지 연결되었다. 파함은 1905년에 휴스톤에 또 하나의 신학교를 설립하여 복음적인 전도자를 양성하였는데, 그가 윌리암 셰이모어(William J. Seymour) 였으며 그는 1906년 로스엔젤레스 아주사(Azuza)거리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는 바 이것이 바로 1906년의 아주사의 성령운동이었다.

II. 오순절 신앙의 신학적 특성

오순절 신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회에 속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신앙 노선을 견지한다. 즉, 첫째로, 개인적 체험존중, 둘째로, 메시지 전달의 용이성, 셋째로, 자발성, 넷째로, 종말론적 지향성 마지막으로, 성서적 권위를 오순절 신앙의 핵으로 규정한다. 이와같은 기본적인 신앙 노선에 따라 오순절 주의의 신앙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성을 강조한다.
첫째는 마가 다락방에 임했던 강한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현대에도 다양한 형태로 계속된다는 성령 역사의 계속성(continuity)이다.
둘째로, 오순절주의의 특성은 중생(born again)과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의 구별성(distinction)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물론 성령세례가 중생과 더불어 동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지만 성령세례는 중생 후에 경험하는 신적 임재의 체험으로 초자연적, 가시적 현상을 동반하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함으로써 보다 능력 있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는 사건이다. 때문에 누가는 행1:4에서 성령세례에 대한 예언적 신탁을 다가올 오순절 사건의 중요한 요소로 소개하고 있다.
셋째로,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특성은 방언을 성령세례 체험의 초기 외적 증거(initial physical evidence)로 보아 이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신학적 특성들을 감안하여 오순절 신앙의 본산인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는 과감하게 훌륭한 편집자들과 저자들을 발굴하여 정기간행물, 소책자, 주일학교 교재 및 다양한 서적들을 출간하여 성도들의 신앙적 성숙을 돕는 교육에 초점을 두었다. 성령의 역사에 반감을 갖고 도전해 오는 모든 시도에 일일이 교리적으로 변증하여 에너지를 소모하기 보다는 힘써 문서선교 및 성경공부에 치중하면서 초대 오순절 성령운동의 본질적 모습으로의 회복에 강한 지향성을 보여 주었다.

III. 오순절 신앙의 한국전래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떨어졌던 성령의 불길은 중세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잃었던 복음주의 신앙을 돠찾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교회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만 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간 기근이 있었던 것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이른 비 성령의 역사는 근 1900년간의 세월을 보내면서 드디어 20세기 벽두인 1901년부터 미국 켄사스주 토페카시에 있는 벧엘 성서신학교(Bethel Bible Collge)를 기점으로 해서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전세계에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결국 몇몇 인물들을 통해 한국에까지 전래 된다.


A. Mary C. Rumsey의 내한과 허홍과의 만남

한국 오순절신앙(Pentecostal Faith) 전래는 1928년 봄, 미스 럼시(Miss Mary C. Rumsey)로부터 기원한다. 럼시 선교사는 원래 뉴욕시 근교에 있는 감리교회 성가대원이었다. 그녀는 1906년부터 1907년까지의 로스엔젤레스 대부흥때 은혜를 받아 감리교 계통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로스엔젤레스 부흥은 '늦은 비' 성령 역사의 지속이었으며 성령의 역사는 요원의 불길처럼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바로 로스엔젤레스 대부흥 집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럼시는 성령세례 체험과 동시에 선교 사명을 받았다. 즉, 1906년 4월 로스엔젤레스 한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한국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교비 마련에 있어 난항을 겪게 되어 기도하던 중 같은 교회의 덴버드라는 사람을 통해 선교비를 지원 받게 된다. 덴버드의 후원으로 한국 땅에 도착한 럼시 선교사는 하디(R. A. Hardie)목사가 기거하던 감리교의 최초병원 시병원에 여장을 머물렀다. 이 병원은 의료선교사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과 헤론(John F. Heron)이 세웠는데 감리교가 세운 최초의 병원이었다.
이 당시 한국정세는 이미 일본에 의한 강제 합병체제에 있었으며, 1919년 3·1운동이 있고 난 후 민족적으로는 독립운동의 여명기였지만 교회적으로는 크나큰 수난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때 였다. 럼시 선교사는 정동 시병원 숙소에서 꿇어 엎드려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이 때 럼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청년 허홍(許弘)을 만나게 된다. 허홍은 1907. 12. 9일, 충남 보령 태생으로서 아버지가 구세군 사관인 까닭에 구세군 사무 업무를 볼 수 있었다. 허홍은 럼시 선교사의 동역 제의를 받아들여 럼시 선교사를 도와 한국 교회에 오순절 신앙을 확산하기 시작했다. 사실, 럼시 선교사는 미국 하나님 성회 (Assembliesof God)와는 관계없이 선교 열정만을 지닌 채 한국 땅을 밟은 개인자격의 선교사였다. 그녀는 한국인에게 동족 이상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왔으며 한국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허홍은 이 땅에 오순절신앙을 바로 전하기 일념에서 럼시 선교사를 통해 성경을 배우면서 많은 은혜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들의 노력과 열정에 힘입어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을 소개하며 하나님의 성회 교단을 창설했다. 허홍 목사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총회장이 되기도 했다

B. 양두 마차 체제의 한국 오순절 교회

1. 서빙고 교회와 박성산 목사
이러한 한국교회의 배경 속에서 럼시 선교사와 허홍의 노력으로 한국최초의 오순절교회가 창립되었는 데 그 교회가 바로 '서빙고 교회'이다. 서빙고 교회는 럼시 선교사가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얻어진 결실이었다. 이 교회의 초대 담임은 박성산 목사 였다. 그는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자 였다. 그는 1908. 1. 20 일 태생으로 청년시절부터 농촌문제, 사회개발문제, 금주, 금연운동을 하던 민족 계몽운동가 였다. 그후 일본의 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유학을 하였으며 마침 선교협의차 도일했던 럼시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졸업과 동시에 조국에 귀국하여 서빙고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박성산은 오순절적 뜨거운 설교를 통해 "성령세례의 표적은 방언이며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령충만함과 사회참여"라고 역설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오순절 교회는 이단이다" 혹은 "방언 패거리"라는 비난을 감수하여야 했다. 여기서 박성산 목사가 주장한 오순절신앙이란 사도행전에 입각한 근본주의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방언과 신유와 권능이었다. 그는 이 세 가지가 성령세례를 통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이로 인해 당시 오순절교회는 '방언파' 또는 '랄랄라파'라는 별명이 붙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소와 비난 외에도 오순절교회는 출석 성도들의 가족으로 부터도 심한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 서빙고는 어촌마을로 기독교에 대한 일반상식도 없었으며 어민들은 배타적이여서 복음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오히려 교회는 부흥되어 1934년 장년 70명, 주일학생 200명까지 불어났다. 1934년 한강뚝섬에서 집례된 서빙고교회 침례식은 한국 하나님의 성회소속 교회사 사상 최초의 침례식 이었다.

2. 수창동 교회와 배부근 목사
1930년 한국에 오순절신앙이 전래된지 2년후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 교인이던 팔선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했으며 그는 곧 영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벳시와 메르테드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불러 들였다. 벳시와 메르테드 역시 교단 파송 정식 선교사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벳시, 메르테트, 팔선 선교사들은 일본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배부근 목사와 더불어 사직공원 앞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수창동교회를 세웠다. 배부근 목사는 강원도 춘천 태생으로(1906년 6월 16일 출생)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名古屋)에서 신학원을 다녔다. 그후 죤 주르겐 센 원장이 경영하는 신학교에서 성령세례를 받아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1931년 귀국하여 이들 세명의 선교사들의 도움을 통해 수창동교회를 개척하였다.

C. 교회의 확산과 해산

이 땅에 오순절신앙을 전하기 위하여 왔던 미국의 럼시 선교사를 비롯해 영국 오순절교회 선교사 벳시, 메르테드 등은 1940년 일본의 기독교 박멸정책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하게 된다. 당시 약한 교세에 기둥같은 선교사들을 잃고 다가 오는 일본의 엄청난 박해로 말미암아 조선 오순절교회의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성령받은 성도들은 환란과 핍박 중에도 남은자들로서 각자의 신앙을 지키며 가슴 속에 일어나는 성령의 불꽃을 계속 지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의 1930년대 말 조선오순절 교세 현황은 아래와 같다.

오순절교회는 수창동교회에 이어 연희장 교회를 개척했으며 그 뒤 허홍 목사는 럼시 선교사와 흑석동 집회소를 세웠고, 배부근 목사는 1939년에 당인리에 개척교회를 세웠고, 박성산 목사는 연신내 장터에 연소교회를 세웠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난 뒤 기독교계에 서서히 핍박을 가해오던 중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한국인의 얼을 빼앗으려는 정책과 기독교 박멸기도에 반발하면서 끝까지 견디며 애쓰던 선교사들은 마침내 선교위원회를 소집하여 신앙의 자유가 보장받지 못하는 미션학교의 폐쇄를 결정하게 된다. 한국인의 자주의식을 일깨우며,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이 땅 사람들의 일본화(Japanization)를 저지 해주는 든든한 보루였던 기독교 학교의 폐쇄는 선교사는 물론 한국 지성인들을 비탄과 실의에 빠지게 했다.
당시 기독교는 일본관리들에게 있어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한국인의 의식을 철저히 뿌리 뽑기 위해 갖은 압력을 다하다가 결국에는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신사참배가 정치적인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는 일본 관리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학교들은 학교 폐쇄라는 수난만은 모면할 수가 있었고 교역자들도 그다지 어려움 없이 난국을 피해갈 수 있었다. 1938년 일본은 장로교 9월 총회를 기해서 조직적인 파괴공작을 시작했다. 결국 한국 장로교도 1938. 9. 9일 제 27회 총회에서 한국 장로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스런 신사참배 결의안을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이름으로 가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결코 않된다"라고 소리치는 참된 신앙양심을 가진 교역자들가 성도들이 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역자는 그해 노회에서 제적되었고, 목양지를 빼앗겼다. 일제는 속속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를 투옥, 감금시켜 모진 고문을 통해 변절을 강요했다. 그 때에 주기철, 손양원, 주남선, 한상동, 이기선, 최봉석, 박관준 장로, 박의흠 전도사, 감리교의 이영한, 침례교의 전치규, 성결교의 손갑종, 안식교의 최태현 목사를 위시, 2천여 신도가 투옥 당했고 2백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50여 교역자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기독교연합공의회나 YMCA, YWCA가 해산되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체포당하여 옥중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쓰기까지 투쟁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이때부터 구미식 교파명을 완전히 바꿔 일본 기독교단 조선교단(1945. 8. 1)으로 만들었다. 또한 성결교회(1943. 5)나 침례교(1942. 6. 10)등 군소교단들의 교역자를 일제히 구속하여 교회는 폐쇄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강압의 힘에 의한 일제의 박해와 수난 속에서 한국교회는 구약이 잘리워 나갔고 오직 사복음서만 유통되는 일본 조선교단의 일원으로 기진맥진한 모습이 되어 끌려 갈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순절교단의 허홍 목사는 중병까지 걸렸다. 배부근 목사는 안국동 소재 구영숙(具永淑) 소아과 병원에 약제사로 취직을 해서 생활을 꾸려가다가 1944년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했고, 박성산 목사는 또한 광화문에 성문당이라는 서점을 내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후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IV. 오순절 신앙의 재 정비

광화문에서 성문당 서점을 경영하던 박성산 목사는 8·15 해방이 되자 배부근, 허홍 목사와 다시 합류하여 오순절교회 재건을 위한 일환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며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듬해 1950. 4. 9일 전남 순천에서 제 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대회가 개최되었다. 평신도는 200여명쯤, 교역자는 허홍, 박성산, 윤성덕, 김성환, 박헌근, 박귀임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오순절 운동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던 인물들이다.
해방과 더불어 과도기에 들어선 한국은 1950년 6.25라는 비운의 동족간의 전쟁을 맞게 된다. 전쟁은 유엔군 3만 6천명과 한국군 30만명이라는 인명을 희생시켰다. 여기에 70만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엔군은 전쟁비용으로 150억불을 투입했다. 또한 민간인은 24만명이 죽고 13만명이 학살당했으며 8천여명의 저명인사가 납치됐으며 이때 파괴된 교회만도 2천교회가 넘고 53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이로 인한 오순절교회 또한 피해가 컸다. 순천 오순절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면서 제 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 때 성회를 인도했던 박헌근 장로가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말경 순교자로 기록되기도 한다.
이즈음 한국전쟁을 돕기 위해 미국 종군(從軍)목사「엘라우드」가 입국하여 군목으로 근무하면서 허 홍 목사를 만난 그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 현황을 알리는 동시에 허 홍 목사에게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유대 관계를 맺을 것을 간청하였다. 엘라우드의 노력으로 1952년 여름,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선교부장 오스구드(Osgood) 목사가 한국에 나와 허 홍, 박성산, 배부근 목사 등을 만나 한국 오순절교회 현황을 취재해 갔고 1952. 12. 15일 한국 최초의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로 채스넛(Arhber Cheesnut) 목사가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채스넛이 내한하자 하나님의 성회 결성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오순절 계통의 동지와 교회를 규합하는 일을 박성산 목사가 맡았는데 그는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돌며 호소하였다. 그 결과 1953. 4. 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허 홍 목사가 시무하는 남부교회에서 모여 역사적인 창립 총회를 가졌던 것이다. 창립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체스넛, 박성산, 허 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이고 그외 4인이 참관하여 모두 11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토의사항은 교단창립에 관한 제반사항으로서 주요안건은 ① 헌장 설명과 통과 ② 헌장에 의해 총리(總理) 선출 등이었다. 초대 총리에 선교사 채스넛 목사가 선출되었고 교역자 양성을 위해 세워질 신학교 교장도 총리가 맡기로 했으며 학감에는 허 홍 목사가 선출되었다. 하나님의 성회 신조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신조 16조를 요약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졌으며 절대무오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② 우리는 삼위(성부, 성자, 성신)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③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무죄한 생애, 그의 이적들, 그의 승리적인 대속의 죽음, 그의 육체, 부활, 그는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과 천년동안 온 세상을 통치하러 권능과 영광으로 이 지상에 재림할 것을 믿는다.
④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 교회는 휴거한다는 복된 소망을 믿는다.
⑤ 우리는 죄의 정결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회개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⑥ 우리는 성령으로 이룬 중생은 개인 구원에 있어 절대요소가 되는 것을 믿는다.
⑦ 우리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믿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우리 육신의 병을 치료하여 주심을 믿는다.
⑧ 우리는 사도행전 2장 4절에 입각한 성령세례는 이를 구하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⑨ 우리는 믿는 자에게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⑩ 우리는 구원받은 자나 받지 못하는 자나 다 부활하되 전자는 영생을 얻고 후자는 영벌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다.

V. 오순절 신앙의 토착화와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신학

오순절 신앙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한국적 목회 상황에 따른 토착화된 신학적 발전이 있게 된다. 이러한 역할을 선봉에서 이끈 사람은 조용기 목사이다. 월간 순복음이 창간되자 조용기 목사는 동지에 "병을 짊어지신 예수"라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 대 내외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오순절신학의 한국적 정립을 꾀하기 시작했다. 조용기 목사는 목회를 시작한 5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60년대 전반에 걸친 한국의 피폐한 사회, 경제적 상황을 직시하며 고민했다. "하나님, 지금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이까? 이 헐벗고 굶주리고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소망과 새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조용기 목사의 고민은 바로 오순절 신앙이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한국의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고민이 반영된 간절한 기도는 조용기 목사로 하여금 결국 요한삼서 2절을 본문으로 하여 본문(text)과 삶의 상황(context)을 반영하는 삼중축복의 해석학적 도구를 마련하게 되기도 한다.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신학은 오순절 신앙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의 나아 가야할 분명한 방향제시를 해 왔다. 뿐만아니라 조용기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들, 즉, 1)중생의 복음, 2)성령충만의 복음, 3)축복의 복음, 4)신유의 복음, 5)재림의 복음으로 구분하여 오중복음을 강조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성서적이며 사도적인 전통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케 하는 실천적인 신앙과 신학의 원리들을 체계화 시켜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오순절 신앙이 한국에 전래된 이래 한국적 상황에서 토착화된 신학이다.

VI. 결론

지금까지 오순절 신앙의 한국전래와 순복음 신앙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순복음 신앙은 이른 비와 늦은 비 운동에 나타난 기독교 정신을 그 모델로 한다. 이러한 운동들은 초대교회와 20세기 초의 교회가 열악한 주변의 환경적 요인들을 극복하고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운동과 현대 오순절 운동을 근간으로 해서 형성된 주된 신학적 관심영역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성령론적(Pneumatological) 관심이다. 두 운동을 통해 나타나는 이러한 관심은 결국 교회로 하여금 선교론적(Missiological) 열정으로 연결되어 세계를 지7향하며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순복음신학의 특성은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신학함의 중심 주체로서 인정하는 데 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운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 현실화 시키는 운동이다. 오순절 신앙은 이처럼 한국 교회의 상황을 잘 인식하여 성령운동을 통한 교회의 활성화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오순절 신앙은 이미 순복음신앙으로 이 땅에 토착화되었다. 이제 순복음신앙은 21세기 한국 교회의 갱신과 변화를 위해 더 한층 사명과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출처 : † 세계제일교회 †  |  글쓴이 : 언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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