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한다. 텅 비어 있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고도 말한다. 인생이 허망한 것이라면 굳이 애써 잘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한평생 즐기다가 살다 가면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로3가 환승 지하보도에 있는 젊은이여,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나가면 후회한다.”라는 포스터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태어나 보니 어느 날 어느 집에 태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개나 돼지로 태어났다면 인식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하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오고감을 알지 못하니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담마(Dhamma)를 접하면 모든 것이 명확하다. 오고감을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어쩌다가 가르침을 만나 폭 빠졌다. 앞으로 남은 평생을 가르침의 바다에 빠져 살 것을 이만한 행복이 없는 것 같다. 담마는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고 했다. 이는 연기법이 보편적인 법칙임을 말한다.

 

만류인력을 자연법칙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이 세상 모든 의문을 풀어주는 자연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난 이야기를 하면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妄想: papañca)’가 되어 버린다.

 

최악의 견해가 있는데

 

이 세상에서 최악의 견해가 아마 허무주의일 것이다. 인생은 허망한 것이라 하여 몸이 망가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서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이는 유물론적 견해와 일치한다. 정신은 물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물질이 사라지면 정신도 따라 사라져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죽은 다음에 다시 사대로 흩어진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돌아 간다.’라고도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 가셨다.’라고 말하는데 어쩌면 유물론적 견해가 반영된 것인지 모른다. 이는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스승중의 하나인 유물론자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네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S24.5)라고 주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이 사대가 흩어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유물론적 견해를 믿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이 몸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흩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동식물의 삶을 보면 어느 정도 타당하다. 식물과 달리 정신적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 동물의 경우 태어나고 죽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정신능력이 미약한 존재들이 또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고 보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정신능력이 미약하면 할수록 유물론적 견해가 힘을 받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식물은 베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베인 자리에서 또다시 싹이 나오기 때문이다. 동물을 잡아먹는 것에 대해서는 살생으로 보지만 식물을 잘라서 먹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이 그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신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존재는 다르다고 본다.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면 동물적 삶과 다름없게 된다.

 

한번뿐인 인생이라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유물론적 견해로 보면 인생은 원타임일 뿐이다. 인생이 한번 뿐이라면 소중한 것이다. 어느 누구와도 목숨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인생이 오로지 한번뿐이라면 이 생을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즐기는 행복이기 쉽다. 감각적 행복을 말한다. 인생이 한번뿐이라면 애써 감각을 초월한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도덕적인 삶이나 봉사하는 삶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한, 건강이 허락되는 한 최대한 즐기고 보는 것이다.

 

인생이 한번뿐이라면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은퇴한 사람에게 이제 남은 생 즐기며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또 나이 든 사람에게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았으니 남은 생 즐겁게 살다 가십시오.”라고 말한다. 여기서 즐긴다는 말은 감각적으로 즐김을 말한다. 이런 경우 행복은 감각적 즐김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등 오감으로 즐기는 삶에는 미래가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겼을 때를 행복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열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것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현법열반(現法涅槃; ditthadhammanibbana)’을 말한다. 이는 가짜열반이다. 오감으로 감지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즐거움이다. 그래서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D1.91)라고 말한다.

 

가짜열반의 특징은 철저하게 자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즐겨도 내가 즐기는 것이다. 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감각을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가짜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궁과 무덤사이에서

 

허무주의자는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죽어도 내가 죽는다고 보는 것이다. 즐겨도 내가 즐기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을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몸이 부서져서 죽으면 정신도 따라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철저하게 허와 무를 바탕으로 한 허무주의자에게는 도덕적인 삶이나 봉사하는 삶은 의미가 없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굳이 계율을 지키며 마음을 청정하게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라고 말한다.

 

허무주의자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고 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말과 같다. 대체 허무주의자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허무주의자의 일생에 대하여 자궁과 무덤사이에있다고 했다.


허무주의자의 일생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와서 자신의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과 귀로 들리는 것만 믿겠다는 말과 같다. 또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겠다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내생과 윤회는 허구로 보일 것이다.

 

보시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허무주의자의 견해가 득세하는 세상이라면 굳이 착하고 건전하게 살 필요가 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즐겁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을 즐기다 보면 남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감각적 행복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긴 후유증을 남긴다.


술을 마실 때는 기분이 좋지만 깨고 나서는 마신 시간 이상 괴로움에 시달린다. 또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이 계속되지 않아서 불만족이 된다. 마침내 감각을 즐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때 죽음에 대한 갈망이 일어날 것이다. 이른바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자아에 바탕을 둔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오로지 감각을 즐기는 허무주의자에게 도덕적인 삶과 봉사하는 삶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생이 한번뿐이라면 그렇게 애써 살 필요가 없다. 그래서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S24.5)라고 하는 것이다. 허무주주의자에게 있어서 보시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 된다.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에게 보시는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했다.

 

허무주의자에게 선악에 대한 과보는 없는 것이 된다. 오로지 자궁과 무덤사이에서만 생이 존재하는 허무주의자에게 도덕적인 삶이나 봉사하는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오로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등 감각을 즐기는 삶을 가치 있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5)라는 단멸론적 견해를 갖게 된다.

 

연기법으로 허무주의를

 

허무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오로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도덕적인 삶이나 봉사하는 삶은 어리석은 자의 삶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된다. 과연 그럴까?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허무주의자의 견해를 논파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허무주의자는 설 자리가 없다. 이는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Lokasamudayañc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S12.15)라는 짤막한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으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서 죽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왜 그런가? 뒤이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의 을 조건으로 발생함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에 두 가지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극단적 견해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절대유(atthita: 存在)와 절대무(natthita: 非存在)는 있을 수 없다. 절대유의 영원주의와 절대무의 허무주의는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양극단을 배격하고 중도를 설했다. 그 중도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이는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십이연기법이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되는 연기의 역관이다. 부처님은 연기의 순관으로 허무주의를 논파했고, 연기의 역관으로 영원주의를 쳐부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 허무주의는 발붙일 곳이 없다.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은 업과 무명, 갈애로 인하여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이런 사실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단멸론은 사라진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이 조건에 따라 명색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현재세가 그렇듯, 과거세도 조건으로부터 생겨났고, 미래세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라고 관찰한다.”(Vism.19.5)라고 했다.

 

현상이 조건발생하는 것을 보고서 과거도 그랬고 미래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내생과 윤회가 성립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허무주의자들은 인생은 오로지 한번뿐이라 하며 몸이 파괴되면 정신도 함께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단멸론적 견해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삿된 견해(邪見)’에 불과하다.

 

왜 단멸론이 나왔을까?

 

연기송이 있다. 전송을 보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따르면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교에 단멸론자가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기송에서 오로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만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imasmi sati ida hoti)”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Imassuppādā ida uppajjati)”라는 조건발생적 연기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교단멸론자들은 오로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만 취해서 단멸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몸이 있을 때 정신이 있다.”라고 하여 몸과 정신을 상호의존적으로 본다. 이처럼 몸과 정신을 오로지 상호의존적 관계로만 보면 자연스럽게 몸이 없을 때 정신이 없어진다.”와 같이 되어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모두 만족하고 있다. 전자만 취하면 단멸론적 견해가 된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중도를 설명할 때 반드시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십이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우리는 윤회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허무주의자들은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과를 부정했을 때 도덕적인 삶과 봉사하는 삶은 의미가 없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 된다.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죽으면 남는 것이 없다고 보았을 때 청정한 삶을 사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허무주의적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에게 있어서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말은 의미가 . 열반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만 있을 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업과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 그러나 가르침에 따르면 업의 법칙에 따라 내생과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설령 허무주의자의 말 대로 내생과 윤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믿는 것이 더 낫다. 이는 반반의 확률 때문이다.

 

이왕이면 내생과 윤회가 있는 쪽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내생과 윤회가 없는 쪽에 내기를 걸었는데 내생이 전개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막행막식하며 산 과보를 그대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간난아기론을 내세우며 윤회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윤회가 있어서 다음 생에 태어났더라도 간난아기처럼 이전 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런 윤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업의 가르침을 믿어서 다음 생에 선처에 태어난다면 다행이다. 설령 윤회가 없어서 단멸한다고 해도 이 생에서 도덕적인 삶과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면 현세에서 천상의 삶을 산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오로지 한번뿐인 인생이라 하여 오로지 감각적 즐거움만 추구하는 삶만 살았다면 현생에서 비난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감각적 즐거움은 괴로움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현생에서 지옥고를 겪는 것과 다름없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M60)

 

 

부처님의 가르침을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이는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임을 말한다.

 

부처님의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따르면 허무주의자는 설 자리가 없다. 허무주의적 견해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비난받고, 저 세상에서 고통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간난아기 이론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감각을 즐기는 삶은 비도덕적 삶이 될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 사람들에게 비난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라고 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저 세상이 있든지 없든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불행에 빠진다. 반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정견을 갖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칭찬받고 있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행운을 받는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칭찬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여, 양쪽으로 충족하며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린다.”(M60)

 

 



연기법에 따른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을 따르는 자들은 양쪽에서 행운을 받는다.”라고 했다. 윤회가 있어도 좋은 것이고, 윤회가 없어도 좋은 것이다. 한평생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윤회가 있다면 천상에서 태어나서 좋은 것이다. 설령 윤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현세에서 칭찬받으며 살기 때문에 천상의 삶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좋은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윤회가 있으면 더 좋고 윤회가 없어도 좋은 것이다. 반면 허무주의자는 윤회가 없으면 좋을 것이다. 이 생에서 마음껏 즐기다가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기는 삶에는 비난이 따른다. 즐기는 삶은 결국 괴로운 것이 되기 때문에 괴로운 삶이 된다. 그래서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면 이래도 좋지 않고 저래도 좋지 않다. 이왕이면 윤회가 있다고 생각하여 도덕적인 삶과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허무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허주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서 즐기는 삶을 산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지만 결국 즐기는 삶이 되기 때문에 불선업만 짓게 된다.

 

오로지 감각만 즐기는 삶을 사는 자는 자궁에서 나와서 무덤까지 가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면 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된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에 공덕이 있을 수가 없다. 허무주의자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허무주의자에게 보시해서도 안된다. 아무런 공덕이 없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곡물도 재산도 금과 은도

또한 어떠한 소유도

노예, 하인, 일꾼 또는 그의 친인척도

모두 놓고 가야 하네.

 

신체적으로 행해지는 것

언어적으로 행해지는 것

정신적으로 행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것이 그를 따라다니네.”(S3.20)

 

 

2020-01-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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