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39년만에 의문이 해소 되었다, 김의기열사 기독교회관 투신

작성일 작성자 진흙속의연꽃

 

39년만에 의문이 해소 되었다, 김의기열사 기독교회관 투신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무려 39년만이다. 1980 5월 말 대학교 2학년 때 목격한 일이다.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 앞에서 죽은 듯이 널부러져 있던 청년에 대한 의문을 말한다이에 대하여 최근 블로그에 그때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휴교령이 내렸다. 답답한 마음에 종로2가 학원가에 가 보고자 했다. 버스에서 하나의 장면을 목격했다. 종로5가 기독교 방송국 앞에서 한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등을 보이고 널부러져 있었다. 핏자국이 바닥에 있었다. 총에 맞은 것 같았다. 방송국 현관 앞에는 공수부대원 두 명이 집총 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무도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청년은 왜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을까? 그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더라면, 5.18 다큐영화 김군 특별상영회, 2019-07-14)

 

 

다큐영화 김군을 보고나서 소감문을 쓴 글에서 의문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그런데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단서를 발견했다. 한홍구선생의 현대사강연에서 본 것이다그것도 2013년 것이다. 동영상 강의 [한홍구의 한국현대사 #3] 전두환은 어떻게 독재권력을 지켰나?에서 2 18 부근에 이런 말을 했다.

 

 

그날 도청에서 죽어나가던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광주는 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주를 사람들이 많이 몰랐어요. 광주가 진압됐을 서강대에 다니던 청년 김의기, 기독교청년이었습니다. 기독교회관, 종로5 기독교회관에서 6층에서 몸을 던졌어요.([한홍구의 한국현대사 #3] 전두환은 어떻게 독재권력을 지켰나?, 2013-1-10)

 

 

종로5가 기독교회관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기독교방송국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종로5가 가까이에 있는 연지동에서 다녔는데 그때 당시 10층 높이의 기독교방송국은 가장 높은 건물로서 랜드마크 같았다. 방송국 건물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기독교회관이라고 한다. 효제국민학교 바로 맞은 편에 있다. 한홍구선생에 따르면 김의기열사는 광주를 알리기 위해 투신했다고 한다.

 




김의기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투신일자가 5 30일이다. 그때 당시 버스에서 목격하던 때와 딱 맞아 떨어진다. 휴교령이 내려 갈 곳이 없을 때 종로2가로 향했는데 노느니 영어공부 하고자 했다. 잘 기억 나지 않지만 시사영어학원으로 향했던 것 같다. 강사는 CNN 뉴스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취하여 들려주었다. 그때 당시 유명강사였는데 히어링강좌에 있어서 일인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건을 목격한 시간은 오후였던 것 같다. 학원이 오후에 열리기 때문에 집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무위키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해 놓았다.

 

 

김의기는 12시경 회관에 들어가 희생을 최소로 줄이고자 모든 일을 혼자서 추진했고 6층에서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손수 타이프쳐서 인쇄했다. 그 와중 계엄군이 진입을 감행하여 훼방을 놓으려 하였지만 김의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엄군을 피해 가톨릭센터 6층으로 올라가 유인물을 인쇄했다. 하지만 계엄군을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계엄군에 의해 인쇄는 중단된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과 유서가 없다는 점을 비춰 볼 때, 투신의 의도는 없었다고 판단되지만 계엄군과의 실랑이가 있었고 결국 김의기 6층의 폭 1m 베란다를 건너서 창문 밖으로 떨어져 운명하였다. 계엄군들은 떨어진 그를 구하기는커녕 밑으로 떨어진 유인물을 줍느라 바빴다. 사태가 진정된 후 늦게나마 계엄군에 의해 시신이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결국 김의기는 2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김의기, 나무위키)

 

 

나무위키에 따르면 투신날자는 5 30일이다. 유인물을 뿌리고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한 것이다. 아마 오후 4-5시 정도 됐을 것이다. 마침 버스를 타고 가다 기독교방송국 앞에 있는 청년이 쓰러져 있었던 것을 목격한 것이다. 내 또래 청년이었고 머리는 장발이었다. 그리고 점퍼차림이었다.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는데 분명히 피가 바닥에 흥건히 적셔 있었다.

 

그때 당시 투신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 주변에도 사람이 없었다. 방송국 현관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공수부대 두 명만 보였다. 버스에 탄 사람들도 관심 보이지 않았다. 다들 누구 하나 죽었나 보다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광주에서 수백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서울에서도 그렇게 죽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의기 열사는 1959년 생으로 1980년 당시 서강대 무역학과 학생이었다.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알리고자 1980 5 30일 유혈진압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뿌린 뒤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하였다. 그때 당시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피를 흘린 채 널부러져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는데 바로 그 사람이 김의기 열사였던 것이다. 이로써 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39년 의문이 해소되었다.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만큼 역사적 진보를 이룬 것이 아닐까?

 

 

2019-07-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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