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涼伎 (서량기)/ 白居易 (백거이)ㅡ서량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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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감상

西涼伎 (서량기)/ 白居易 (백거이)ㅡ서량 놀이

방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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假面胡人假獅子 刻木為頭絲作尾

金鍍眼睛銀貼齒 刻木為頭絲作尾



西涼伎 (서량기) / 白居易 (백거이)




假面胡人假獅子 (가면호인가사자) 

가면 쓴 오랑캐, 가면 쓴 사나이



刻木為頭絲作尾 (각목위두사작미

나무 깎아 머리 삼고, 실로 꼬리 만들었네.


金鍍眼睛銀貼齒 (금도안정은첩치) 

금으로 눈알 칠하고 은으로 이빨 붙이고


奮迅毛衣擺雙耳 (분신모의파쌍이)

털옷을 빨리 털고 두 귀를 흔들어대네.


如從流沙來萬裡 (여종류사래만리)

마치 유사지방에서 만리나 멀리서 온 듯이


紫髯深目兩胡兒 (자염심목량호아)

자주빛 수염에 깊은 눈알을 한 두 오랑캐 놈


鼓舞跳粱前致辭 (고무도량전치사)

북치며 날뛰듯 춤추고서 앞으로 나와 말하네,


應似涼州未陷日 (응사량주미함일)

아주 꼭 같도다, 양주가 함락되기 전 날


安西都護進來時 (안서도호진래시) 

안서 도호가 진상하던 때와 같아요.


須臾운得新消息 (수유운득신소식)

잠시 후에 새소식을 전하기를


安西路絕歸不得 (안서로절귀불득) 

안서 길은 끊어져 돌아가지 못한다네요 하니


泣向獅子涕雙垂 (읍향사자체쌍수) 

울면서 사자를 향하는데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네.


涼州陷沒知不知 (량주함몰지불지)

양주가 함락된 것 아느냐 모르느냐


獅子回頭向西望 (사자회두향서망)

사자는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며


哀吼一聲觀者悲 (애후일성관자비)

서럽게 한 소리로 울부짖으니 보는 사람도 슬퍼하네.



貞元邊將愛此曲 (정원변장애차곡)

정원 연간 국경의 장군들은 이 노래를 좋아하여


醉坐笑看看不足 (취좌소간간불족)

취하여 앉아 웃으면서 보고 또 보고 하였다네...^^



享賓犒士宴三軍 (향빈호사연삼군) 

손님과 군사를 청하여 삼군에게 잔치를 벌이니


獅子胡兒長在目 (사자호아장재목) 

사자와 오량캐 언제나 눈 앞에 보인다네.



有一征夫年七十 (유일정부년칠십)

나이 칠십 된 늙고 병사 나타나


見弄涼州低面泣 (견롱량주저면읍)

서량놀이를 보고 얼굴을 숙이고 울었다네.


泣罷斂手白將軍 (읍파렴수백장군) 

울고 나서 손을 잡고 장군에게 이뢰기를


主憂臣辱昔所聞 (주우신욕석소문)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치욕이라 전에 저는 들었습니다.


自從天寶兵戈起 (자종천보병과기) 

천보연간부터 전쟁이 일어나


犬戎日夜吞西鄙 (견융일야탄서비) 

오량캐들이 밤낮으로 서부 구석진 곳을 병탄하여


涼州陷來四十年 (량주함래사십년)

양주가 함락된 지 이미 사십 년이고


河隴侵將七千裡 (하롱침장칠천리)

하롱이 침략당한 것이 칠천 리나 됩니다.


平時安西萬裡疆 (평시안서만리강) 

평화롭던 시절 안서는 만 리나 되는 우리의 영토


今日邊防在鳳翔 (금일변방재봉상) 

지금은 국경지바이 봉상이 되어있습니다.


緣邊空屯十萬卒 (연변공둔십만졸) 

변경에 헛되이 주둔한 십만 병사들


飽食溫衣閒過日(포식온의한과일)

배불리 머고 따뜻이 입으며 한가로이 세월만 보냅니다.


遺民腸斷在涼州 (유민장단재량주) 

단장의 고통 받는 백성은 지금 양주에 버려져 있는데도

 
將卒相看無意收 (장졸상간무의수)

장군과 병사들은 보기만 하고 수복할 뜻이 없습니다.


天子每思長痛惜 (천자매사장통석)

천자께서 생각 때마다 오랫동안 괴롭고 안타깝게 여기시니


將軍欲說合慚羞 (장군욕설합참수)

장군께서 말씀 오리고 싶으나 부끄러울 것입니다.


奈何仍看西涼伎 (내하잉간서량기) 

어찌하여 그냥 서량의 놀이만 구경하시면서


取笑資歡無所愧 (취소자환무소괴) 

웃고 기뻐하기만 하시니 부끄러움도 없습니까.


縱無智力未能收 (종무지력미능수)

설령 지혜와 능력이 없어 수복하지 못하시더라도


忍取西涼弄為戲 (인취서량롱위희) 

차마 서량놀이를 하여 장난삼아 놀이로 할 수 있습니까...





백거이의 생애


백거이(白居易)의 자는 낙천(樂天),

 만년에는 호를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그의 이름 "거이(居易)"는

≪중용(中庸)≫의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서서 천명을 기다린다

(君子居易以俟命)"는 말에서 취했고,


그의 자 "낙천(樂天)"은

 ≪역(易)·계사(繫辭)≫의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故不憂)"는 말에서 취했다.


천명에 순응하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행하는(順天與素位而行) 유가의 처세사상이

그의 이름과 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당(唐) 대종(代宗) 대력(大曆) 7년(722) 정월 20일에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縣)에서 계당(季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舊唐書)≫ 권166 「백거이전(白居易傳)」, ≪신당서(新唐書)≫ 권119 「백거이전」,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나타나 있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과 송대(宋代) 진진손(陳振孫)의

 ≪백공문연보(白公文年譜)≫를 통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백거이의 본관은 원래 태원(太原)이었는데,

그의 6대 조부 건(建)이 태원에서 한성(韓城)으로 이주하였으며,

증조부 온(溫)이

한성에서 하규로 이주하였다.


그의 조부는 만년에 하남(河南) 공현(鞏縣)의 현령으로 퇴직한 후에 형양(滎陽)의 경치를 좋아하여 정주 신정현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백거이가 출생한 곳은 신정현 동곽리(東郭里)인데, 신정은 바로 형양군에 속하며 옛날 정(鄭)나라 땅이었다.


백거이의 집안은 비록 명문귀족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학문을 하며 관리를 지내온 학자집안이었다.

 

그의 조부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와 산조(酸棗), 공현(鞏縣)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그의 부친은 소산현위(蕭山縣尉), 송주사호참군(宋州司戶參軍), 팽성(彭城) 현령을 역임하였다.


그의 자술에서, "가련하였다. 소년시절에 가세가 빈천하였으니!

(≪白氏文集≫ 권2 <悲哉行 >: 可憐哉, 少年時家境適在貧賤中!)"라고 탄식한 것을 보면,

그가 출생할 당시에 집안 상황은 상당히 곤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출생한지 6~7개월만에

비록 말은 못하였지만

"무(無)"자와 "지(之)"자를 구별할 수 있었으며,

 5~6세 때에 시 짓는 법을 배우고,

 9세에 성운을 알았으며,

 15~16세에 진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정원(貞元) 3년(16세)에

그는 장안(長安)에 가서 대시인 고황(顧況)의

 현실주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지도를 받고,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이라는 시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정원 10년(23세)에 그의 부친이 양주(襄州)에서 세상을 떠난 후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원 16년(29세)에 비로소 고영(高?)이 주관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하였다.


그후 그는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32세)을 거쳐, 원화(元和) 원년(35세)에 원진(元?)과 함께 제책(制策) 시험에 응시, 4등으로 합격하여(원진은 3등) 주질현위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 12월에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원화 2년(36세, 807)에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집현교리(集賢校理),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4월에는 황제를 가까이 모시면서 백관을 탄핵하고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는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어 신하된 임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강주(江州)로 좌천되기 전까지

 그는 어려운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곤궁에 처해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고 조정의 부패를 폭로하는 풍유시(諷諭詩)를 많이 썼다.

 

전술한 바와 같이 문인으로서 그는 단번에 고위관직에 올라

영화로운 지위에 이를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경력은

문인의 생애 중에서 상당히 보기드문 경우에 속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가 소년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좌절하지 않고 각고의 인내로써 노력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새로운 인사제도로

 그처럼 빈천한 신분 출신의 인사들도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새로운 인사제도는

구관료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어

 신구 관료 간에 빈번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백거이는 풍유시로 인한 구관료들의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무원형(武元衡) 사건으로 간관(諫官) 보다 먼저 상소했다는 것 등을 이유로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유명한 비파행(琵琶行)은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그후 충주자사(忠州刺史, 원화 13년, 47세),

상서사문원외랑(尙書司門員外郞, 원화 15년 49세),

 조산대부(朝散大夫, 장경 원년, 50세),

항주자사(杭州刺史, 장경 2년, 51세),

소주자사(蘇州刺史, 장경 5년, 54세),

 비서감(秘書監, 대화 원년, 57세),

형부시랑(刑部侍郞, 대화 2년, 57세),

태자소부(太子少傅, 대화 9년, 64세) 등을 역임하다가,

 회창(會昌) 2년 71세 때 병으로 태자소부를 사임하고

그의 생애 최고 벼슬인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오른 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그는 나이의 노쇠와 정치적 실망,

 불교의 영향 등으로 은둔생활을 하다가

 개성(開城) 4년(68세)


겨울에 중풍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향산사(香山寺)의 승려인 여만대사(如滿大師)와

 향화사(香火寺)를 짓고

스스로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이듬해 목종(穆宗) 회창 6년(844) 8월에 중풍이 재발하여 낙양(洛陽) 이도리(履道里)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다가 시주(詩酒)와 탄금(彈琴), 참선으로 일생을 마치니... 그의 나이 향년 75세였다.

 


La Ragazza De Bube / Cario Rustichelli. "그이가 나올 날이 몇 년 안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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