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이 동서양의 위인이나 고전 명화를 차용하여 작업을 한 지도 어언 이십 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니체와 장자, 바흐, 프로이트, 노자, 말러, 혜원의 여인상 등등을 빌려 한 화면에 공존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1990년대 초반이니까, 소위 패러디와 인용 등의 제작기법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하나의 분명한 창작방법론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이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이 무렵에 들어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매체 면에서도 사진, 설치, 입체, 퍼포먼스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확산돼 나갔다. 그가 199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에 걸쳐 문제작가의 한 사람으로 부상되기까지에는 매체나 재료, 그리고 창작방법론을 둘러싼 첨예한 작가의식이 한몫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권여현 하면 무엇보다 하나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부단히 도전하여 거기에 상응하는 작업적 성과를 이룩한 작가로 기억되는 이유도 이러한 작가의식의 치열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는 그러한 의식의 치열성을 스케일이 큰 사진작업, 즉 분장시리즈와 최근 들어서 특히 주력하고 있는 집단적 퍼포먼스를 통해 분출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투철한 아방가르드 의식과 실험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최근에 더 컬럼스갤러리에서 발표한 <마법풀기>연작은 2008년에 같은 장소에서 발표한 <마법의 숲>연작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볼 때 이 두 연작의 차이는 후자가 루소의 작품을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게 반영한 반면, 전자는 보다 복잡한 복선을 깔고 전개된다는 사실에 있다. 말하자면 원작의 반영 정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작품의 내용이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작품을 바라봐야 비로소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권여현의 근작들은 <마법의 숲>연작보다 작가의 분방한 상상력을 더욱 잘 담아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원시림이 지닌 싱싱한 비의성의 표출이다. 숲의 싱싱한 느낌을 담아내되 루소의 내음을 가능한한 많이 소거하는 것, 즉 다시 말해서 루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마법풀기>연작을 제작할 당시 권여현의 의식을 점유한 숙제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권여현의 루소로부터의 이탈은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은 복잡한 장치를 통해 시도된다. 그러한 장치들이란 다름 아닌 화면을 어지럽히고 있는 나무와 칡덩쿨, 나무울타리, 식물 등등이거니와, 그것들의 비의의 장소인 숲에 작가가 교묘히 설치해놓은 다양한 상징과 도상들이 숨기에 적격인 장소이다. 그래서 권여현의 근작들에 대한 이해는 일종의 암호해독과도 같은 복잡한 풀이의 과정이 요구된다. 그것은 또한 고전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즉 그의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서양 미술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출몰하는 것이 바로 동서양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가기다. 이미 20여 년 전에 그가 시도한 바 있는 융합의 방법론이 근작을 통해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에 권여현의 언어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주제에 대한 치열한 의식은 그를 여전히 문제작가의 중심에 서도록 고삐를 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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