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나도 한순간이라도 까닥 잘못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런 전쟁 고아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잠시 눈시울이 젖어온다.....


(주검으로 변한 엄마품에 영문도 모르고 우는 아이들이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 칩십이 넘었다

누나인듯한 아무 죄없는 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우는 모습을 보면 또 눈물이 흐른다 ; 자료사진)


71...

피난을 하기 시작한지 7일째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고 아버지와 우리는 점점 가파른 산길을 돌아가며

청주쪽으로 행군을 계속 하였다.


같이 가던 많던 피난민들은 점점 자기들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바꿔 헤어지기 시작 했다.

우리 앞에는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많은 사체 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 했고

그 사체들은 대부분 피난민들이었다.


너나 나나 살기 위하여 피난을 가야하는 처지라  멈춰서서 사체 수습도 해줄수 없었던 피난길,

사체를 수습하자고 말 한마디 하는 사람도 없는 안타깝고 처절한 주검들............


동족 상잔의 원흉 살인마 김일성 6 25오전 4를 기하여

38선 이남의 불법 남침을 자행하고 무차별 학살한 참혹한 희생이었다.

어쩔수 없었던 희생이 아니라 그렇게 계획된 학살을 자행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샛길을  엄청난 모기떼에게 뜯기면서  어떤 작은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시체몇구가 늘어져 있는 틈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며 꿈틀 거리는 피범벅이된 한사람을 보았다.


그의 양손에는 말라붙은 검붉은 피딱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고 그 양손은 자기의 옆구리로

삐져나온 창자를 뱃속으로 집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모기는 윙윙거리며 그의 쏟아져 나온 내장에 붙어 떨어지지않았고 이미 부풀어 오른 창자는

그의 옆구리에서 자꾸 흘어 나오며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의 두다리는 끊어지고 쪼개져

너덜거렸고 두눈은 검은 피로 말라붙은체 실눈을 뜨고 있으나  

사람이 근처에 다가가도 모르고 그짖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사람은 일행들과 폭탄의 파편에 맞았으나 즉사하지 않고 저렇게 숨이 붙어 있었고

이미 피도 많이 흘렸을뿐 아니라 몇시간을 땅에 뒹굴었기에 내장은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어른들 몇이 의논 하더니 그에게 말을 시켜본다.

그러나 그는 고막도 터져 듣지 못하는지 응답이 없고 그의 귀에도 피가차서 굳어 있었다


" 곧 죽을건데 얼마나 괴로워요? 숨을 끊어(죽인다는뜻)줄까요? 그냥 갈까요? "

하고 물으나 못 알아 듣는지 창자만 밀어 넣으며 ~~ 신음 소리만 낸다.

어떤 아저씨가 물을 한바가지 그의 입에다 대주며 마시게 해주면서

" 형씨 잘 가시오 "

하며 이쪽을 돌아보며 말을 있는데

" 피를 많이 흘린 사람한테 물을 먹이면 편안하게 빨리 죽는 답니다 "

한다.


얼마나 물을 마시고 싶었을까? 얼마나 고통 스러웠을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도움을 줄수 있는 손길도 없고 도움을 받을수도 없는 처지를

본인은 알고나 있었을까죽는다는 공포감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때문에 살기위하여 쏟아져 흘러내린 창자를 잡아 다시 넣으려고 정신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리라...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한바가지 물을 시원하게 마시는듯 목으로 넘기더니 그사람은 정말로 

편안한듯 바로 누운체로 있다가

잠시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잠자듯이 미동도 않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갔다.

조치원을 향하고 청주를 향하여 보은을 향하여...


5. 피반령 고개


72

조치원에 들어왔다기찻길(경부선)옆 숲길을 따라  계속 가고 있었다,

피난민중 몇가족은 청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같이 가게 되었다


청주는 50(20km)정도만 더가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청주에서 직접 보은으로 안가고 피발령(피반령)고개를 넘어 회북면(회인면)으로

간다며 어른들끼리 말을 통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재촉했다.


이제 한나절만 더가면 그들의 고향인 청주 또는 보은,상주, 미원으로  뿔뿔히 헤어지겠지

그러다 공산당 놈들이 청주까지 처들어오면 또 피난을 가거나

아니면 고향을 지킨다고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내오른쪽 귀에서는 투명한 갈색 진물이 계속 흘러나와  엄마가 까맣게 바랜

이불솜을 뜯어 성냥개비만한 막대로 솜을 감아 닦아준후 완두콩만하게

솜을 뭉쳐 막아주며 그렇게 버티며 지나가고 있었다.


" 문규야 귀가 아프지는 않지? "

" 응 귀가 진물만 나오구 간지럽기만 해~ "    

신기한것은 귀에서 진물이 나올땐 그전에 몸살감기가 들어 참지 못할 통증이

있어야 함에도 피난길에 아직 그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나도 엄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행렬은 어느사이 기찻길에서 멀어지며 큰 신작로를 통하여 청주로 부지런히

들어가며  사방으로 흩어 지기 시작 했다.


청주는 피난민도 별로 없고 가끔 군인들이 우리가 온길의 반대방향으로 줄을지어

올라가는 모습도 보이고 장교인듯한 군인들이 먼지를 날리며 타고가는 찌푸차도 있었다.


나는 그 찌푸차를 보면서  힘센 우리 아버지는 맘만 먹으면 군인 몇명은 단숨에 때려주고

저차를 뺏을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말했다.


" 아버지 저 찌푸차 우리가 타고 가면 좋겠다, 엄마 그치? "

아버지가 끝까지 힘들게 구르마를 끌고 가는것이 나는 정말로 불만이었었다

뒤에 따라오는 다름 사람들도 웃고 있었다


참으로 황당한 꼬맹이가 아니던가

아버지와 엄마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지금은 기억이 없지만  나는 충분히 이런 말을 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별났다고 했다.


(국군은 북진하고 피난민은 남으로 남으로 ; 자료사진)



시간은 흘러 가고  우리의 피난도 시간이 갈수록 고향과 가까워 지고 있다.

몸은 지쳐서 배는 허기지고 다리는 힘이없고 발바닥엔 물집이 여기 저기

생겨 아물지 않고 재발하고 있었으나

고향이 가까워 올수록 고난한 피난길이지만 살수 있다는 희망에 묵묵히 구르마를

끌고가는 아버지와 엄마의 모습은 이세상 어떤 모습보다 믿음직 하고 장엄하였다.


나는 그런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 난것을 행복해했고 자랑스러워 했다


조금은 큰 냇가(지금의 무심천)에 도착했다, 어느듯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눈앞에는 

멀리 높다랗게 여러겹으로 겹쳐있는 시커먼 산등성이가 가로 막고 있었다

저 고개가

피발령이다, 피발령 저편 회인이 아버지의 고향이라고 했다.


이밤을 쉴자리로 무심천을 건너서 평평한 자리를 잡아 거적을 깔고 앉아 엄마가

저녁끼니를 꺼내어 놓았다


오늘은 주먹밥3,감자3개 그리고 소금과 아버지가 지금 막 떠온 시냇물이다.

나는 엄마가 깍아주는 생 감자만 두개를 먹고 그자리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온몸이 흔들리고 무슨 소리가 나는것 같아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엄마와 

피발령(피반령) 고개 밑에 까지 와서  그위에서 자고있던 나를 네려 놓는 중이었다

너무 힘들어 좀쉬고 새벽에 피발령을 넘기로 하고 다시 이곳에서 멈춘 것이었다.


피발령 


피반령(皮盤嶺)이다, 청주에서 보은군 회인면으로 가는 험한 고개다.

보은에서 속리산 법주사로 가려면 구비구비 말티재를 넘게 되는데

이 피반령도 말티재 수리티재와 함께 충청북도에서 3대 험한 고갯길로 꼽히는

길로 이고개의 전설이 몇가지가 있으나 여기서는 나의 피난 이야기만 하고자 한다.


칙칙한 밤,

사실 각종 풀벌래 소리와 이상한 산울림 소리 그리고 젖어드는  한기와  적막한 공포에

우리 가족 4명만이 이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너무 무섭고 힘들었기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늡실(회인면 늘곡리)을 약 25 여리 앞두고 발길을 멈춰야 했다.


저 피반령고개 깊은 숲속에서 우리가 넘어 오기를 기다리는 죽음의 손길이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더 나가지 못하고 여기 민가의 마당 한편에 멍석을 깔고 이불을 폈다.


단숨에 가면 25(10km)정도는 아무리 언덕이라도 3~4시간이면 갈수 있는 거리.....

같이가는 일행이라도 있기만 했다면 서로 의지하며 고개를 넘어가

오늘 밤에는 이슬을 맞지않고 꿈에 그리며 힘들게 달려온 고향집에서 잠을 잘수 있으련만  

첩첩산중 오지 마을(회인면 늘곡리)을 향해 험한 피반령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가족과 살아남기 위하여 남으로 남으로 처절하게 달려온 8일간이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발바닥은 온통 짖물러 터져 여기저기 허물이 벗겨졌고

만신창이가 된 그곳은 누런 진물과 고름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붉고 고운 흙가루를 한주먹씩 주어다 그상처에 뿌리며 딱지가 빨리 앉도록

고무신을 벗고 걷기도하고, 또는 도랑물에 담그기도하며 아픔을 참고 거의 500리길,

인천에서 회인을 이렇게 걸어서 피난을 내려 온것이다


이제 날이 밝으면 저 험한 고개를 무거운 구르마를 끌고 단숨에 넘어가실 아버지와 엄마.

엄마가 이불에서 뜯어낸 솜으로 내 귀속에 고름을 닦아주는 시간에 나는 동생이

물고 있지않은 엄마의 한쪽 젖꼭지를 만지작 거리며 잠시후 잠이 들었다.




7 3 피난 9 일째날,

~산 동녘이 밝아 오기도 전에 아버지의 재촉에 아침을 끝내자 마자

우리 식구는 급히 피발령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피발령을 구비 구비 돌고 돌며 한구비 가서 한참쉬고 또한구비 돌아서 한참쉬고 하면서

구르마를 힘있게 쥐고 묵묵히 고개 꼭대기를 향하여 위로 위로 끄는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부룹뜬 두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밖으로 튀어 나올것 처럼 보였다.


메주 콩만한 땀방울은 땅에 떨어지며 튀었고

엄마 또한 뒤에서 헉헉 거리며 구르마를 미는데  버선도 신지 않은  땀에 젖은 발이

자꾸 신발에서 쏙 하고 미끄러져  나올것 같았다.


큰길이긴 하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오면 길이 막힌다는 길, 움푹,움푹 파이고

모나고 뾰족한 돌맹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것들은 얇디 얇은 고무신 바닥을 통하여 짖물러 터진 발바닥을 찌르고 박히는

심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얼굴을 찡그리고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피반령 ; 길 왼쪽으로 정상으로 오르는길 )




날이 많이 밝아지고  우리뒤로 한가족인듯한 무리들이 등짐과  머리짐을 이고 쉬엄쉬엄

우리들을 따라 올라 오고 있었다.


저들도 밤에는 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출발 하는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나가다가 잠시 쉬는중에 아버지가  숲으로 들어가더니 몇가닥 넝쿨을 걷어와

아버지의 양발에 신발과 함께 감고 엄마 발에는 동생의 귀저기를 한장 찢어서 감아주었다.

내가 물었다.


" 그거 발에 왜 하는거야? "

~ 이거 신발이 얇아 뾰족한 돌맹이가 자꾸 발을 콕콕찔러서 아프지 말라고 감는거야 "

" 그거하면 돌맹이가 안찔러? "

" 응 돌맹이가 안찔러, 그리고 찔러두 안아파 "


나는 꼬치꼬치 물으며 나도 해달라고 졸르다가 아버지한테 꿀밤을 한방 얻어 맞고는 입을 닫았다.

아직도 산꼭대기는 저기만치 가까와 지고 있는데 우리는  중턱을 넘어가고 있었고 우리의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은 안보이는것이 어디  앉아서 쉬는것 같았다.


아버지의 걸음은 엄청 빨랐다, 경사가 덜 가파른 곳에서는 내가 구르마를 밀지 않아도

엄청 잘 가고 있었다


얼마간을 그렇게 힘들게 올라 가며 조금 쉬며 물한모금 마시고,

또 잠시 올라간후 물한모금 마시기를  몇번이나 했던가?

아버지의 목구멍에서는 헉헉 거리며 숨쉴때마다 쇳소리가 나고 있었고 나와 함께

뒤에서 말없이 영차영차 하며 구르마를 밀던 엄마도 이제는 힘에 부쳤는지..

헉헉 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매마른 목안으로 있지도 입안의 침을 힘들게 넘기고


" 문규 아버지~ 너무 힘들어~ 좀 쉬었다 가요~ 더 못 가겠어요~"

하고 들리지도 않는 작은 소리를 낸다...


잠시 구르마에서 나온 아버지가 뒤로와 물을 한바가지 퍼서 엄마에게 마시게 하고

아버지도 마시고 나도 마셨다.


" 정말 고생 많았어 자기,고향이 가까우니 이제 조금만 쉬고

  내리막길이니까 자기는 구르마를 타 이제부터는 내가 혼자 끌고 갈께,

  이제 한시간이면  아버지(할아버지)와 점심을 먹을수 있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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