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으로 법답게 산다는 것은

 

 

이름이 같은 사람을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고 한다. 정평불에도 동명이인이 있다. 불교학자 이병욱 교수를 말한다. 종종 자료 잘 받았습니다.”라는 문자를 받을 때가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받았을 때 잘못 보낸 것을 직감한다. 이런 경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방에 있어서 이름이 같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신입사원연수 받을 때의 일이다. 대학을 마치고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20일 가량 연수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백명이 넘는 인원중에 동명이인이 있었다. 연수원에서는 대학으로 구분했다. 이름 앞에 대학명칭을 붙여 준 것이다. 살아 오면서 이름은 같고 성이 다른 경우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이름과 성이 같은 경우는 드물다. 이번 9월 정평법회 법사로 모신 이병욱 교수가 그렇다.

 




교수로서 이병욱이 있다면 블로거로서 이병욱도 있다. 일인사업자로서 삶을 살고 있지만 회사명칭보다는 블로거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더 낫다. 자만일지 모르지만 누적조회수와 작성된 글이 미디어 다음에 있는 진흙속의연꽃블로그보다 더 많은 블로그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이병욱 교수의 불교의 정의론

 

정평불에서는 최근 불교사회교리작업을 하고 있다. 20개에 달하는 주제에 대하여 매달 정평법회를 통하여 발표하고 있다. 이런 일은 불교계에서 초유의 일이라고 본다. 타종교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교리를 발표하여 정립해 놓은 바 있다. 아직까지 불교계에서 사회교리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 9월 정평법회에서는 불자의 정의론에 대한 것이다. 이병욱 교수가 정리하여 2019 9 21일 법문형식으로 발표했다.

 




이병욱 교수의 불자의 정의론은 어떤 것일까? 배포된 프린트물을 보니 불교의 정의론이라고 바뀌어 있다. 이에 대하여 이병욱 교수는 불자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불자의 정의론이라는 말이 어색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불교의 정의론이라고 했는데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하여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여 설명했다.

 

이병욱 교수가 주장한 불교의 정의론은 모두에 잘 나타나 있다. 글의 모두를 보면 정의론의 주요내용은 자유와 평등이 될 것이므로, 그 자유와 평등에 대한 초기불교의 관점을 간단히 알아보고, 불교인이 어떻게 정의를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승불교에 속하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라고 했다. 용어와 관련해서는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하고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대승경전을 참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하여

 

자유와 평등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해당된다. 그러나 양립되지 않는다. 자유를 강조하면 평등이 위축되고, 반대로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침해된다. 이병욱 교수는 초기경전을 통하여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살리고자 했다. 자유에 대해서는 밧지족의 공화제를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평등에 대해서는 고대인도의 사성계급을 타파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밧지족의 공화제는 오늘날 민주주의와 매우 유사하다. 부처님도 칭찬한 밧지족의 공화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존중의 사상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하여 이병욱 교수는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주 모여서 바른 주제를 가지고 논의해야 하고, 그래서 자연히 계층 간의 견해가 수렴되어서 계층간의 화합을 이룰 수 있고, 그러할 때 비로서 도덕과 예의를 지키는 성숙한 문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라는 가치가 정립되어 있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사성계급은 매우 불평등한 것이다. 가문이나 인종, 피부색에 따라 계급을 나누는 것은 평등사상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성계급을 타파하고자 했다. 이에 대하여 이병욱 교수는 잡아함경 6권에 있는 소연경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내용은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aggañña sutta)’(D27)과 병행한다. 경에 따르면 브라만은 입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부정한다. 이는 바라문 아내에게도 월경, 임신, 출산, 수유가 존재한다.”(D27.2)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했다. 어떤 평등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행위(kamma)’에 있어서 평등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병욱 교수는 법정스님이 중역한 숫타니파타를 인용하여 오로지 그 행위에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브라만도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자유와 평등은 완전한 양립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불교적 가치관으로 본다면 충분히 양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자유도 유지하면서 평등도 지켜 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병욱 교수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근거로 하여 불교인의 실천에 대하여 설명했다.

 

보현행원품 십대원 가운데 사회적 실천에 대한 것이 있다. 이병욱 교수에 따르면 부처님에게 공양을 널리 드리는 것, 중생을 항상 따르는 것, 모든 공덕을 두루 회향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를 들었다.

 

이병욱 교수는 공양에 대하여 새롭게 해석했다. 공양은 개인적인 차원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제군주시대때에는 감히 자유나 평등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못하였듯이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양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공양에 대하여 중생을 자비의 마음으로 보호하는 공양[攝受]과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는 공양으로 설명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강력한 사회참여가 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중생을 항상 따르는 것모든 공덕을 두루 회향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제도측면에서 설명했다.

 

이병욱 교수는 경전을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 했다. 이에 대하여 경전을 읽고 해석할 때에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라고 했다. 그래서 불교의 정의론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에 편에 서서 소득보장제도를 이야기 했다. 부처님의 숨겨진 가르침을 재해석하면 요즘 이야기 되고 있는 소득보장제도는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왕들이 정의롭지 못하면

 

자유와 평등은 본래 양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조화롭게 실천되어야 한다. 불교인이라면 법답게실천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법답게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담미까(dhammikā) 또는 담메나(dhammena)를 번역한 말이다. 또 다른 말로 여법(如法)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이 말은 영어로 ‘Justly, righteously’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답게 사는 것은 다름 아닌 정의롭게 사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어떻게 정의롭게 살아야 할까? 담미까라는 말이 들어간 초기경전을 찾아 보면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왕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왕자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왕자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사제들과 장자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사제들과 장자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도시와 지방의 백성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 도시와 지방의 백성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해와 달도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해와 달도 바르게 돌지 못하면 행성들도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행성들도 바르게 돌지 못하면, 한 달과 반달이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한 달과 반달이 바르게 돌지 못하면, 계절과 년도가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계절과 년도가 바르게 돌지 못하면, 바람이 바르게 불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불면, 신들이 분노하게 된다. 신들이 분노하면, 비가 바르게 내리지 않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바르게 익지 않은 곡식들을 인간이 먹으면, 수명이 짧아지고, 용모가 추하고 힘이 쇠하고 질병이 많게 된다. (A4.70)

 

 

앙굿따라니까야 정의롭지 못한 경(A4.70)에 실려 있다. 신화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 세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최근까지도 지도자를 잘못 뽑았을 때 나라가 망가지는 것을 보았다. 이에 대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adhammika)’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사회정의가 무너졌을 때 우주운행도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했다. 현시대적 관점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 타당하다. 기후문제는 인간의 탐욕에 기인한다. 이익을 극대화하면 할수록 환경은 황폐화된다. 자원은 고갈되고 오존층은 파괴될 것이다.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거짓과 위선이 판치는 세상이 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이 되었을 때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나 다름 없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세상이 되었을 때 정의롭지 않은 세상이 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최상자라고 여겨지는 자가 정의로우면, 그 백성들이야 말해 무엇하리. 왕이 정의로우면, 왕국 전체가 행복을 누리리.(A4.70)라고 말씀했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한다. 지도자가 정의로운지 따져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 정의로운 왕이란 누구를 말할까? 대체로 전륜왕(cakkavattin)을 의미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전륜왕은 수행승이여, 세상에 전륜왕은 정의로운 가르침의 제왕으로 가르침에 의지하고 가르침을 존중하고 가르침을 공경하고..”(A3.14)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정의로운 왕인 것이다. 불교인들이 투표를 잘 하는 것도 강력한 사회참여에 해당될 것이다.

 

담마는 담마로 살아가는 자를 보호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정의로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불교인들이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정의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테라가타에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Thag.303)라는 게송이 있다. 이 말은 법을 따르는 자는 법이 보호해준다.”라는 말과 같다. 다른 말로 담마는 담마로 살아가는 자를 보호한다.”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법을 지키는 사람은 법이 보호해준다. 여기서 법은 부처님 가르침(Dhamma)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정의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담미까(dhammikā) 라고 하는데 법답게또는 여법하게라고 말한다. 법답게 사는 것도 불교인의 정의론에 해당되지 않을까?

 

유쾌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법문이 끝나고 약 한시간 가량 대화의 광장시간을 가졌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발언하는 것이다. 동등하다는 의미에서 둥그렇게 둘러 앉았다. 둥그렇게 앉다 보면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동등하다. 누구나 자유롭다. 자유롭게 토론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분위기이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하여 제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신상이야기부터 기후문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말이 나왔다.

 

공식적 모임이 있으면 비공식적 모임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비공식적 모임이라는 말은 경영학원론에도 나오는 말이다. 공식적 모임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비공식적 모임에서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불교모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법회가 끝나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될 수 있으면 맛집으로 가고자 했다. 동대입구역 부근에는 수 많은 맛집이 있다. 그래 보아야 한끼당 만원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두부집으로 갔다.

 

세 테이블에 두부전골을 시켰다. 국물 맛이 시원해서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법회에서 눈부처바라보기시간에 3분 스피치하는 것이 1차 소통이라면 식당에서 밥먹으면서 대화하는 것은 2차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차 소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커피타임이 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고 해산할 때 네 명이서 커피숍에 들어갔다. 무려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느긋한 마음과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거리는 다양했다. 따로 정해 놓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이야기, 남북이야기, 기후환경이야기 등을 했다. 여기에 수행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각자 체험한 이야기를 했을 때 집중이 잘 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뒷담화이다. 없는데서 남말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술자리였다면 취기에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차담을 하다 보니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정신은 맑아지고 담마토크를 하게 되었다. 유쾌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대화였다.

 

소통과 배려


법회가 반드시 무거울 필요는 없다. 의식은 여법하게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소통이다. 그래서 법회에 이어 눈부처바라보기 시간을 넣었다. 이것은 공식적 모임에 있어서 1차 소통에 대한 것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비공식모임에서 소통이다. 그렇다고 술좌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밥한끼 함께 먹는 것도 소통이고 커피타임을 갖는 것도 소통이다.

 

법회는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 법문을 통하여 무언가 건지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관계이다. 친교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가까워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공평하게 말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에 대한 문제이다. 힘들게 어렵게 참가한 참석자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것이다. 소통과 배려, 이번 9월 법회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다.

 

 

2019-09-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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