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이 피난처

 

 

흔히 선사들이 하는 말이 있다. “이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고?”라는 말이다. ‘이뭐꼬?’ 화두에 대한 것이다. 누가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일까? 당연히 내가 끌고 다닌다. 이 말은 정답일까? 벼락같은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잘못하면 몽둥이로 맞을지 모른다. 선사들은 할과 방으로 깨우침을 주고자 했다. 자비의 가르침일 것이다.

 

우문우답(愚問愚答)이 있다. 어리석은 질문에 어리석은 답이라는 뜻이다. 질문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림을 말한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깨달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도나 깨달음과 같은 말은 큰주제에 속한다. 영역도 넓어서 포괄적 주제에 해당한다. 뜬금없이 도나 깨달음에 대해 물었을 때 어디부터 어떻게 답해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차나 한전 하시게.”라고 했을 것이다.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질문에 그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아이는 호기심이 많다. 보이는 족족 이게 뭐야?”라고 물어본다. 단순한 질문이다. 단순한 질문에는 단순한 답이 있다. 대개 명사로 끝난다. 아이는 엄마에게 질문함으로서 언어체계를 익혀 나간다.

 




노자 도덕경에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세상사람들이 도라고 말 했을 때 그런 도는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사람들이 명칭을 말 했을 때 그런 명칭 역시 없다는 것이다. 언어로서 규정해 버리면 더 이상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언어로서 표현하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도에 대하여 또는 깨달음에 대하여 물었을 때 답을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굳이 답을 한다면 큰소리를 지르거나 지팡이로 때려 줄 것이다.

 

우문에 우답을 할 수 없다. 우문에는 몽둥이가 약일지 모른다. 애초부터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은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침묵할 것이다. 좀 더 자비로운 사람이라면 큰소리로 또는 몽둥이로 깨우쳐 줄 것이다. 악하고 큰소리를 듣는 순간, 몽둥이로 맞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날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여기 괴로운 사람이 있다. 그는 괴로움에 대하여 몸부림친다. 너무 괴로워서 스승을 찾아간다. 그는 스승님, 이 괴로움은 무엇입니까?”라며 묻는다. 그렇게 질문했을 때 스승은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머리통을 갈길지 모른다. 제자는 머리를 감싸며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할 것이다. 맞은 것이 생생하게 느껴질 때 이것이 진정한 괴로움이다. 정신적 고뇌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생각이나 사유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속에서만 존재한다.

 

괴로움이 일어날 때 괴로움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이떄 흔히 하는 말은 이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겁니까?”라며 물어볼지 모른다. 질문이 그 사람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했다. 부처님 같으면 어떻게 답했을까? 아마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라고 물어야 한다고 했다.

 

올바른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이 괴로움을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말한다면 괴로움의 유발자는 여럿 있을 것이다. 괴로움을 남탓으로 돌린다면 신을 원망하게 될지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를 만든 것도 신이기 때문에 이 괴로움도 역시 신탓으로 돌릴지 모른다.

 

괴로움의 발생 원인에 대하여 내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런 나는 있기나 한 것일까?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대체 어떤 나가 괴로움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 괴로움에 대하여 내탓이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괴로움에 대하여 네탓이오!”라며 남에게 전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런 미덕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탓이오!”캠페인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 보면 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신이 원인이라면 이 괴로움도 신이 원인이 될 것이다.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탓이오!”라고 할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내탓이오!”운동하는지 모른다.

 

부처님은 우문우답하지 않았다. 질문으로서 성립하지 않은 질문, 즉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무기(無記: avyākata)’라고 한다. “세상은 영원한가?” 등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방법에 대하여 물으면 답했다. 그것은 누구(who)’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how)’라고 물었을 때 답했다. 이는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괴로움은 어떤 연유로 생겨 났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사람들은 내탓 또는 남탓을 한다. 이렇게 하면 해결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했다고 보고 있을까? 법의 장군 사리뿟따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납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면, 세존께서 말씀대로 설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세존을 잘못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는 대로 설명하는 것이고, 그대들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S12.24)

 

 

괴로움은 접촉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괴로움은 내탓도 아니고 남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탓과 네탓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는 사견(邪見)이다. 왜 사견인가? 내가 괴로움을 만든다는 견해는 자기원인설로 영원불변의 자아(atman)을 가정한 것이다. 힌두교적 견해라 볼 수 있다. 남이 괴로움을 만든다는 견해는 타자원인설로 시간, , 자성, 업 또는 운명 등 타자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이라는 것이 ‘접촉을 연유하여(Phassa paicca)’ 생겨나는 것이라 했다. 자아원인설, 타자원인설, 내적외적원인설, 원인부정론 네 가지를 모두 부정하고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이 발생하였다고 본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접촉으로 본 것은 놀라운 가르침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가 세존이시여, 누가 접촉합니까?”라고 물은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접촉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접촉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접촉합니까?' 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접촉이 생겨납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여섯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난다.” (S12.12)

 

 

부처님은 질문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여기에 큰소리나 방망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친절하게 누가라고 질문하지 말고 무엇때문에라고 질문할 것을 주문했다. 이는 다름아닌 방법론이다. 그래야 현문현답이 된다. 이렇게 질문이 올바르면 부처님은 상세하게 알려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물었을 때 연기법적으로 답한 것이다.

 

괴로움의 발생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눈과 귀 등 여섯 감역으로부터의 접촉이다. 이를 삼사화합촉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시각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M18)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접촉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감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삼사화합촉이라고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괴로움에는 배후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Vism.19.20)라고 했다. 이 말은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이니 이것이 바르게 봄이다.”라고도 번역된다.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를 어떻게 알아볼까?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가 연기법적으로 이야기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괴로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탓이나 남탓하지 않고 연기법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단멸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뒤이어 일어나는 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오온에서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을 보는 것이다.

 

연기법을 알면 괴로움이 소멸된다. 이는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연기가 회전하면 괴로움이 발생하지만, 반대로 역회전하면 괴로움이 소멸된다.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다름아닌 오온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지금 당장 괴로움에서 해방되려 거든 호흡을 보아야한다. 호흡에 따른 배의 부풂과 꺼짐을 관찰할 때 괴로움은 사라진다. 이렇게 관찰할 때 중생도 없고, 사람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자아도 없고, 자아의 것도 없고,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고, 어떠한 자도 없고, 어떠한 자의 것도 없다.”(Smv,766)라고 했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갈애와 견해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어떠한 형상 등에 대하여 이것은 나이다.”라거나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호흡이 피난처인 것이다.

 

 

2020-02-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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