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철에 맛본 담마의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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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강독

코로나철에 맛본 담마의 진수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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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철에 맛본 담마의 진수

 

 

코로나19로 인하여 모든 것이 영향받고 있다. 특히 모임이 그렇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하여 가능하면 모이지도 말고 외출하지도 말라고 했다. 5월 들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속의 거리두기’로 전환됨에 따라 이곳저곳에서 모임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안심단계는 아니다. 마스크는 써야 할 것이다.

 

청소를 하고

 

니까야강독모임이 오랜만에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지난 1월 10일 마지막 열린 이래 무려 4개월만이다. 스승의 날을 맞이 하여 5월 15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가 있는 사무실에서 열렸다.

 

그 동안 많이 기다렸다. 코로나19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다. 다음에서 다음으로 계속 연기하다 보니 4개월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공백기간이 길었다. 모임을 갖기 전에 청소를 하기로 했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에게 한시간 먼저 와서 청소하자고 제안했다.

 

오랜만에 삼송테크노밸리로 향했다. 이번에는 차를 몰고 갔다. 전철과 지하철, 버스로 이동하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피곤했다. 특히 귀가할 때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부터는 차를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안양에서 고양까지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면 된다. 1시간 40분 걸려 현장에 도착했다.

 

 

홍광순 샘이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너른 서고는 ‘드라이브스루’가 가능한 공간이다. 차가 서고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꽤 넓다. 복층구조로 되어 있는 서고는 2층에 책이 보관 되어 있고 1층에는 사무실 겸 전재성회장이 번역작업하는 공간이 있다. 호칭은 회장으로 통일한다. 직함을 부르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회장인 것이다.

 

1층 바닥을 마대로 닦았다. 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서 마대자루로 물걸레질을 하면 하면 된다. 유경민 샘이 합류했다. 유선생은 물걸레로 책상과 주방을 닦았다.

 

 

케이크를 나누며

 

사람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이 날은 스승의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장계영샘은 꽃바구니를 준비했다. 이상길 샘은 케이크를 사왔다. 도현스님은 블루베리를 가져왔다. 강독모임을 갖기 전에 화분을 전달하고 케이크 커팅을 하여 나누어 먹었다.

 

 

오랜만의 모임이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전재성회장에게 물어 보았다. 특히 자따까 번역작업이 궁금했다. 현재 5분의 1가량 번역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전념했다면 진도가 많이 나갔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스님들이 사분율 번역을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한역으로 되어 있는 사분율을 우리말로 번역작업하는데 3 달 가량 걸렸다고 한다. 스님들 누구나 휴대하여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포켓용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스님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말한다.

 

율장은 모두 완역 되었다. 코로나19기간동안 시중에 나왔다. 모두 5권으로 된 것을 통합본으로 만든 것이다.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비구계, 율장비구니계는 번역되어 있었고, 추가로 부기를 작년에 번역했다. 부기를 합하여 5권을 한권으로 만든 것이다.

 

전재성회장은 이날 강독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통합본율장을 한권씩 나누어주었다. 강독모임에 빠짐 없이 나오는 사람들은 강독모임멤버이자 동시에 후원자들이다. 또 일부는 이번 율장 부기와 통합본 교정자로도 참여했다. 전재성회장은 일일이 사인을 해 주었다. 완역된 율장통합본 봉정식은 올해 9월경에 통도사에서 열린다.

 

 

도에도 단계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5월 첫번째 열린 강독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독송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 실려 있는 27번째 경인 ‘명상수행의 성취에서의 속도와 난이’와 28번째 경인 ‘인내의 제어와 지멸의 실천’에 대한 것이다. 찾아 보니 앙굿따라니까야 ‘실천의경3’(A4.163)과 ‘인내의 경’(A4.164)이다.

 

네 가지 실천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쉬운 실천,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쉬운 실천, 이렇게 네 가지 실천이 있다.

 

키워드는 ‘실천’이다. 전재성원장은 실천에 대하여 수행과 같은 의미라고 했다. 빠알리원문을 찾아 보니 실천에 해당하는 말이 ‘빠띠빠다(paṭipadā)’이다. 영어로는 ‘means of reaching a goal or destination, path, way’의 뜻이지만, 흔히 ‘도(道)’로 번역된다. 도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가장 낮은 단계의 도를 보면

 

네 가지 실천을 보면 단계적이다. 명상수행도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정관 등 낮은 단계에서 선정으로 높은 단계로 나아가 간다. 이는 욕망의 극복과도 관계가 있다. 가장 낮은 단계는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 (Dukkhā paṭipadā dandhābhiññā)’이 되는데,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았다.

 

 

“수행승들이여,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몸에 대하여 더러움의 관찰, 자양분에 대하여 싫어함의 지각, 세상에 즐거움을 찾을 수 없음의 지각, 모든 형성된 것에 대한 무상의 관찰, 죽음에 대한 지각을 내적으로 잘 확립한다.”(A4.163)

 

 

여기서 ‘곧바른 앎(ābhiññā)’이란 즉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신통’으로 번역된다. 경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등 6신통으로 묘사 되어 있다. 수행초기 단계에서는 신통과 같은 아빈냐가 계발되기 힘들 것이다.

 

아빈냐는 네 번째 선정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1)부정관, 2)자양분혐오, 3)즐거움없음지각, 4)형성된 것 무상관찰, 5)죽음의 지각 이렇게 다섯 가지는 선정단계 전에 닦아야 할 도, 즉 예비단계의 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몸을 고장난 하수구처럼

 

미얀마 수행센터에서는 좌선에 임하기 전에 먼저 예비단계 수행을 강조한다.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 불수념에 대한 것이다. 이중에서 부정관과 사수념이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중에 들어 간다. 전재성 회장은 부정관 등 5가지 예비수행에 대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

 

첫째, 부정관이다. 이는 ‘몸에 대하여 더러움의 관찰(asubhānupassī kāye viharati)’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회장은 자신의 몸을 ‘고장난 하수구’처럼 생각하라고 했다. 그래야 깊은 곳을 깨끗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다고 보면 어떤 일이 발생될까? 몸도 깨끗하면 마음도 깨끗하다고 볼 때 닦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즐기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탐욕, 분노와 같은 잠재성향을 깨끗이 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념처경에 따르면 “발가락 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에 이르고 피부의 표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개별적으로 관찰한다.”(D22.7)라고 했다. 다음의 목갈라나 장로의 게송이 부정관을 잘 말해준다.

 

 

“해골로 이루어지고

살과 근육으로 얽혀진 오두막

끔찍하다! 악취가 가득한 것!

타자의 지체를 자기의 소유로 삼는구나.” (Thag.1156)

 

“피부로 엮여진 분뇨의 자루,

가슴은 혹이 달린 악귀,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어,

언제나 부정한 액체가 흐른다.” (Thag.1157)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는데,

악취로 풍기고 오물로 엮여져 있다.

실로 청정을 원하는 수행승이라면,

분뇨를 피하듯, 그것을 피해야 하리.”(Thag.1158)

 

 

아들고기를 먹은 부부

 

둘째, 자양분혐오이다. 이는 ‘자양분에 대하여 싫어함의 지각(āhāre paṭikūlasaññī)’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회장은 자양분을 뜻하는 아하라(āhāra)에 대하여 음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어느 논서를 보면 ‘음식에 대한 혐오 수행’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먹는 음식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아하라는 음식을 포함하여 네 가지가 있다. 물질의 자양분, 접촉의 자양분, 의도의 자양분, 의식의 자양분을 말한다. 이를 쉽게 말하면 네 가지 식사(四食)라고 볼 수 있다.

 

사식은 존재를 윤회하게 한다. 사식은 상윳따니까야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S12.63)에 실려 있다. 사막을 횡단하던 부부가 아들을 잡아 먹어 생명을 유지한다는 끔찍한 내용이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밥을 먹을 때 아들고기를 먹는 마음으로 밥을 먹으라고 했다.

 

눈물로 아들고기를 먹은 부부는 생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음식을 먹는 것은 윤회하는 조건이 된다. 그런데 반드시 입으로 먹는 음식만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접촉도 음식이 될 수 있고, 지각도, 의식도 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이와 같은 자양분을 대해야 할까?

 

마치 아들고기를 먹는 것처럼 함부로 접촉해서는 안된다. 아무 생각없이 또는 알아차림 없이 접촉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경에 따르면 “예를 들어 가죽이 찢겨진 소가 벽에 기대어 서 있으면 그 벽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S12.63)라고 했다.

 

조금만 상처나도 아파서 어쩔 줄 모른다. 살가죽이 벗겨진 곳이 벽에 접촉되었을 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를 것이다. 무엇보다 벽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침투하면 더욱 더 고통받을 것이다. 마치 요즘 코로나19를 보는 것 같다.

 

코로나19는 접촉에 따른 것이다. 접촉하지 않으면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거리두기를 강조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한다. 또 손씻기를 생활화 하라고 한다. 그럼에도 클럽과 같은 유흥가에서 밤새도록 춤추고 놀았다면 감염될 것이다. 접촉에 따른 감염이다. 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한다.

 

감염되면 무엇보다 본인이 괴롭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접촉을 자양분 또는 음식이라고 한다. 고통과 윤회의 원인이 되는 자양분인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도

 

셋째, 즐거움없음지각이다. 이는 ‘세상에 즐거움을 찾을 수 없음의 지각 (sabbaloke anabhiratisaññī)’에 대한 것이다. 세상에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그 어떤 즐거움도 15분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즐거움 또는 행복은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감각적 쾌락의 세계나 미세한 물질계나 비물질계에서 즐거움을 찾을 만한 곳이 없다는 불만족에 대한 지각이다.”(Mrp.III.140)라고 설명했다.

 

삼계 어디를 찾아 보아도 즐거운 곳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이는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즐거움도 없다. 즐거움은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느낌도 괴롭다는 것이다. 108가지 느낌도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즐거움이나 또는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과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어떠한 것이든 느껴지는 것이 있네.

 

그것은 괴로움이라 알고

괴멸된다는 허망한 사실을 경험하고,

경험하여 그 파멸을 보니

거기서 이처럼 욕망을 떠나네.”(S36.2)

 

 

아! 머지 않아 이 몸은

 

넷째, 무상관찰이다. 이는 ‘모든 형성된 것에 대한 무상의 관찰 (sabbasaṅkhāresu aniccānupassī)’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언젠가는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삼계에서 형성된 모든 것이 무상함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경지송에 이런 게송이 있다.

 

 

“일체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일체형성된 것은 괴롭고

일체 사실에는 실체가 없다.

 

아! 머지 않아 이 몸은

아! 쓸모 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다.”

(예경지송, 350-352쪽)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다섯째, 죽음관찰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지각(maraṇasaññā)’이다. 이를 죽음의 명상 또는 사수념이라고 하여 청정도론에서 여러 페이지에 걸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언제 찾아 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 이러한 다섯 가지는 이 삶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의 조짐이 없다.”(Vism.8.29)라고 했다.

 

지금 시퍼렇게 살아 있지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어느 누가 나의 삶을 죽음으로부터 보장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예경지송에 다음과 같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 있다.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예경지송, 723쪽)

 

 

스콜라철학과 불교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가끔 괴로움에 대한 명상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백신 맞는 것으로 비유했다. 예방접종 해 놓으면 큰 병에 걸리지 않듯이. 부정관이나 사수념과 같은 명상을 하면 큰 일이 벌어졌을 때 당황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스콜라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전재성원장에 따르면 스콜라철학은 불교와 유사한 면도 있다고 했다. 고통을 극복하고 평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삶에서 최악의 경우는 어떤 것일까? 죽음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일부로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죽게 되어 있다. 태어나자 마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죽음에 이르렀을 때 당황하게 될 것이다.

 

죽음보다 최악은 없다. 평소 죽음의 명상을 하여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다. 미리미리 백신을 맞는 것과 같다. 이렇게 부정관이나 사수념을 하면 인생에서 어려움에 직면 했을 때 죽음과 같은 최악이 아닌 것에 대하여 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항상 죽음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최악을 생각하면 고통이 극복되고 마음의 평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스콜라철학과 불교가 유사하다고 했다.

 

수행자가 힘이 없으면

 

수행에는 단계가 있다. 실천도 단계가 있다. 먼저 부정관 등 감각적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선정에 들어 가기 전에 초선정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뒤, 사유을 갖추고”로 시작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는 것이 부정관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선정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단계 수행으로서 부정관 등 5가지 실천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5가지 실천수행 하는 것에 대하여 5가지 학인의 힘이라고 했다.

 

5가지 학인의 힘이란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믿음의 힘, 부끄러움을 아는 힘, 창피함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A4.163)이라고 했다. 오력과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오력은 믿음, 정진, 새김, 삼매, 지혜에 대한 것이다. 학인의 5가지 힘은 오력에서 새김과 삼매가 빠지고 그 자리에 부끄러움을 아는 힘, 창피함을 아는 힘이 들어 간 것이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부끄러움을 아는 힘, 창피함을 아는 힘은 계율과 관계된 것이라고 했다. 계율을 지키며 살면 힘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학인은 사와까(sāvaka)를 말한다. 아라한을 제외한 사향사과의 성자를 말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먼저 힘을 길러야 한다. 마치 운동하는 것과 같다. 운동하면 근육이 생겨나서 힘을 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힘을 길러야 한다. 특히 학인의 힘 중에서 부끄러워하는 힘에 대하여 전재성회장은 “힘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할 힘도 없다.”라고 했다.

 

코로나19철에 맛본 담마의 맛

 

코로나19로 인하여 4개월만에 모임이 열렸다.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모임이다.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학이나 모임이 마냥 늦추어질 수 없다. 다만 생활 속에서라도 거리두기를 실천하면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일부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 이야기했다.

 

 

모임은 한달에 두 번 열린다. 매월 둘째와 넷째 금요일이다. 시간은 오후 7시 부터 9시까지이다. 니까야를 함께 읽고 전재성회장이 해설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전재성회장의 이야기는 들을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노트를 한다.

 

말한 것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받아 적는다. 옆에 있는 선생은 녹음기로 녹음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담마의 맛’에 빠진 것이다. 빠알리삼장을 거의 완역한 전재성원장은 삼장을 꿰뚫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받아 적을 것이 많다. 담마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자비의 마음이 있기에

 

다음 모임은 5월 29일(금)이다. 5월은 코로나로 인하여 평소일정보다 일주일 늦게 열린다. 6월부터는 정상적으로 매월 둘째주와 넷째주 금요일에 열린다.

 

모임은 열려 있다. 누구나 와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후원자가 될 수 있다. 또 교정 등을 함으로 인하여 편집자가 될 수 있다.

 

처음 한두번 호기심에 왔다가 그만 두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 거리가 먼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또한 즐길거리가 별로 없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모임 이외 다른 모임은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히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모임이 유지된다.

 

 

오랜만에 공병욱 샘이 나왔다. 일자리를 옮겼는데 금요일에 시간이 빈다고 하여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계속 나올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못 나오는 사람들도 많다. 생업 때문에 못 나오는 사람들도 많고 지방이라 거리가 멀어서 못 나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모임은 3년째 유지 되고 있다.

 

모임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이제 4번째 법수가 진행 중에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법수가 11개가 되니 꽤 오래 갈 것 같다. 무엇보다 번역으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 주신 전재성회장에게 감사드린다. 전재성장의 자비의 마음이 있기에 오늘날까지 모임이 유지되고 있다.

 

 

2020-05-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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