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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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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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차분한 아침이다. 오늘 아침 햇살이 유난히 빛나 보인다. 어제 비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터이자 아지트인 작은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원두콩을 그라인더로 갈은 것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어제 쓰고 싶은 것을 떠 올렸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뉴스를 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이것도 어쩌면 싫어하는 것과의 만남에 따른 괴로움일 것이다. 그러나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것은 아쉬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다.

 

세상은 문제투성이다. 삶도 문제의 연속이다. 문제 없는 때가 없다. 눈을 감기 전까지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중에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고 보면 나와 무관한 문제는 문제도 아니다. 남의 불운이나 불행에 대하여 걱정으로 일관한다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마치 환경과 기후문제로 인류의 멸망을 걱정하는 것과 같다.

 

고성제에 대하여 사고와 팔고로 설명한다. 그 중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하여 한자어로는 원증회고(怨憎會苦)라고 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원치 않는 환경이나 싫은 일도 원증회고에 들어갈 것이다.

 

원증회고는 분노와도 관련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愛別離苦)’라는 것은 탐욕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괴로운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五取溫苦)’이라고 했을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혜가 이끄는 대로

 

꼰단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았다. 그것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오온이 생멸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 죽을 정도로 괴로운 상황일지라도 오래 가지 않는다. 한없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말한다. 반드시 그치고 만다. 지금 불 같은 분노도 그치고 만다. 관중이 모두 떠난 텅빈 객석을 보는 것과 같다.

 

모든 현상이 생멸하는 줄 안다면 그저 지켜만 보면 된다. 일어 났다가 사라질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발광을 해도 내버려 두면 제풀에 쓰러지고 만다.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그라들게 되어 있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지켜 보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저 객관적으로 바라 보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가 생겨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앎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는 달리 어떠한 것도 할 것이 없다. 그가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수순단계를 끝으로 통찰을 일으킴으로써 이미 다 해 마친 것이나 다름 없다.”(Vism.22.3)라고 했다수행자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지혜가 이끌어 감을 말한다. 지혜가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다.

 

싫어하면 떠나야

 

싫어하는 것과 만났을 때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떠나고자 한다. 사람이든 환경이든 싫어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신속히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라고 말 했다. 이 말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A1.304)을 뜻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절대적인 역겨움, 탐욕의 빛바램, 소멸이라고 번역했다.

 

빠알리어 닙비다는(nibbidā)는 염리(厭離) 또는 염오(厭惡)라 하고, 위라가(viraga)는 이욕(離欲) 또는 이탐(離貪)이라 한다. 니로다(nirodhā)는 휴지(休止) 또는 정지(停止)를 뜻한다. 그래서 닙비다, 위라가, 니로다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 사라지고 소멸한다.”라는 정형구로 사용되고, 한자어로는염오, 이욕, 소멸이라고 한다.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의 세계에 대한 싫어함이다. 어느 정도로 싫어해야 할까? 극도로 싫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닙비다에 대하여 절대적인 역겨움이라고 번역했다. 다시는 쳐다 보기 싫을 정도로 구역질 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싫어하면 떠나야 한다.

 

완전한 소멸만이 

 

싫어하는 것과 만났을 때 역겨움이 일어난다. 극도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 났을 때 욕계를 떠날 조건이 된다. 이처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뒤이어 일어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의 사라짐이다. 마치 오색천이 빛이 바래지는 것과 같다. 마침내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소멸이라고 한다.

 

욕망이 소멸되면 욕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색계나 무색계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음 단계는 적멸, 곧바른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āya)”(A1.304)이라고 했다. 이 말은 초기경전에서 무수하게 나오는 정형구 중의 하나이다. 궁극적으로 열반에 이르러야 끝나는 것이다. 여기서 곧바른 앎(abhiññā)은 세 가지 사실의 특징[三法印]을 아는 것을 말하고, 완전한 깨달음(sambodhā)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닦고 익히면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멸, 곧바로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원리이다.”(A1.304)라고 말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모두 열반의 길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열반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갈 수 없다. 이 세상에 대하여 눈꼽만큼이라도 미련이 있다면 결코 이를 수 없는 곳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괴로움으로 가득찬 욕망의 세계를 염오해야 한다. 그렇다고 색계와 무색계 세계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결국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도 종착지가 아니다. 완전한 소멸만이 궁극적인 행복이다. 그래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다.

 

이 생에서 흐름에 들지 않으면

 

다음 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번 생에 안되면 다음 생에 한다는 것이다. 이번 생은 이렇게 살다가 다음 생에는 출가하여 스님으로 살겠다고 말한다. 흔히 나이든 노보살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또 극락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불교가 극락에 가기 위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음 생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큰 공덕을 쌓았더라도 이 생에서 수다원이 되지 않으면 어떤 세계로 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수다원이 되어야 안심할 수 있다. 일단 수다원이 되면 최대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범부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생겨난다.(Vism.22.5)라고 했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오로지 그 길로 갈수밖에 없다. 다시는 범부로 돌아 갈 수 없다. 이 말은 다시는 윤회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됨을 말한다. 그러나 최대 일곱번까지는 윤회해야 한다. 그래야 오염원이 완전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수다원이 되면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Stn.230)라고 했다. 여기서 커다란 잘못은 무엇을 의미할까?

 

수다원이 되면 악처에 떨어질 정도의 잘못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Stn.230)라고 했다. 여기서 네 가지 악한운명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를 말한다.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라한을 살해하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고,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 생에서 수다원이 되지 못하면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다. 다만 준수다원(cūasotāpanna)’이 되면 한번 정도는 보장된다. 인과의 법칙을 알아 삼세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었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수다원에 대하여 이러한 앎을 갖춘 통찰수행자를 두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님, 발판을 얻은 님, 존재의 운명이 정초된 님, 작은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Vism.19.27)라고 했다.

 

간난아기론을 신봉한다면

 

회의론자들은 윤회에 대하여 부정한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나 자신의 눈으로 확인 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수학자는 간난아기론을 말한다.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령 전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윤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간난아기론을 신봉한다면 굳이 애써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힘들게 오계를 지키고 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 된다. 힘들게 수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한번뿐인 인생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 가면 그뿐인 것이다.

 

회의론자들은 굳이 내생과 윤회를 믿지 않아도 선한 사람은 선하게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 간과한 것이 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선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불선한 마음에 지배받는 사람이다. 간난아기론에서는 불선업에 대한 답이 없다.

 

윤회를 부정하면 단멸론자가 되기 쉽다. 또한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론자가 되기 쉽다. 부처님이 열반을말 했을 때 정말 그런 것이 있을까?” 라며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단멸론자에 삶은 자궁과 무덤사이에만 있다. 업과 윤회의 가르침을 부정한다면 그는 더 이상 불교인이 아니다.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 설법을 듣고 출가한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인 문제로 출가한 것과는 다르다. 부처님 설법을 들어 보니 출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칠흑처럼 젊은 청년이 출가하고,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은 양가집 자제들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즉시 출가했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출가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 수 있다.

 

 

모든 결박을 끊어 버려라.

자기자신을 피난처로 하라

불멸의 길을 구하여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S22.95)

 

 

부처님은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라고 했다. 머리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즉시 끄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터번에 불이 붙었는데 그냥 놓고 볼 수 없다. 다른 모든 일 제쳐두고 먼저 불을 꺼야 할 것이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 가지 해결 안되는 문제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고 했다. 이 말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미루고 있다가 나이 먹어 늙어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때까지 사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출가를 한다. 출가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해결 안되는 것이 있어서 출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M82)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M82)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M82)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M82)

 

 

이상 네 가지는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에 실려 있다. 이를 네 가지 가르침의 지침(cattāro dhammuddesa)’이라고 하는데 양가집 자제 랏타빨라가 대왕에게 출가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첫 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 (M82)라고 했다. 이 말은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어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그대로 있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M82)라고 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가르침에 피난처가 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가만 있을 수 있을까?

 

세 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M82)라고 했다. 이 말은 저 세상에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제까지 귀중하게 생각했던 재물이나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떤 행위를 해야 할까?

 

네 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M82)라고 했다. 이 말은 이익과 욕망을 찾아서 이것저것 탐하는 것을 말한다. 갈애의 노예가 되었을 때 또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똑 같은 일을 또다시 반복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랏타빨라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출가를 선언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살 수 없음을 말한다. 만약 네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면 굳이 출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 가지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출가한 것이다.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지면

 

게으른 자들은 세상이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을 모른다. 부처님은 게으른 수행승들에게 일어나서 앉아라. 잠을 자서 너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화살에 맞아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자에게 잠이 도대체 웬말인가?”(Stn.331)라며 경책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아는 자들은 머리에 불이 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잠만 자고 있을 수 없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의 바다에 빠진다. 가르침의 바다에서 지혜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가르침의 바다에 빠져서 노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행복이 있다. 뭐니뭐니 해도 돈(Mony)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부처님 가르침의 바다에서 노니는 것만 못하다.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지면 다른 것은 시시해 보인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도 가르침의 바다에 있으면 사라진다.

 

 

2019-09-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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