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목표량 달성 하고도 복귀를 안했다.

 

1992 81(), 아버님께서 운명하신 후 6개월이 되어오고,
회사에서는 내일부터 하기 휴가를 간다고 모두가 들떠 있는데...

본부장실에서 구매본부장과 기획부장이 난처해하며 
오전 내내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무래도 내 신상에 관한 일이 있는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슨 안 좋은일 있으세요?”

하고 묻는 나에게 잠간 들어 오라고 하여 들어가 본즉 두 분이 어렵게 입을 열어 설명을 한다.

그룹사 직원 1,000명을 여러 개의 회사에서 무작위로 추천에서 대우자동차 영업으로 파견 명령을 냈는데

내 이름이 그곳에 포함이 되었다.

(서인천 지점 판매과장 재임중)


영업직이라하면 모두들 寒職으로 생각하며 직장을 그만둬도 좋을 사람들을 모아 발령 내는곳 쯤으로 생각 했고

이제 그만 두어야 하는구나 하고 자포자기하고 사표를 던지기도 할 정도로 기피하는 직무였다.

그도 그럴것이 영업으로 발령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장 부적격자, 노조활동하다 퇴출된 자,

다툼이나 업무상 과실로 징계를 받는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이제 그만두라는 것이구나,

하며 휴가기간 내내 많은 고민을 했지만

회사를무조건 그만 둘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마음을 추스리고 일단 부디쳐 보기로 마음먹고 이를 악 물었고 휴가를 끝내고

용인연수원으로 67일 영업사원 교육에 입소를 했다.

대우자동차를 살리기 위한 김우중회장의 의도는 그룹사에서 관리직 사원 1,000명이 각자 능력을 발휘하여

하반기에 승용차 10,000대를 더 판매하여 업계 2위를 탈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 계획 (업계 매출순위 H,K,D H,D,K로 전환)은 성공 했던 것이다.

또한 파견자가 12월 말까지 10대를 판매하고 원하면 원직복직을 해 준다고 공언 했기에 모두들 열심히 영업을 했다.


나는 다른 영업사원들은 생각도 못하고 회사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견적서를 복사해 썼지만

나만의 견적서를 거금을 들여 독자 인쇄하여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영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교육이 끝나고 91일부터 영업활동을 개시해 보았지만 역시나 계속 절망의 나날이었다.

실적 안잡는 티코를 동생 필규가 94일 출고하여 첫 차를 팔았고

1016일까지 가평 이정호씨에게 르망 한 대만 팔았을 뿐

실적이 부진하여 아침마다 지점장의 성토에 움츠리며 영업에 회의를 느끼고 자포자기 하고 있던 어느날

1017

할일도 없고 오라는데도 없어 대우중공업 낚시회 총무로 활동시 한번 출조 했던

김포시 대곶면 덕포수로의 작은 목로집을 세일즈 가방을 들고 찾아갔다.


노랗게 변한 들판과 작은 수로를 끼고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의 초가집 목로식당.

오늘은 여기서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르망, 에스페로, 티코의 카다로그를 주인 아줌마에게 건네주고

소주 한병과 안주로 두부찌개를 시켜놓고 그곳에 홀로 앉아 한잔, 또 한잔 마시면서 술잔을 비워 나갔다.

처지가 말이 아니게 처량해진 내 인생,

내가 사는 처지의 궁색함을 곱씹으며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을 정리하던 중 이었는데...

언듯 창문에 있는 초록색 뚜껑의 갈색 농약병이 눈에 띄었다.

 

~ 농약이구나, 하며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하여 홀작홀짝 마시다가 자꾸 창문의 농약병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느끼며 애써 고개를 돌려 보지만

쥔 아줌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주방에서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저 농약을 마시면 어찌될까? 속이 뒤틀릴까? 피를 토할까?

아마도 무척 괴로워서 뒹굴겠지?
내가 저걸 먹으면 아내와 두 아이는 어찌되지?

아내와 두 아이가 나 없어도 잘살아 갈까?
제기랄 소주 두 병이 간에 기별도 안오는군
...
제기랄... 능력이 없어 차도 못파는 나 같은 넘이 살아서 무슨 일을 한다는 말인가?

잠시 고개를 떨구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가 가까이 가서 약병에 붙은 표시 라벨을 궁굼하여 보려고 일어 서는데

삐삐의 진동이 울려왔다.

삐삐삐삐~~삐삐삐삐~

032-422-4688 누구며 웬 전화일까? 설마 자동차 산다는 전화일까? 하면서

주인 아줌마에게 200원을 주고 수화기를 다이얼을 돌려 통화를 했다.

여보 자기 어디야? 여기로 빨리 와

처갓집에서 아내가 보내온 삐삐였다. 그리고 처외숙부의 목소리로 바뀌며

여보게 사위 어딘가? 빨리 처갓집으로 오게
무슨 일이신데요?”
아 이사람아 좋은일 있으니까 어서와봐 하며 전화를 끊는다.


한참 걸어 나가 택시를 타고 인천 십정동으로 달려가며 제발 하느님이 도와서 차를 계약하는 것이길 은근히 기대하며

처갓집으로 올라 갔다.

모두 모여 있는 처갓댁 거실에서 전화 하신 큰외숙부님의 배려로

르망 GTI 를 견적을 내는 중에 외숙부께서 한마디 하신다.

이 사람아 떨지 말고 천천히 써, 나 다른대로 안가

계약서를 쓰면서 내가 그렇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손만 심하게 떨고 있는것이 아니었다. 감격에 겨워 내눈이 뜨거워 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숨기고자 엄청 애를 썼던것이다.

(눈물을 참으며 썼던 18년 지난 외숙님의 르망 견적서)


외숙부께서는 이날 사준 르망 말고도 프린스를 또 사셨고 형제분들과 이웃들에게 여러 대의 실적을 올려 주시었다.

나는 친지분들 중에서 특히 처외숙부의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고 지금도 이야기한다.

그렇게 판매한 르망을 필두로 12 31일까지 4개월간 티코 6대를 포함 총 18 대를 판매했다.

이 실적은 영업 초보자로서는 꽤 괜찮은 실적이라고 했다.


나는 티코던 슈퍼 싸롱이던 고객에게 차를 인도할 때 마다 안전운전" 또는 "새차구입을 축하 합니다" 라고 쓴

리본을 단 꽃다발을 선물하며 고객의 신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나눠 드리는 영업 방식을 끝까지 지켜 나갔고

이 소문은 대우자동차 판매본부까지도 퍼져나갔다.

(그 동안 고객에게 판매하고 인도하며 찍은 앨범)


(앨범속의 사진들 모든고객이 꽃다발을 받았다)

좌상; 첫차 르망을 가평에 이정호씨에게 인도, 

우하;진도산업에  5대의 차를 판매하고 고사를 차려 주었다



인생은 유한한건가? 아니면 살아가는 방법이 무궁무진 한 것인가?

10대를 팔면 원직복직을 할 수 있었지만 일언지하에 고사하고 자동차 영업에 남아 2007 4

나이 61세까지 쎄일즈맨으로서 숨가쁘게 뛰었고 열심히 살았다.


내 생전 백화점을 가 본적이 없고,

메이커 제품은 비싼 것이기에 좋아도 멀리 했고 속칭 길거리표 의상이나 구두를 싼맛에 이용했고,

당구와 고스톱을 안 배웠으며 두 아이를 학원을 보낸 적이 없다.

회사 근무 30여년간 누구나 말하는 바캉스는 간 적이 없고

회사에서 받은 여름 휴가비는 아내에게 주며 그 돈으로 한 여름 집에서 배 뚜드리며 편안하게 쉬는 것이

글자 그대로 진정한 休家 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다.


그냥 그렇게 평범했지만 가치관 하나는 확고하게

나라가 있기 내가 있고, 회사가 있기에 내가 편히 살아 왔고,

이순신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본으로 생각해 아이들을 가르켰으며

나 또한 그렇게 몸으로 보여주며 살아왔다.

복잡한 서울은 눈감으면 잘 생긴 내코를 베어 갈까봐 가기를 꺼렸으며,

생전에 아버님의 가르침대로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배고프거나 춥거나 당장 꼭 필요하지 않으면

아무리 값이 싸도 사거나 욕심을 내거나 낭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나에겐 현명한 아내의 내조가 있었고그 덕에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멋진 인생을 살아왔다.


대우중공업 사격단을 창단하여 사격단장으로 크레이 사격도 했고,

은퇴후 국궁을 배워 김포시 대표선수도 했고,

승마도 배워 시내의 국도를 타고 달리기도 했다.

또한 여가 선용으로 민물 낚시도 즐겨했다.


이제는,

나와 아내가 노후에 몸 담아 쉬는곳,

손자 손녀들이 와서

놀고 싶어하는 청정 자연의 푸른 숲속에,

박문규의 정원을 만들고자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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