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세상이야기

[스크랩] [자료] 1928년 12월 17일, 완친왕(完親王)의 생모인 영보당 이씨(永保堂 李氏) 별세

작성일 작성자 오월

[자료] 1928년 12월 17일, 완친왕(完親王)의 생모인 영보당 이씨(永保堂 李氏) 별세

 

이귀인 별세(李貴人 別世)

<동아일보> 1928년 12월 19일자

순종의 형님되시는 이를 낳으신 완왕궁 이귀인(完王宮 李貴人)은 팔십세의 노령으로 지난 17일 정오에 별세하였더라.

 

[관련자료]

▲ 영보당 귀인 이씨(永保堂 貴人 李氏; 1843.2.14~1928.11.6 양12.17) (永寶堂으로 표기된 사례도 있음)

- 1868년 윤4월 10일 운현궁에서 왕자 출생

- 연도미상 옹주 출생 (단, 1872년 이전으로 추정, <승정원일기> 1972년 3월 22일자에 기사관련)

- 1876년 4월 10일 왕자 선(王子 墡)을 완화군(完和君)으로 책봉

- 1880년 1월 12일 완화군(完和君) 졸서 [양주군 인창면 월곡리에 안장, 일명 '장자묘' 또는 '완왕묘', 현재 서삼릉으로 이장]

- 1880년 1월 29일 궁인이씨(宮人李氏)를 숙원이씨(淑媛李氏)로 봉작

- 1906년 5월 27일 숙원이씨(淑媛李氏)를 귀인이씨(貴人李氏)로 봉작 [<대한제국 관보> 1906년 5월 30일자]

- 1907년 1월 10일 완화군(完和君)을 완친왕(完親王)으로 추봉

- 1928년 12월 17일 영보당 귀인 이씨 별세 [양주군 숭인면 월곡리 완왕묘 우강 남쪽에 안장; 현재 서삼릉 귀인묘역으로 이장]

 

[장자묘 '표석'(1880년 건립)내용, <서울육백년사 문화유적편>에서 발췌]

上之十七年春正月十二日庚辰 王子完和君患痘卒上悼甚 命有司庇喪遣近侍致侑 特賜諡孝憲越三月九日丙子葬于楊 州治南月谷壬子之原 鳴呼幽明恩榮之典備遺憾矣 公諱 字善之淑媛李氏出也以戊辰閏四月十日丁巳生于雲峴宮之 戱竹軒丙子膺爵丁丑冠禮戊寅就傳未及娶而卒春秋僅十有 三歲以我 聖上止慈之德 ....(이하 부분 생략됨)
 

(정리 : 2007.6.19,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추가자료]

완화궁 유산문제(完和宮 遺産問題)

<매일신보> 1913년 1월 12일자

이태왕 전하는 일찍이 제위에 계실 때에 그 때 여관(女官)으로 있던 영보당 이귀인(永寶堂 李貴人)은 사십륙년 전에 왕자 완화궁(完和宮)을 생하였는데 그 왕자는 불행하야 십삼세에 돌아가고 이귀인은 그후로 완화궁에서 왕자의 사당을 지키고 제전을 받들더니 향자에 한국황실에 부속한 재산정리할 대를 당하야 완화궁에 부속한 토지와 기타 재산을 이왕직으로 부치고 제전은 이왕직에서 직접으로 지내며 이귀인은 매월 월봉을 넉넉히 주어 지내게 하더니 이귀인은 완화궁에 부속한 전라남도 해남 무안(全羅南道 海南 務安) 양군에 있는 오백정보 가량 되는 토지는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하야 문서를 내어놓지 아니할 뿐 아니라 재작년 십이월분에 그 토지를 경성 본정 일정목 양복상(京城 本町 一丁目 洋服商) 내전도삼보(內田道三輔)에게 금화 사만원에 매도한 고로 내전이는 곧 그곳으로 사람을 파송하야 측량을 마치고 군청에 등기를 신청하며 일변으로는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증수하매 이왕직에서 내려간 소작료 징수인과 충돌하야 분쟁이 일어나매 경찰관헌과 지방관청에서도 이를 처치하기에 곤란하매 이왕직에서는 그 토지 및 완화궁의 부속토지는 분명하나 이귀인의 소유들은 아니라 하야 인도치 아니하는지라, 그 귀인과 내전 등은 변호사 고교장지조에게 위탁하야 동변호사는 이왕직과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며 혹은 경성 명치정 신탁업(京城 明治町 信託業) 소림등우위문(小林藤右衛門)씨도 여기에 참가하야 총감부를 방문하고 우 사건에 대하야 극력운동한다는데 경무총감부에서는 비밀히 이 사건의 진상을 알기위하여 관계자의 행동을 주의하더니 과연 지나간 칠일에 거간영업하는 김항기(金恒基)를 서강 자기집에서 궁원형사(宮原刑事)가 인치하였으며 사법계원(司法係員)의 활동으로 복산경부(福山警部)는 구송형사(久松刑事)를 데리고 내전도삼보(內田道三輔)의 집에 가서 가택을 수핵하며 상자를 수탐하야 서류를 압수하고 또는 경성 고시정(京城 古市町)에 거주하는 조명구(趙命九), 이근배(李根培)의 고문이라 칭하고 조선사람 사이에서 거간하는 이등경중(伊藤京重)은 영산형사(永山刑事)에게 잡히고 이귀인과 이귀인의 심복으로 완화궁에서 일 보는 한상궁(韓尙宮)도 궁원형사(宮原刑事)에게 가택수색을 당하야 가장 증거될 만한 서류를 압수하고 동시에 한상궁도 구류하고 내전도 삼보도 지나간 칠일에 한가지로 인치하였다가 곧 놓아 보냈더니 그 이튿날 다시 유치하고 복산경부(福山警部)가 주임으로 철야조사하였으며 경시총감부에서 금번에 이와 같이 돌연히 하수함은 일선인 간에 범죄행위가 복재함은 물론이어니와 조사를 마친 후에는 의외의 사실이 나타날 듯하다더라.

 

몽중거금(夢中巨金)

꿈인가 생시인가, 오만원이 날어가

<매일신보> 1913년 12월 7일자

경성 중부 박동(中部 박洞) 12통 10호 이귀인(李貴人) 육십칠세, 경성 중부 궁동(中部 宮洞) 71통 1호 한상궁 이름은 갑순(甲順) 칠십세, 경성부 서강면 창전리(京城府 西江面 倉前里) 27통 7호 김항기(金恒基), 경성 본정 일정목(京城 本町 一丁目) 내지인 내전도지보(內田道之輔), 이등경중(伊藤京重) 등 5명이 공모하야 이왕직의 소유전답 오만여원 가치를 사기취재하려던 죄목으로 재판소에서 예심을 마치고 유죄로 결정이 되었는데 이귀인은 열여덟살 때에 구한국궁중에 여관으로 들어가서 당시 황제의 총애를 얻었으므로 명치 원년에 지금

▲ 이태왕전하의 왕자를 탄생하매 당시에 외외한 세력이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칠 민비(閔妃)의 미워하심을 받아 모자를 한가지로 궐내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해에 즉시 완화군(完和君)을 봉하야 북부 재동에 완화궁(完和宮)을 실시하고 궁내부에서 관리하여 거더니 명치 11년(즉 1878년) 음력 6월경에 한국황실로서 돈 일만 이천량을 내리어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동포(全羅南道 務安郡 一老面 東浦)에 논 삼십사석 팔두 삼승락과 밭 일석 십팔두 칠승락과 동도 해남군 청계면 가학동(同道 海南郡 淸溪面 加鶴洞)에 논 사십칠석 십두락과 밭 육십석락이며 동군 산일면 교동(同郡 山一面 橋洞)에 논 이십삼석 이두 팔승락과 동군 황원면 연당(同郡 黃原面 蓮塘)에 논 이십오석 육두 칠승락, 도합 일백이십칠석 십팔두 이승락을 사서 완화궁에 부치고 매년 추수로 완화궁의 경비를 쓰게 하였더니 명치 13년(즉 1880년)에

▲ 완화군이 불행하매 그후로는 완화궁은 완화군의 제사받드는 곳이 되어 경성 중부 박동으로 옮기었으며 명치 40년(즉 1907년)에 완왕궁이라 개칭하고 이귀인은 명치 13년(즉 1880년)에 숙원(淑媛)을 봉하고 동 39년(즉 1906년)에 주임관 대우 귀인을 봉하야 중부 궁동사저에 우거하는데 생활비는 궁내부에서 상당하게 주다가 이태왕전하께서 양위하신 후는

▲ 덕수궁에서 매년 이천 사백원씩 주었더라. 그후 일한이 병합하매 완왕궁은 이왕직 관리에 부속되고 그 재산도 역시 이왕직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명치 44년(즉 1911년) 6월분에 이왕가에서는 완왕궁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하여 제전절차는 장사계(掌祀係)에 부치고 전답과 재산은 회계계에 부속케 하고 전답 있는 각처 군청에 통첩하야 토지의 경계되는 곳마다

▲ 이왕직의 소관이라는 표목을 박게 하였더라. 그러나 이귀인은 무슨 생각이 그릇 들었던지 덕수궁으로부터 상당한 생활비는 받으면서도 유위 부족하야 연전에 황실로서 내린 돈 이만 이천량은 내(나)의 아들을 준 것인 고로 그 아들이 없는 오늘날은 그 재산은 당연히 내의 소유라 하는 생각으로 완왕궁의 전답추수기와 문권이며 그외에 모든 증거서류를 자기집으로 갖다가 김소사라 하는 사람으로부터 이귀인이 매수한 모양으로

▲ 매매의 증서를 위조하야 상궁에 한갑순이라 하는 여관과 공모한 후 이왕가로부터 그 전답의 대금 오만여원을 찾아내일 작정으로 고심하는 중 공모자 김항기는 내지인 이등경중(伊藤京重)의 주선으로 내지인 내전도지보(內田道之輔)에게 금화 사천이백원을 얻어쓴 후 무슨 영업을 하다가 실패하야 갚을 도리가 없는데 이등이는 그 돈의 보증인인고로 채권자의 날로 심한 독촉을 이기지 못하야 한참은

▲ 여관 한갑순의 집에 은신하고 있는 중 한갑순은 이등이가 집에 와서 있음을 천만다행히 여기어 이왕가에서 논값 찾아내일 꾀를 연구하매 이등경중과 김항기는 큰 돈구멍이 생겼다고 좋아하야 이귀인과 상의한 후 보수금으로 일만오천원을 주기로 언약한 후 이등이는 그 사실을 내전이에게도 자세히 말하고 비로소 다섯 사람이 공모하야 위선 이귀인의 이름으로 이왕직에 전답을 도로 달라는 뜻으로 청원하매 이왕직장관은 그 청원을 퇴각한지라 그 무리 등은 다시

▲ 음흉한 계책을 내어 그 전답이 이왕직의 소관 되기 전 명치 44년(즉 1911년) 4월 8일날자로 이귀인은 내전도지보에게 금화 사만원을 받고 토지를 전집한 모양으로 하고 기한은 명치 44년 11월 그믐으로 정하되 만일 기한이 지나면 돈일만원을 위약금으로 내이고 토지의 소유권은 내전에게 양여하기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그외에도 여러 가지 교모한 수단으로 사람의 눈을 속이도록 꾸미어 놓은 후 변호사 고교장지조(高橋章之助)에게 사건을 위탁하매

▲ 그 내용의 비밀함은 고교변호사도 자세히 아지 못하고 즉시 이귀인의 대리인이 되어 이왕직으로 청원하여 소궁(小宮)차관을 면회하고 청원의 이유를 진술하였고 한편으로는 소송을 준비하는 중 관헌의 엄밀한 조사에 간상이 탄로되어 이귀인 외 4명은 사기취재로 검거되었더니 이귀인과 한갑순은 몽방이 되고 내전이와 이등 두 자는 경성지방법원 사천 예심판사가 예심중이더니 이등이는 감옥에서 병사하고 내전이는 보방하였는데 일간 공판되리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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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4년 2월 26일자
 

완화궁 사기사건(完和宮 詐欺事建)의 징역(懲役)과 불복(不服)

완화궁 무인이하의 징역, 모두 불복하고 공소를 해

<매일신보> 1914년 2월 26일자

이미 게재한 바 경성 중부 박동 십이통 십호, 지금 이태왕전하의 제일왕자되는 고완화군(完和君)의 생모되는 이귀인(李貴人)과 경성 중부 궁동(宮洞) 칠십일통 일호 여관 한갑순(韓甲順)과 서부 약현(藥峴)사는 김항기(金恒基), 경성 본정 일정목 삼십오번호에서 양복잡화상 하는 내지인 내전도지보(內田道之輔) 사십육세된 자 등 네명은 전기 이귀인과 공모(共謨)하고 동궁 부속재산중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일로면 속포와 동도 해남군(海南郡) 청계면 가학동과 동군 산일면(山一面) 교동과 동군 황원면(黃源面) 연당 각처에 있는 전답 합계 일백구십여석락의 전답을 일한합병할 당시 이왕직 소관(이왕직 소관)으로 되어 즉시 회계계에서 관리(管理)하던 바인데 이 전답을 빼앗기 위하여 교모한 꾀로서 마침내 이귀인은 악의를 일으켜 자기 재산으로 산 것이 분명하다고 별멸 허다한 계책을 꾸미다가 마침내 사기죄(詐欺罪)로 발각되어 이래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심사한다는 말은 이미 기재한 바어니와 그동안 동원에서 정밀히 취조한 결과로 드디어 공판(公判)을 열고 심리한 후 사기죄로 기소되야 이귀인 한갑순은 징역 팔개월에, 김항기는 징역 일년에 내전도지보는 징역 여섯달에 처하였으나 전기 피고 등은 이 판결을 불복(不服)하고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 공소(控訴)를 제기하였으므로 목하 동원에서는 엄중히 심리중이라더라.

 

출처 :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 글쓴이 : 제자리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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