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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료] 1929년 5월 30일, 덕혜옹주의 생모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별세

작성일 작성자 오월

[자료] 1929년 5월 30일, 덕혜옹주의 생모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별세

 

복녕당 양씨 장의(福寧堂 梁氏 葬儀)

내월(來月) 5일(日) 거행(擧行)

<매일신보> 1929년 6월 1일자

작○소보(昨○所報) =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생모(生母)이신 귀인 양씨(貴人 梁氏)는 삼년전(三年前)부터 유암(乳癌)으로 정양중(靜養中)이시던 바 30일 오전(午前) 6시경(時頃)부터 위독(危篤)에 함(陷)하야 마침내 동(同) 7시 영면(永眠)하셨는 바 장의(葬儀)는 내월(來月) 5일(日)로 결정(決定)하였더라.

양씨(梁氏)는 명치(明治) 15년(즉 1882년) 경성(京城)에서 탄생(誕生), 동(同) 38년 창덕궁(昌德宮)에 입(入)하야 덕수궁세수간 나인(德壽宮洗手間 內人)으로 출사(出仕), 대정 원년(大正 元年) 4월 복녕당호피사(福寧堂號被賜), 귀인대우(貴人待遇)를 수(受)하였고 동년(同年) 5월 덕혜옹주(德惠翁主)를 분만(分娩)하셨다. [사진(寫眞)은 최근(最近)의 양씨(梁氏)]

 

덕혜옹주 귀성(德惠翁主 歸城), 2일(日) 경성착어(京城着御)

<매일신보> 1929년 6월 1일자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오전 7시 양씨서거(梁氏逝去)와 동시(同時)에 이왕정하(李王殿下)를 비롯하여 동경(東京)에 재학중(在學中)이신 덕혜옹주(德惠翁主) 기타(其他)에 전보(電報)로써 상보(上報)하였는데 덕혜옹주(德惠翁主)는 31일 오전 9시반(時半) 동경역발 급행열차(東京驛發 急行列車)로 나카가와 어용계(中川 御用係) 외 2명과 같이 출발(出發)하사 도중(途中) 출영(出迎)한 스미나가 여사(住永女史) 엄사무관(嚴事務官)을 배종(陪從)하시고 2일(日) 조(朝) 경성(京城)으로 착어(着御)하실 예정(豫定)인 바 장의(葬儀)는 5일(日)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에서 집행(執行)할 터이며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高陽郡 崇仁面 月谷里) 역대(歷代)의 묘소(墓所)에 집장(執葬)할 터인 바 장의차반(葬儀次班)과 위원장(委員長) 등은 추후 결정(追後 決定)되라라더라.

 

덕혜옹주 생모(德惠翁主 生母), 복녕당 별세(福寧堂 別世)

작일 자택에서

<동아일보> 1929년 5월 31일자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생모인 복녕당(福寧堂)은 저간 노환으로 신음하다가 작30일 오전 일곱시에 계동자택에서 별세하였다는데 덕혜옹주께서는 급거 귀경하시리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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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9년 6월 1일자
 

만리외 학창(萬里外 學窓)에서

비보(悲報) 받은 덕혜옹주(德惠翁主)

31일에 동경을 출발

묘지(墓地)는 숭인면 월곡리(崇仁面 月谷里)

<동아일보> 1929년 6월 1일자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생모인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의 서거는 작지에 보도한 바어니와 양씨의 병은 유암(乳癌)으로 심장마비 를 일으킨 것이라 한다. 복녕당은 명치 38년(즉 1905년) 3월 10일에 덕수궁(德壽宮)의 나인으로 들어가 고종께 봉시하야 대정 원년(즉 1912년) 4월 9일에 복녕당의 칭호가 내리어 귀인(貴人)이 되었는 바 이 해에 덕혜옹주를 낳았는데 금년 48세이며 묘지는 시외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高陽郡 崇仁面 月谷里)이라 하며 만리학창에서 모당의 부음을 받은 덕혜옹주께서는 즉시 31일 오전 아홉시에 어용괘(御用掛) 등을 데리시고 동경을 떠나시어 귀경 도중에 계신 중인데 한(韓)이왕직장관은 수원(水原)까지 엄(嚴)사무관은 부산(釜山)까지 출영하리라더라. (사진은 재세시 복녕당 근영)

 

복녕당(福寧堂)의 서거(逝去)와 옹주복상문제(翁州服喪問題)

제복만 잠깐 입고 참례한다

어친구신간 물의분분(御親舊臣間 物義紛紛) 

<동아일보> 1929년 6월 2일자

복녕당 양귀인(福寧堂 梁貴人)의 장의는 오는 5일 오전 아홉시에 자택인 계동(桂洞) 133번지에서 발인하야 오후 2시에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高陽郡 崇仁面 月谷里) 묘지에 안장할 터이라 한다. 복녕당아기시는 금 2일 오전 일곱시 삼십분에 경성역에 도착하야 즉시 창덕궁 낙석재(昌德宮 樂善齋)로 듭시어 대비전하께 배알한 후 오후 한시에 거행하는성복에 참렬하였다가는 발인할 때에만 배렬할 예정으로 되어 있는데 덕혜옹주의 복상에 대하야 일반구신, 어친척 사이와 이왕직의 견해가 달라 이로말미암아 적지 않은 분규를 보게 될 염려가 있다는 것은 옛날 같아서는 의례히 삼년복상을 하여야 되는 법인데 궁내성에서 제정한 왕공가규범(王公家規範)에 의지하면 복녕당은 귀족이 아니오 덕혜옹주는 왕공족이므로 복상할 수가 없이 되어 있으므로 상복도 못입으시고 오직 발인하는 날 제복을 잠깐 입음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므로 비로소 문제가 일어나는 것인데 혹 덕혜옹주께서 애통하시는 지정이 지극하야 사사로이 상복을 하신다더라도 공식에는 입을 수가 없이 되겠으므로 모자간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냐는 것인데 이전 엄비(嚴妃)가 돌아가시었을 때에 현 이왕전하께서는 9개월간 복상하신 전례가 있다더라.

문제초점(問題焦點)은 왕공가규범(王公家規範)

덕혜옹주의 어생모되시는 이가 돌아가신데 복상을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왕공가규범을 보면 그것도 해석할 탓에 따라 복상할 수도 있겠다고 믿을만한 조문이 있나니 왕공가규범 제186조에

    부모(父母), 부(夫)의 상(喪)은 1년으로 함

이라는 조문이 있으므로 당연히 일년복상할 수가 있으며 또한 114조에

    서자(庶子)는 모방(母方)에만 친자간(親子間)에 한(限)하야 차(此)를 친족(親族)으로 함

이라는 조문이 있으므로 친족도되고 어머니도 되므로 당연히 일년복상을 할 수 잇으니라고 생각하나 궁내성 급 이왕직 편에서는 동규범 193조

    왕공족(王公族)은 황족왕족공족조선귀족(皇族王族公族朝鮮貴族)이 아닌 친족(親族)을 위(爲)하야 상(喪)을 복(服)치 않음

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복녕당이 친족에 해당하나 귀족이 아니므로 복상치 못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해결될는지 상당히 주목되는 바이더라.

 

추억(追憶)의 정(情) 깊은 관물헌(觀物軒)

덕혜옹주(德惠翁主) 체성중(滯城中) 숙소(宿所)로

<매일신보> 1929년 6월 2일자

2일 오전 7시 나카가와 어용괘(中川 御用掛) 등을 배종(陪從)하시고 경성역(京城驛)에 착어(着御)하실 덕혜옹주(德惠翁主)는 이왕직(李王職)의 자동차(自動車)로 창덕궁 관물헌(昌德宮 觀物軒)에 입(入)하실 터이라는데 관물헌(觀物軒)은 고이왕전하 어재세시(故李王殿下 御在世時)에 양씨(梁氏)와 덕혜옹주(德惠翁主)께서 기거(起居)하시던 추억(追憶)깊은 곳이라 한다.

 

천담복(淺淡服)으로 참전(參典), 덕혜옹주 애동(德惠翁州 哀동)

한분 어머니마저 가셨다, 근시자(近侍者)도 함루오열(含淚嗚咽)

<동아일보> 1929년 6월 3일자

어머님의 부음을 받으시고 슬픔에 싸여 귀경하시는 덕혜옹주(德惠翁主)께서는 작 2일 오전 일곱시에 영등포(永登浦)까지 출영한 한(韓)장관 등을 대동하시고 경성역에 도착하시었는데 역두에는 이왕직 고등관이며 귀족 어친척 등 다수가 봉영하였다. 옹주는 검은 양장에 애통에 여위신 몸을 싸시고 자동차로 창덕궁에 듭시어 이전 어머님이 계시던 관물헌(觀物軒)에서 잠깐 쉬이신 후 즉시 낙선재(樂善齋)로 대비전하께 배알하고 천담복(淺淡服)을 바꾸어 입스신 후 열두시반에 계동 빈소로 가시어 새로 한시에 거행하는 성복전에 참렬하시었는데 오직 한분밖에 아니계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 유해 앞에 비상히 애통하시는 양은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더라. (슬픔에 싸이신 덕혜옹주)

 

복상(服喪)도 못하고 귀동(歸東)하실 옹주(翁主)

<동아일보> 1929년 6월 4일자

덕혜옹주(德惠翁主)의 복상문제가 조선고유의 습관과 왕공가규범이 배치되는 바가 있어 귀족측에서 물론이 분분하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재래의 습관이 어떻든지간에 한번 왕공가규범이 실시된 이상에는 위반할 수가 없다 하야 공식복상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며 이와 동시에 상주는 고양귀인의 동생되는 양모(梁某)가 되리라는데 덕혜옹주는 오는 7일이나 8일경에 동경으로 다시 행차하시라라더라.

 

양귀인장식(梁貴人葬式)

<동아일보> 1929년 6월 4일자

복녕당 양귀인(梁貴人)의 장식은 순조선식으로 행할 터이므로 향화(香華)의 공진은 일체로 사절하기로 되었다 하며 덕혜옹주께 조의를 표하고자 하면 창덕궁내 보춘정(報春亭)으로 사후함이 좋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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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9년 6월 6일자
 

양귀인 장의(梁貴人 葬儀)

비애(悲哀) 새로운 옹주(翁州)

<동아일보> 1929년 6월 6일자

귀인 양씨(梁氏)의 장례는 예정대로 작 5일 오전 아홉시에 계동(桂洞) 자택으로부터 발인하였는데 덕혜옹주께서는 천담복으로 눈물을 머금으시고 중문까지 영영히 떠나가는 어머님의 유해를 저송하시었다. 장의반차는 선두에 순사 이기(騎)가 서고 망거(望거) 곡비(哭婢)를 비롯하여 혼교(魂轎) 대소여 등 순조선식의 반차이었는데 구경하는 사람은 계동으로부터 경운동 재동(齋洞) 근방까지 대잡답을 이루었더라.

 

복녕당 양귀인(福寧堂 梁貴人) 장의(葬儀)

5일 오전(午前) 8시반에 발인(發靷)

상복(상복) 입으신 덕혜옹주(德惠翁主), 눈물로 영여(靈轝)를 봉송(奉送)

<매일신보> 1929년 6월 6일자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생모(生母)이신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의 장의(葬儀)는 5일 오전 8시 30분부터 장엄(壯嚴)히 집행(執行)되었다. 오전 8시 30분에 계동자택(桂洞自宅)에서 출관(出棺)하사 동(同) 9시에 교동대로(校洞大路)를 지나 종로통(鍾路通)으로 동대문(東大門)을 지나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高陽郡 崇仁面 月谷里) 묘소(墓所)에 도착(到着)하야 오후(午後) 2시에 하관(下棺)하였는데 이왕직(李王職)에서는 박 예식과장(朴 禮式課長), 스에마츠 서무과장(末松 庶務課長) 기타가 배참(拜參)하였으며 덕혜옹주(德惠翁主)께서는 상복(喪服)을 입으시고 계동댁(桂洞宅)에 나오시와 영여(靈轝)를 봉송(奉送)하시었다더라. [사진] 고양귀인(故梁貴人)의 장의(葬儀), 상(上)은 비수(悲愁)에 잠기신 덕혜옹주, 하(下)는 영여(靈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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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외일보> 1929년 6월 6일자

 

양귀인장의반차(梁貴人葬儀班次)

영여 계동입구 발인(靈轝 桂洞入口 發靷)

<중외일보> 1929년 6월 6일자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장의는 작보한 바와 같이 5일 오전 아홉시에 발인하였는데 영여(靈轝)가 계동어구를 떠난 후 반차는 당초의 예정을 변경하여 교동(校洞) 큰길을 거쳐 교동병문에서 동으로 꺽기어 일로 월곡리(月谷里) 묘소로 향하여 행진하였는 바 이날 이른 아침부터 반차행진하는 좌우 연로에는 수많은 부녀가 물밀듯 이르러 근래에 드물게 보는 장관을 이루었으며 연로소관 각경찰서의 정사복 경관과 기마순사(騎馬巡査)대의 엄중한 경계도 있었는데 반우(返虞)는 당일 오후에 거행되었다.

옹주애통지극(翁主哀痛至極)

이날 어생모의 영구를 영별하시는 덕혜옹주(德惠翁主)께서는 아침 일찍이 관물헌으로부터 자동차로 계동 양귀인 관저에 행차하여 출관(出棺)할 때까지 머무러시며 가장 애통하셨음은 뫼신 자로 하여금 오히려 황송케 하였다는 바 영여가 계동 어구를 출발할 때에 자동차중에서 곡송하시고 창덕궁으로 돌아가셨더라.

 

덕혜옹주(德惠翁主), 성묘후 도동(省墓後 渡東)

<동아일보> 1929년 6월 9일자

덕혜옹주께서는 7일 오후 3시 자동차로 월곡리(月谷里)에 행차하사 생모이신 귀인양씨(貴人梁氏)의 묘소에 최후의 참배를 합시고 동 4시경에 귀궁하셨다가 동야 10시 20분 열차로 경성역발로 도동하셨더라.

 

덕혜옹주 환차(德惠翁主 還次), 어생모 일년제로

<중외일보> 1930년 5월 16일자

덕혜옹주(德惠翁主)게서는 어생모(御生母)의 일년제(一年祭)에 참렬하기 위하야 16일 오후 아홉시 사십분 동경역발(東京驛發) 열차로 귀경하실 터인 바 착경하실 일자는 오는 23일이나 되시리라더라.

 

(정리 : 2007.6.18,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첨부자료 1]


▲ <매일신보> 1912년 5월 28일자

 

덕수궁(德壽宮)의 왕녀(王女) 탄생(誕生)

<매일신보> 1912년 5월 28일자

덕수궁에 근시하는 여관 양씨는 태후(胎候)가 있어 순산기일이 머지 아니하다는 말은 이미 기재하였거니와 삼작 이십오일 오후 삼시경부터 순산할 징조가 있으매 조산부양성소(助産部養成所) 주임산파 삼지학대(三池鶴代, 미이케 츠루요)씨가 학생 일명을 대동하고 덕수궁에 나아가서 제반 순산절차를 준비하는 중 동 칠시 삼십분에 왕녀(王女)를 탄생하였으며 동시에 조수로 입시한 산파 일명이 있었고 순산한 후에 진찰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의원에서 부인의사 일명을 파송하였으며 재작일에는 각귀족 동부인 제씨가 덕수궁에 나아가 이태왕전하께 알현하고 축하하였다더라.

 

엄비연사(嚴妃練祀)의 중지(中止)

엄비의 소기를 중지

<매일신보> 1912년 5월 28일자

별항에 기재한 바와 같이 덕수궁에 근시하는 여관 양씨가 순산함을 인하여 재작 이십육일 오후 팔시부터 거행하려던 고엄비(故嚴妃)의 소기제사는 중지하였으며 창덕궁 이왕 왕비 양전하께서 재작일 덕수궁에 행계하시려다가 또한 정지하셨다더라.

 

왕녀(王女)의 양칠일(兩七日)

왕녀의 두칠일

<매일신보> 1912년 6월 7일자

덕수궁에 근시하는 양씨가 거월 이십오일에 왕녀를 탄생한 일은 모두 아는 바어니와 명일은 탄생 제이주일인데 용모가 아름답고 기골이 건강하여 기이함이 비범한 고로 이태왕 전하께서는 사람하심을 마지 아니하신다더라.

 

[첨부자료 2]


▲ <동아일보> 1921년 5월 9일자
 

아기씨(阿只氏)는 '덕혜(德惠)'로 명명(命名)

6일 이왕직에서 협의한 결과 결정

<동아일보> 1921년 5월 9일자

창덕궁 집희전(緝熙殿) 아기씨께서는 아직까지 무슨 칭호가 없으시사 다만 보통으로 '아기씨'라고만 불러왔으나 차차 연세도 점잖하여 가시고 학교편에서 부르는데도 무슨 이름이 없으시면 좀 비편할 형편에 이르시었으므로 이 기회를 타서 무슨 칭호가 있는 것이 좋겠다 하여 지난 6일에 창덕궁 인전전 동행각(仁政殿 東行閣)에서 이재완(李載完), 윤덕영(尹德榮), 이재곤(李載昆), 이지용(李址鎔), 윤용구(尹用求)씨 등 어친척이 모이어 회의를 한 결과 마침내 이왕전하의 결재를 받들어 덕혜(德惠) 두 자로써 아기씨의 이름을 삼기로 내정이 되어 이미 이왕직장관으로부터 궁내성(宮內省)에 공식으로 상신(上申)을 하였다는데 다만 덕혜(德惠) 두 자 아래에 어떠한 존칭사를 붙일는지 이 점에는 다만 궁내성의 처분만 기다릴 뿐인데 옹주(翁主)라는 존칭어는 붙이게 될 지 아니될 지 아직 결정이 없다고 금촌(今村) 이왕직 서무과장은 말하더라.

 

[첨부자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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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25년 8월 23일자
 

덕혜옹주 생모(德惠翁主 生母) 양씨 상경(梁氏 上京)

<매일신보> 1925년 8월 19일

덕혜희(德惠姬)의 생모(生母)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는 17일 오후 8시반 동경역착(東京驛着)으로 상경(上京)하야 본목(本木, 모토기)의 이왕가어용저(李王家御用邸)에 입(入)하였는데 희(姬)는 목하(目下) 형군(兄君) 이왕세자전하(李王世子殿下)와 이향보(伊香保)의 어용저(御用邸)에 피서중(避暑中)이므로 18일 동지(同地)에 왕(往)하야 대면(對面)할 예정(豫定)이라더라. [동경전(東京電)]

 

덕혜옹주 어생모

<매일신보> 1925년 8월 23일자

[사진설명] 양씨(梁氏)는 멀리 일본 이양보(伊香保, 이카호)에 피서중인 덕혜옹주를 찾아 17일 동경에 이르렀었다. 사진은 동경역에 도착한 양씨.

 

출처 :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 글쓴이 : 제자리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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