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간의 피난길이 여자인 엄마에게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는가 젖먹이 하나는 업고

4살박이 큰놈은 병약한 몸으로 신경써서 보살피지 않으면 쓸어지고 말 아이를 다독이며

지금까지 피난구르마를  혼자 끌고 간적도 있었고  쉼없이 끈질기게 밀고 왔다.


밤낯을 가리지 않고 한데 잠을 자며 보리죽 끼니라도 한번도 제데로 배불리

차려먹지도 못하고 묵묵히 남편하나 믿고 따라온 500여리 길이었다.

아니 이리 돌아가고 저리 피해 가고 꼬불 꼬불 600리길은 되었으리라...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중간에 이런 생각도 했었다고 했다.


차라리 여기 아무데서나 편한곳에서 발 붙이고 살자,

그리고 인민군이 오면 시키는데로 하면 죽이지는 않을 것이고 

잠도 집안에서 편히 잘수 있을 것이며 하루 따듯한 죽이라도 한끼는 먹고

살수 있지 않을까?

어찌보면 이런 피난 고생은 안해도 되는것인데 공연히 사서 고생하는것은 아닐까 ?

등등 참으로 피난을 하는것 자체가 막심한 후회로 느껴질때가 있었다고 했다.
 


드디어 피반령 꼭대기다.


(현재의 피반령 표지석


시원한 바람이 골짜기에서 불어 올라오는듯 얼굴과 목주위를 시원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말라 터진 입술은 입언저리에 침과 피가 말라 붙어 말을 하거나 움직일때마다

터져서 피가 나고 있었고 그것이 말라붙어 까만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한번 물을 마시고  감자를 하나씩 먹고는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 이제부터는 할아버지 집까지 계속 내리막길이야 15(6km)정도  남았어 빨리가면

  10 도착 하겠다 ^^*  문규야 얼마 안남았다 다시한번 힘내자 "


하며 말하는 아버지의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눈물은 아직까지 견뎌온 9일간의 감회의 눈물이었고 한가정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감격의 눈물이었다,


또한 엄마도 지난 9일간 남몰래 가슴으로 흐느꼈던 고된 피난길에 어찌 할말이 없었을까?

죽을 정도로 힘들어도 남편이 약해질까 두려워 말한마디도 내색않고 우는 모습을


누가 볼까봐 동생을 업은 포대기 허리띠로 몰래 닦아낸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까?

포대기 띠가  지금도 마르지 않고 축축했다.

지금 그포대기 허리띠로 엄마의 눈물을 닦고 있는것을 보고 있던 내가 한마디 했다.


" 아버지~ 엄마~ 다 왔다면서 왜 울어? 이젠 힘들지도 않대잔아~ 울지마~ ? "


4살배기 나로서는 그렇게 눈물 흘리던 아버지와 엄마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 했지만

70년이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그때 피반령 고개를 넘었던 생각을 하면 눈물을 흘린다.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책임을 지셨고 자식에게 한없이 헌신적 이셨던  

아버지와 엄마가 계셨기 오늘의 내가 있을수 있었다,


나는 지금 그것을 고맙게 여기며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6. 내새끼다. 내새끼란 말이다


뜨거운 7월의 햇살이 우리의 피난길을 더욱 힘들게 했다.

하늘이라도 검은 색인듯 싶으면 생각하기를

시원한 소나기라도 한줄기 쏟아져 준다면

이렇게 덥고 짜증날때는 얼마나 고마울까?


그러나 회인으로의 내리막길은  저고리와 목사이로 불어와 마주치는 바람이 너무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끄는 구르마가 너무 빨라 엄마는 구르마에

타기는 커녕 줄을 단단히 잡고 달리는 구르마의 속력을 잡아줘야 했다.


아버지는 구르마를 끄는것이 아니고 앞에서 힘들게 제동하여 버티며 방향만 잡고 있었다.

내입에서는 신난다고 흥얼흥얼 노래가 절로 나왔다^^* 


덜컹거리는 구루마가 너무 빨라 이불이며 보따리와 양은솥등이 덩달아 춤을 추며

소리를 맞춰주고 있었다.

피난길 내내 구르마가 이렇게 가볍게 달려본적이 없었다.


엄마등에 업혀있는 동생도 빠른 구르마를 쫓아 뛰는 엄마 등에서

무엇이 그리 좋은지 옹아리를 하며 까르륵 대고 웃는다.


구르마가 엄청 빨랐지만 아버지는 아슬 아슬한 꾸부렁 고갯길을 요리조리 운전을 하며 가볍게

덜컹거리며 달려 내려갔다.

그렇게 10분 쯤을 쉬지 않고 달려 나갔고,

(피반령 회인으로 가는 내리막길)


엄마는 뒤에서 그냥 왼발 오른발을 조금씩 들기만해도 자동으로 뛰어졌기에 지쳐 감각이 없던

두 다리였지만 가볍게 고개 아래까지 내려 왔다,


올라올때는 철천지 웬수같았던 피발령 고개가 넘고 나니  이렇게 쉽고 편안 할수가 없었다.

보은군 회인면,

할아버지와 그위 할아버지, 또 윗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 회북(회인)면 늡실(눌곡리)

마을이다.


아직은 그곳이 보이지는 않지만,

한달음에 그곳을 향하여 우리 네식구가 살림살이를 실은 구르마를 끌고 달려갔다.


면사무소를 지나고 시냇물을 옆에끼고 수리티재를 통하여 보은으로 가는 삼거리를 지나

대전쪽으로 한발 한발 쉬지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지붕이 높은 방앗간이 왼쪽에 보이고 오른쪽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뚝 서있는

아버지의 고향 늡실,

이 난리통도 아랑곳 없이 피난갈 생각도 안하는 험준한 산으로 둘러 싸인 오지마을,

모두가 먹고살기 위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고 논과 밭으로 나가 일을 해야만 살수 있는곳

그곳에 드디어 도착을 하였다.


얼마나 긴 여정 이었던가?

얼마나 힘들었던 고생길이 었던가?

얼마나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쉬지않고 달려온 피난길이었던가?

우리식구는 이렇게 무사하게 난리를 피해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2010,4,10 현재 회인면 눌곡리 마을 입구 ; 이곳이 피난길 최종 목적지였다. 60년전에

비해 변한것은 신작로가 포장 되었고 토담울타리가 블럭 울타리로 바뀌었을 뿐이다 )


아버지가 골목의 문간방 대문 앞에 구르마를 멈추고

나를 내려주며 할아버지에게 인사 하라고 했다.


" 문규야 저기가 할아버지 집이다 어서 가서 인사 드려라 "

" 아버지 여기가 할아버지 집이야? 그럼 할머니도 있어? "

" 그래 할머니도 계셔 어서 들어가 인사 드려 "

" 응 알았어~ "

" 할아버지~~~ "


그렇게 할아버지를 부르며 문간방을 향하여 뛰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았다.

9일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했던 몰골로 난리를 피해 내려온 둘째아들 내외와

손자둘을 맨발로 뛰어나와 맞이하시던 아버님의 얼굴,


그얼굴에 맺힌 뜨거운 눈물을 보았고 그리고 한참을 목을 놓아

엉엉 울고는 아버지를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 


" 그동안 무고 하셨습니까? 둘째아들이 난리를 피해 피난 왔노라고 큰절을 올렸다 "


문규도 따라 그옆에서 큰절을 올리고....

할아버지는  사촌 간 이신 가운데 할머니댁 문간방에서 기거 하고 계셨었다.


(6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문간방,지붕이 넓적한 얇은 돌 너와로 되어있다.


천성이 농사일을 못하시고 학자로서 체면 때문에 굶을 지언정 밭이나 들로 나가

삽자루 한번 안들고 사시는 책상다리 양반이셨고,

슬하에는 42 6남매를 두셨고 아버지가 차남이셨다.


큰아버지는 해방전후 인천의 화수동(1940년대~1950 화수목욕탕)에서 이발관을 하셨고

아버지밑으로 큰고모(인천 신포동 鄭씨댁으로 출가)와 작은고모(공주 延씨댁으로 출가)

그리고 큰삼촌(힘이좋고 전국을 돌아다님)과 막내삼촌(나보다 13살 연상)등이 계셨다


큰아버지는 방앗간 옆에서 이발업을 하시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큰삼촌은 집에 없었고

작은 삼촌은 집안일을 도우며 할아버지와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오늘도 할머니는 밭으로 일을 나가셨다가 둘째 병록(아버지)이가 피난 내려 왔다는

소리를 듣고 하던 일손 멈추고 부랴 부랴 집으로 달려 오셨다.


난리가 터지고 공산군이 충청도까지 밀고 내려 왔다고 하건만 인천에 사는 둘째아들이

무사한지 소식을 몰라 오매불망하며 하루 한시간이 한달처럼 길고 힘들게 느껴지고 아침에

눈뜨면 문간방 대문을 열고 내다보며

어머니~ 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아있기만 바라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온동네가

인천에서 병록이네가 피난왔어~ 라는 소식이 퍼져 나갔다.



우리는 몇일간이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저 문간방에서 지냈을까?



드디어 내 오른쪽 귀속이 곪기(중이염) 시작했다,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며 밤마다 울며 보채는 나에게 할머니와 엄마는 안절 부절하며

시커멓게 바랜 이불솜을 뜯어 성냥개피에 말아 귀속을 후비며 닦아줄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할수 있는거라고는 읍내에서 사온 엄청 쓴 깅기랍(항생제)을 숟가락끝에 조금

찍어 김치에 싸서 입에 넣고 강제로 삼키게 했다.

그것만이 최상의 치료 방법이었다.


읍내엔 의원도 없었고 100여리 이상 떨어진 대전으로 나가야 치료를 받을수 있었지만

이 난리통에 어디던지 가거나 움직일수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는 우리들의 피난길이

여기까지가 끝인 것으로 알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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