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말자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맙시다이 말에 깜짝 놀랐다. 혹시 잘 못 쓴 것이 아닌지 다시 보았다. 분명하게 모이를 주지 말자고 했다. 그것도 시에서 붙여 놓은 홍보용 현수막에서 보았다.

 

이제까지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었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장면은 평화롭고 한가롭다. 그럼에도 모이를 주지말자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것이다. 모이를 주면 개체수가 불어나기 때문에 배설물 등으로 인하여 환경이 악화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생태계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일하러 가는 길, 학의천 길에서 비둘기가 먹이를 먹는 것을 보았다. 해바라기 씨를 먹는 것이었다. 학의천에 보행자전용 무지개 다리가 있는데 누군가 관상용으로 해바라기를 심어 놓았다. 해바라기는 머리가 너무 크면 쓰러진다. 쓰러진 해바라기는 새들의 좋은 먹잇감이 . 비둘기 두 마리가 해바리기 씨를 까 먹는 것을 보니 자연스럽다. 모이를 주지 않아도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는다.

 


 

 

요즘 학의천에 나팔꽃이 피었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오므린다. 팽팽하게 핀 나팔꽃을 보면 인사하는 것 같아 즐거운 느낌이다. 학의천변에는 수 많은 꽃이 피고진다. 누가 보건말건 때가 되면 꽃을 피고 열매를 맺는다. 학의천변 축생들도 마찬가지이다.

 

무지개다리 아래에 사람 장딴지만한 물고기가 있다. 학의천 최상위 포식자이다.과자 부스러기라도 하나 떨어뜨리면 떼로 몰려든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다.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 이 괴물 같은 물고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은 생명이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설령 그것이 약육강식의 세계일지라도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짝짓기를 하고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어떻게 최후를 맞이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보일 뿐이다. 괴물 같은 물고기도 청둥오리도 왜가리도 지금 여기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보인다.

 




동물에게 먹이를 준다면 야성이 상실될 것이다. 마치 우리에 갇힌 사자와 같다. 동물원의 사자는 더 이상 사자가 아니다. 사육사가 주는 고기를 먹고 산다면 돼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평생 월급생활자로 산 사람이 있다. 정년이 되어서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현직에 있을 때와 180도 다른 것이다. 더구나 새로운 일을 하고자 했을 때 두려움이 앞선다. 마치 온실속의 화초와 같다. 야생의 초원에 내 버려진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모험을 하지 않는다. 연금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보내고자 할 것이다.

 

지식보다는 지혜라고 말한다. 자녀에게 세상사는 지혜를 알려 주라고 한다. 자녀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 주기보다는 세상을 살아 가는 방법을 알려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사냥하는 방법을 알려주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약육강식의 축생의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여기에 불교적 지혜가 있다.

 

부처님 당시부터 탁발의 전통이 있다. 수행승이 탁발 나가면 일곱 집을 차례로 돈다. 일곱 집을 돌아도 얻지 못하면 굶어야 할 것이다. 이런 탁발행위는 마치 야생의 삶과 같은 것이다. 수행승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날 탁발하여 그날 먹는 것이다.

 

수행승이 탁발하는 이유는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철저하게 무소유가 되었을 때 청정한 삶은 실현된다. 또한 청정한 삶은 지혜로 완성된다. 이와 같은 불교적 지혜로서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무상의 지혜, 괴로움의 지혜, 무아의 지혜를 말한다.

 

노인은 지혜의 보고와 같다. 때가 되면 씨 뿌릴 줄 아는 등 삶의 과정에서 무수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적 지혜는 삶의 지혜와는 다른 것이다. 단지 사냥하는 방법과 같은 생존을 위한 지혜와는 다른 것이다. 불교적 지혜는 보다 근본적이다.

 

사람들은 계절이 바뀔 때나 나이를 먹을 때 무상하다고 말한다. 이는 자아를 기반으로 하는 무상이다. 그래서 낙엽이 지면 센티멘탈하게 되고 나이를 먹으면 슬퍼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 지혜는 우리 몸과 마음, 즉 오온에 대하여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또 무상한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무아를 기반으로 한 불교적 지혜를 가지면 센티멘탈하지도 슬퍼지지도 않는다. 그런 자아는 없기 때문이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말자는 캠페인을 보았다.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을 과보호하면 우리 안에 갇힌 사자와 같다. 야생에서 생존할 수 있는 야성을 길러 주어야 한다. 사냥하는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지혜보다 더 좋은 것은 불교적 지혜이다. 삼법인의 지혜를 다면 세상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말자.

 

 

2019-09-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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