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업경대(業鏡臺)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겠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걱정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걱정과보를 받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과보로서 나타난 것을 바꿀 수 없다. 단지 걱정이라고 관찰하면 그뿐이다.

 

괴로워서 괴롭다고 한다면 괴로움이 없겠네.”여기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은 느낌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있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느낌이 있어서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도 역시 과보로서 나타난 것이다. 괴롭다고 해서 , 괴롭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괴로움이 사라질까? 화살을 두 번, 세 번, 아니 무수하게 맞는 것과 같다.

 

여기 행복한 자가 있다. 그는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 행복이 행복하다고 한다면 행복해서 좋겠네.”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행복은 과보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을 향유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해서 행복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난다. 그 사람만 보면 피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만 보면 환영한다. 그 사람만 보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같은 사람을 놓고 왜 어떤 사람은 싫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아할까? 그것은 과거 기억에 따른 것이다. 과거 기억에 따라 이미지가 호불호 또는 쾌불쾌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 두리안이라는 열대과일이 있다. 처음 접하는 사람은 향이 좋다고 한다. 남방에 사는 어떤 사람은 냄새를 매우 싫어한다. 두리안 냄새는 극과 극이라고 한다. 심지어 두리안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단지 두리안이라는 이름 때문에, 두리안이라는 기억 때문에 비행기에 싣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느낌이나 기억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느낌은 오온에서 웨다나()에 해당되고, 기억은 산냐()에 해당된다.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느낌 크게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어느 느낌이든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기억은 언어와 관련된 이미지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사람 이름을 보면 그 사람 이미지가 떠오르고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난다. 이런 기억 역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오온에서 두 가지 즉 웨다나와 산냐는 항상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결과로서 나타난 것을 바꿀 수 없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어난 생각을 바꿀 수 없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 역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원인에 따른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 접하고 있는 현실은 모두 과보로서 나타난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과보로서 나타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과보 아닌 것 없다. 그래서 현실에 대하여 업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현실은 거울과 같다. 과보로 나타난 업의 거울, 즉 업경대(業鏡臺)와 같은 것이다.

 

지금 마주 하고 있는 현실이 업경대라면 결과를 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즐거운 것 일수도 있고 괴로운 것 일수도 있다. 괴롭다고 하여 괴로워하여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멈추어야 한다. 지금 괴롭다고 느꼈을 때 당장 멈추면 더 이상 괴로움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사띠(sati)한다고 말한다.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사태에 대하여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딱 멈추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깨어 있으라고 했다. 그것도 육문을 단속하며 깨어 있으라고 했다.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이 사띠이다. 사띠하면 더 이상 괴로운 과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선법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바른길로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듯

윤회에 돌고 도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어떤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법을 알고서 진리들을 관찰할 때

무명은 가라앉고 고요하게 다닐 것이다.”(Vism.17.119)

 

 

 

2019-07-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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