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실전을 치루며

 

 

유튜브에서 들은 법문이다. 테라와다식 가사를 걸친 어느 비구니 스님은 선원에서 생활은 연습이고 세속에서 삶은 실전입니다.”라고 말했다. 선원에서는 매일 8계를 받아 지니며 살기 때문에 계행은 자동적으로 지켜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삶은 계행을 어기기 쉽다. 선업보다는 불선업을 짓기 쉽다.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 등 오감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기 쉽기 때문이다.

 

선방스님들은 해제가 되면 만행을 떠난다. 선방에서 증득했던 법이 세상에서 흔들림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일부로 불선행위를 저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경계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에 굴복하여 세상을 살게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래 전에 영화 삼사라(Samsara. 2001)’를 보았다. 어느 티벳승려가 출가와 환속, 그리고 재출가 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 승려는 어느 여인을 보고 감각적 욕망을 이기지 못해 환속했다.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그런데 현실의 삶을 살게 된 전직 승려는 오계를 어기는 등 세상의 범부 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 , 치의 삶을 살았음을 말한다.


처자식이 있다는 것은 족쇄가 채워진 것과 같다. 그런데 죄수들의 목이나 발에 걸린 족쇄는 부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탄탄하고 질기고 강력한 족쇄라도 칼로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식이라는 족쇄는 칼로 끊어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라고 했다.

 

처자식은 욕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탐욕이 있으면 반드시 분노가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탐욕과 분노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한평생 탐욕으로 산다면 한평생 분노로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또한편으로 탐욕과 분노의 본 바탕에는 어리석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 사기 당한 사람이 있다. 전재산을 올인했는데 한푼도 건지지 못했다면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탐욕에 원인이 있다. 투기를 해서 좀 더 많이 벌어보고자 한 것이다. 불로소득을 바라는 어리석은 행위에 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탐욕과 어리석음이 결합하여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기당한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면 역시 어리석음이 개입 되어 있다. 사기당하고 난 다음에 성냄과 어리석음이 결합되어서 고통받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의 배후에는 어리석음이 또아리고 있다. 그런데 탐, , 치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분노이다. 그 다음이 탐욕이다. 가장 보기 힘든 것은 어리석음이다. 밥 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가를 알 수 있다. 탐욕으로 밥을 먹는다면 어리석은 자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분노하는 것을 보면 역시 어리석은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항상 함께 있다.

 

몹시 분노할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나와 무관한 사람에게 분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칼로 끊을 수 없는 족쇄와도 같은 관계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심하면 살인이 날 수 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어느 여인은 전남편을 살해하여 토막내서 버렸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가장 잘 아는 사이에서 분노가 일어나면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친구와 다투어 화를 냈다면 관계가 끝날 수가 있다. 거래처 고객과 싸운다면 더 이상 주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분노하는 자는 추악하고

고통스럽게 잠을 이룬다.

또한 이익을 취했지만

그는 불익을 얻는다네.

 

그러므로 분노하는 자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파괴를 일삼고

분노에 정복되어

사람은 재산을 잃는다네.

 

분노의 취기에 취하여

그는 명성을 잃고

친지와 친구, 벗들은

분노하는 자를 피하네.

 

분노는 불익을 생겨나게 하고

분노는 마음을 동요시킨다.

안으로 생겨난 위험을

그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분노하는 자는 이익을 알지 못하고

분노하는 자는 원리를 알지 못한다.

분노가 사람을 정복하니

그때 암흑과 맹목이 그를 지배하네.

 

분노하는 자가 파괴를 일삼으면

쉽게 부수든 어렵게 부수든

나중에 분노가 떠난 후에

불에 연소된 것처럼 괴로워하네.

 

분노가 폭발하여

젊은이가 질책하면

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그는 당혹한 모습을 보인다.

 

부끄러움도 없이 창피함도 없이

공경도 없이 말을 지껄이니

분노에 정복되어

결코 섬을 발견하지 못하네.

 

가르침에서 멀리 떠난

고통스런 업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가르치니

그것을 잘 들어야 하리.

 

분노야말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성직자를 살해하고

분노는 또한 어리석은 범부를 살해하네.

 

어머니의 양육으로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났는데,

그 생명을 부여해준 존재를

분노한 어리석은 범부가 살해하네.

 

그 뭇삶들은 자신을 친구로 삼으니

자신이 가장 사랑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네.

그러나 많은 다양한 것에 미혹되어

분노하는 자는 자신을 살해하네.

 

미혹된 자들은

칼로 자신을 죽이고 독을 삼켜 죽고

밧줄에 묶어 죽거나

산의 협곡에 떨어져 죽는다.

 

존재를 살해하고

자신을 살해하는 업을 짓는 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분노에서 파멸이 생겨나네.

 

분노에서 숨겨진

죽음과 밧줄이 생겨나니

자제와 지혜와 정진,

그리고 올바른 견해로 끊어야 하리.

 

현명한 자라면, 이 하나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끊어버려야 하리.

이처럼 가르침을 배워야 하리.

결코 당혹해 하지 말라.

 

분노를 여의고 절망도 여의고

어리석음을 여의고 탐욕을 떠나

자제하는 자는 분노를 버리고

번뇌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 (A7.64)

 

 




꽤 긴 게송이다. 핵심은 분노하는 자는 자신을 살해하네.”(A7.64)라는 구절이 될 수 있다. 애인이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다고 하여 살해 했을 때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된다. 애인이 자신의 욕망을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결과가 살인으로 나타났을 때 분노에서 파멸이 생겨나네.”(A7.64)가 될 것이다.

 

분노가 일어나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를 죽이면 무간업을 짓게 되어 한우주기가 끝나도 구제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빛이라고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 사이지옥에서 우주가 파괴될 까지 무간지옥에 보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모든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국가와 국가의 이익이 충돌 했을 때 최고 지도자가 분노하면 어떻게 될까?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한번 전쟁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초토화 되고 난 다음에 끝난다. 분노의 바탕에는 가까운 원인으로 탐욕이 있고 먼 원인으로는 어리석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은 자신이 탐, , 치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세상은 탐, , 치로 가득해서 대부분 사람들은 탐, , 치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세상이야말로 자신의 깨달은 바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실전무대라고 볼 수 있다.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중에서 나홀로 신선처럼 살아 가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처자식이라는 족쇄가 채워졌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 삼사라를 보면 도는 세상에 있다라고 했다. 선원에서의 삶은 연습에 불과하다. 실전을 치루어 보아야 알 수 있다. 어쩌면 처자식이라는 족쇄가 채워진 재가불자는 매일매일 실전을 치루며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19-07-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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