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밤에 집을 나왔다.

 

2년 전 아버지가 퇴직금을 나에게 주시며 이율이 좋은 회사의 신협에 입금하라고 하여 신협에 출자를하고 

매년 높은 배당(세전 평균 23%)을 받았고 또한 신용조합 이사에 피선되어 신협운영에 참여 하기도 하였다.

경기도 광주로 발령받아 이사간 두아이와 힘들게 살아가는 여동생 미자가 마침 사놓으면 재산이 될만한 땅이 나왔다면서

어머니를 졸랐고, 어머니는 시집간 딸에게 조금(?)만 보태주면 600여평의 땅을 산다는데 도와 주지 않을수가 없었기에

어머님의 요구에 의해 80만원을 회사 신용협동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어머니에게 드렸다.

원금상환과 대출이자가 월 60,000원 정도 급여에서 자동공제납부되는 관계로 어머니에게 드리는 월급 봉투엔

남은 돈이 항상 절반이 안 되었었다.


(1983~1997년 월급명세서 오른쪽은 바뀐양식의 과장 월급명세서)


이에 어머니가 아내를 잡고 탄식을 하니 아내 또한 말대꾸를 할수 밖에 없었을터,

어머니 대출 이자라도 조금씩만 달라고 하면 안될까요?”
예 네가 버는 돈이냐? 그리고 힘든 시누이가 돈을 빌려 갔다고 이자를 받겠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래 네가 돈이라도 한 푼 벌어다 주길했냐 뭘했냐?”
어머니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최소한 은행 이자는 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예 너참 뻔뻔하다. 너 이집에 시집와서 보태준게 있냐? 돈을 벌어 오길했냐?”
애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돈 전부 어머니가 받지 안아요?

그러면서도 저에게 용돈을 한 번 주시거나 종영이 종관이 과자라도 사주라고 단돈 십원이라도 주신적 있으세요?

손자들(종영이 종관이)에게 

사랑하는 마음에 단 한번이라도 단돈 5원짜리 눈깔 사탕이라도 직접 사다 주신 적이라도 있으세요?

어머니 손자가 골목길에서 다른 아이들이 냠냠거리며 먹는것 처다보고는 먹고 싶다고 우는 모습을 본적 이라도 있으세요?

저희는 다른 애들 먹는것 보고 사달라고 조르면 끌고 들어와 회초리만 들고 때렸어요.”

라며 눈물로 항변 했다가 고부간의 다툼이 시작 되었고

아마도 시집와서 고부간에 처음으로 말 대꾸를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시집와서 지금까지 4년간을 어머니에게 애썼다.

고생했다. 잘했다 라는 소리 한번 못들었고

남편 월급날은 봉투째 어머니에게 갖다 바쳤기에 살림하는 여자가 주머니에 십원자리 동전 하나가 없었어요. 

다른 집 며느리들처럼 구멍가게서 반찬거리 한 번도 마음 놓고 사보질 못했고,

반찬은 어머니가 사오는 대로 반찬을 했고,

반찬거리 없어서 안 하면 안했다고 혼났고 살림을 혼자 도맡아 했으나 5년동안 용돈도 한 푼이라도 주신적 있어요?

아이들은 커 가는데 저축도 못하고, 저축은 커녕 희망이 없는 생을 살아가고 있다구요."

라고 눈물겨운 호소가 시작 되었다.

다다음달이 둘째 첫돐이니 돈 얼마라도 내 주시며 다음달이 둘째 돌인데 이렇게 이렇게 하자,

하며 말도 안꺼내는 시부모가 야속했었다.


(급여명세표,831월것 부터는 남아 있었다.

그 이전것은 어디 숨어 있는지.. 매년 2만원씩 신협에 저축하고 살았다)


아내의 응어리진 사연들이 순식간에 엉킨 실타래 풀리듯 줄줄 풀려 나왔다.

친정에서 애 낳고 7일만에 오니 물독에 물 없다고 물길어 오지 않는다고 혼났고,

시 동생들 도시락 반찬을 고기반찬으로 안 싸준다고 혼났고, 애들 울린다고 혼났고,

3개 연탄불 제시간에 안갈아 꺼진다고 혼났고, 다섯 시 동생 빨래 제때 안한다고 혼났으며,

어린 시동생들이 밖에서 매맞고 들어온다고 혼나고 살았다고 하며 

그 동안 가슴에 품고 참고 살았던 모든 사건들을 큰 소리로 악에 바쳐 내지른다.

그 동안 말없이 순종만 하던 며느리의 당돌한 반항에 놀란 어머니는 순간 할 말을 잊고 욕부터 내뱉는다.

야 이X 세상에 어떤 며느리는 그렇게 안산다냐?

너희들 나가라 이런 몹쓸 것,

밥세끼 배불리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인제 보이는 것도 없고, 겁도 없구나, 나가라 나가 살아~ X ~”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면서 이 상황을 목격 하셨고

나는 가운데 우리방에서 이 고부간의 다툼에 언제 나서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X아 나가 살아라 하는 소리가 끝나자

안방으로 들어가 아내를 끌고 우리방으로 들어와 누워 있는 아이들 옆에 무릅 꿇여 앉혀놓고 안방의 눈치를 보며

아내의 따귀부터 한대 때렸다.

~" 소리가 안방에 들릴 정도로, 그리고 소리쳤다.

당신 말이야 지아비는 하늘이지?

하늘의 부모님은 얼마나 높은 분이야 왜 높은 어른들께 말대꾸를 하는거야? 남편을 우습게 보는거야?

어머니가 그렇게 만만해?

그렇게 악을 쓰며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대게 너 나하고 살기 싫은거야?”

하고 또한대의 따귀를 때렸다,

” ~~"

아내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미 많은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에 또 다른 눈물을 흘리며 참았던 울분을 터트리며

내가 잘못 했어요,

우리 애들 그리고 내 신세가 너무 서러워서 그랬어요 엉 엉 엉

하며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고 있는데 사태가 심싱치 않다고 생각하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쫓아 들어와 

아내를 피하게 하고 나를 떠밀며

이놈 새끼가 부모앞에서 제 마누라를 패~ ?

이 새끼야 꼴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 나가 !!! ~”


그래 너희들 지금 나가라 나가 살아라

하고 얼마전부터 상황을 주시하고 계시던 아버지도 분명히 한마디로 나가라고 하셨다.

그날 밤 1978년 11월 8일 오후 11시20분경

우리 4식구는 막내의 생일 돐(111)을 두 달을 남기고

자는 두 아이를 깨워 업고 무작정 해방되었다는 감상에 젖어 어떻게든 이 소굴만 빠져 나가면 된다는 일념으로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빌거나 하소연도 하지 않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단숨에 집을 빠져 나왔다.

(처갓집에서 큰 애를 업은 우리 부부모습, 합성사진임)



갖고 나올게 없어서 막내 기저귀 몇 장이 든 가방과 문옆에 세워놓은 낚시가방이 눈에 띄어 그것만 들고

통금 시간전에 가야 한다며 택시를 탔다.

그리고,

아내는 가만히 잡고 있던 내 손을 힘을 주어 꼬옥 쥔....


엄동 설한에 집을 나오면서도 우리 부부는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분명히 보란듯이 더 잘 살수 있다고... 아내는 아무 말없이 아이를 무릅에 안은채 앞만 보고 있었고

이제 내일 부터는 우리 4식구만 뭉쳐서 살아갈 계획을 짜는 모습이었다.

만석동 끝에서 용현동까지 달려가 결혼 예물 시계를 택시비조로 기사에게 맡겨놓고 처갓집에서 돈을 얻어다

기사에게 주고 시계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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