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 부끄럽고 나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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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늙음이 부끄럽고 나쁜 것은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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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이 부끄럽고 나쁜 것은

 

 

빛 바랜 사진을 본다. 젊었을 적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그때 당시의 모습을 보고서 세월을 말한다.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 간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인생무상’을 말한다.

 

세월은 흐르지 않는다. 어떤 변치 않는 내가 있어서 세월의 흐름에 떠 밀려 가는 것이 아니다. 세월은 한번도 흐른 적이 없다. 끊임없이 이어진 사건들만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월무상’을 말한다.

 

나이 들면 서러워지는 것 같다. 슬픔을 말하기 때문이다. 억울해서 한 말기도 할 것이다. 나는 가만 있는데 세월에 떠밀려 형편없이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거울보기가 싫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왕년의 스타들은 늙은 자신의 모습을 매스컴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

 

노인이 되었을 때 서럽다고 말한다. 그것도 홀로 되었을 때 외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경멸’이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새김 등이 상실되고 자신의 처자들에게조차 또한 무시를 당하고 점점 더 몽매해지는 까닭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간은 괴로움을 겪는다.”(Vism.16.45)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신체의 장기는 파괴되고 정신 기능 또한 저하된다. 치매라도 온다면 자식들도 감당하지 못한다. 요양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홀로 되었을 때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그럴 때 인생무상과 세월무상을 느낄 것이다.

 

인생무상과 세월무상을 절감한다고 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한 회환만 있을 뿐이다. 마치 시들어 가는 꽃처럼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을 때 비애를 느낄 것이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외로움, 고독, 슬픔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늙음도 괴로움이라고 한다. 태어나는 것도,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죽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여 사고라고 한다. 늙음의 괴로움에 대하여 “사지와 지체가 이완되고, 감관이 추악하게 변화하고, 젊음이 파괴되고, 기력이 쇠퇴하고, 새김과 슬기가 상실되고, 타인에게 경멸당함”(Vism.16.45)이라고 했다. 늙음으로 인하여 심신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늙는 것은 두려운 것이 된다.

 

청정도론 인생 10단계

 

늙은 사람을 보면 남의 일이 아님을 실감한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을 때 나이가 들었음을 알게 된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찍으려고 할 때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내 젊음은 어디로 갔을까? 셀프 카메라에 찍힌 모습은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병세가 악화되어 차츰차츰 사그러드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나이 별로 다음과 같은 인생10단계가 있다.

 

 

1) 유아적 십년(0-10세)

여리고 불안정한 아이

 

2) 유희적 십년(11-20세)

그는 많은 유희를 즐긴다.

 

3) 미모적 십년(21-30세)

그에게 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4) 체력적 십년(31-40세)

힘과 기력이 크게 생겨난다.

 

5) 지혜적 십년(41-50세)

그에게 지혜가 잘 확립되는데,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도

이 시기에 지혜가 조금이나마 생긴다.

 

6) 퇴행적 십년(51-60세)

그에게 유희, 미모, 체력, 지혜가 퇴행한다.

 

7) 경사적 십년(61-70세)

그에게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8) 타배(駝背)적 십년(71-80세)

그에게 신체가 쟁기처럼 굽어버린다.

 

9) 노망적 십년(81-90세)

그는 몽매하게 되어 하는 것마다 망각한다.

 

10) 와상적 십년(91-100세)

백세를 먹은 자는 대부분 누워서 지낸다.

(Vism.20.51)

 

 

요즘 부고를 접하면 나이가 구십줄이 많다. 팔십줄도 넘어서 구십줄이 되었을 때 조만간 세 자리를 찍을 지 모른다. 인간 백세 시대가 머지 않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전인 6세기 붓다고사는 인간백세를 신체의 특징으로 구분해 놓았다.

 

인간을 백세로 보았을 때 인생의 절정은 “유희적 십년(11-20세), 미모적 십년(21-30세), 체력적 십년(31-40세)”이라고 볼 수 있다. 11세에서 40세까지 20년 까지가 인생의 절정인 것이다. 나이가 40대가 되면 유지 되다가 50대가 되면 꺽어지기 시작한다. 50대가 되면 “유희, 미모, 체력, 지혜가 퇴행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70대가 되면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고 했다. 아마도 이는 옛날 농사를 지어서 일 것이다. 힘든 노동으로 인하여 신체의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과도한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꼿꼿하다고 볼 수 있다.

 

80대가 되면 “신체가 쟁기처럼 굽어버린다.”라고 했다. 마치 낙타 등처럼 굽는다고 하여 ‘타배(駝背)’라고 한다. 오늘날 80대에서도 낙타 등처럼 심하게 굽은 사람을 볼 수 있다.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면 등이 굽어질 것이다. 마치 쪼그라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라고 본다.

 

90대가 되면 “몽매하게 되어 하는 것마다 망각한다.”라고 했다. 절망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치매(노망)에 걸리면 가족도 못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자식이 돌보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 요양원행이다.

 

100대가 되면 “대부분 누워서 지낸다.”라고 했다.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정신은 혼미하여 자꾸 잊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누워만 있다면 살아 있는 송장과 다를 바 없다.

 

인생10단계에서 6단계까지 살았다. 나머지 단계를 생각하면 끔찍하고 절망적이다. 그래서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

 

늙음에 장사 없다. 늙음에 부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윳따니까야 ‘늙음의 경’에서 부처님과 아난다가 늙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경에 따르면 “그 때 세존께서는 홀로 고요히 명상하다가 저녁 무렵에 일어나 서쪽의 양지에 앉아 등을 따뜻하게 하고 계셨다.”(S48.41)라고 했다. 인간적인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 거의 80이 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석양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왔다. 석양 햇볕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세존의 두 손과 두 발을 만지며”(S48.41)라고 했다. 석양 노을이 질 때 두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된다.

 

아난다가 물었다. 아난다는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제 세존의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가 모두 이완되어 주름이 지고 몸은 앞으로 기울고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모든 능력이 변화의 조짐을 보입니다.”(S48.41)라고 말했다.

 

부처님도 인간이다.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이 아니라 인간부처님인 것이다. 아난다가 말한 부처님은 전형적인 나이 든 노인의 모습이다. 더구나 “몸은 앞으로 기울고”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노화가 진행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아난다에게 말했다.

 

 

“아난다여, 그러하다. 젊더라도 늙게 마련이고 건강하더라도 병들게 마련이고 오래 살더라도 죽게 마련이다. 나의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가 모두 이완되어 주름이 지고 몸이 앞으로 기울고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모든 능력이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S48.41)

 

 

아난다는 가까이에서 부처님을 시봉했다. 그래서 누구 보다도 부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더구나 팔다리를 주물로 드릴 정도였다고 하면 노령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석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는 두드러지지 않았다.”(Srp.III.244)라고 했다.

 

늙음이 부끄럽고 나쁜 것은

 

나이가 들면 늙은 모습이 드러나 보인다. 혈관이 시들고, 관절은 이완되고 살이 뼈에서 불거져 나와 느슨하게 되어 거기에 매달려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더 부처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표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시봉하는 아난다에게는 두드러지게 보인 것이다. 부처님은 늙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했다.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

 

백 세를 살더라도 결국

죽음을 궁극적인 것으로 할 뿐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S48.41)

 

 

게송을 보면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라고 하여, 불쌍한 늙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에잇 나쁜 늙음이여, 늙음은 아름다움을 뺏어 가나니”라고 번역했다. 이는 “Dhī taṃ jammi jare atthu, dubbaṇṇakaraṇī jare”라는 빠알리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Dhī’는 ‘fie! shame! woe!’의 뜻으로 “저런, 부끄러운, 아(비통)”의 의미이다. 형편없이 늙어 버린 것에 대하여 무상함과 인정하지 못하는 뉘앙스도 있다. 빠알리어 ‘jammi’는 ‘vulgar; contemptible’의 뜻으로 “저속한, 경멸할만한”의 의미이다. 늙음에 대하여 비속하고 경멸할 만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빠알리어 ‘atthu’는 ‘be it so’의 뜻이다. 그래서 “Dhī taṃ jammi jare atthu”라는 문구는 “아, 이렇게 형편없이 늙어 버렸구나!”라는 뜻이 된다.

 

게송에서는 늙음을 한탄하고 있다. 추하게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한탄하는 것이다. 그래서 “dubbaṇṇakaraṇī jare”에 대하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라고 번역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늙음은 아름다움을 뺏어 가나니”라고 번역했다.

 

늙음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몸을 자아와 동일 시 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된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갈애, 자만, 유신견이 있을 때 늙음은 부끄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역서에서 늙음에 대하여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와 “에잇 나쁜 늙음이여, 늙음은 아름다움을 뺏어 가나니”라고 번역했을 것이다.

 

세월은 우리를 버렸다

 

형편없이 늙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거울을 보기 싫어 질 것이다. 또한 세월이 원망스럽고 자괴감이 들 것이다. 그래서 늙음을 한탄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늙어 버린 몸에 대하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이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매혹적인 꼭두각시”라고 했다. 이는 “Tāva manoramaṃ bimbaṃ”를 번엯한 것이다. 빠알리어 manoramaṃ는 ‘delightful’의 뜻이고, 빠알리어 ‘bimb’는 ‘an image; figure’의 뜻이다. 그래서 ‘manoramaṃ bimbaṃ’는 ‘달콤한 형상’이라는 뜻이 된다.

 

몸은 그대로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노쇠해져서 추해져 간다. 그런 육체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인생무상과 세월무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육체는 죽음으로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보라. 아름답게 꾸며진 영상, 상처투성이로 세워진 몸, 고통스럽고 망상으로 찬 것, 영원하지도 않고 견고하지도 않다.”(Dhp.147)라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다. 청정도론 인생 10단계로 본다면 두 번째 단계의 ‘유희적 십년(11-20세)’과 세 번째 단계의 ‘미모적 십년(21-30세)’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대개 스무살 전후가 육체적으로 가장 빛나는 청춘시기라고 볼 수 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빛나고 추리닝만 걸쳐도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러나 청춘은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고 했다.

 

청춘이 우리를 버린다면 중년도 우리를 버릴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중년도 노년도 우리를 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몸에 대하여 집착한다면 어떻게 될까?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얼굴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젊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늙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형편없이 늙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제나 젊고 건강했던 시절만 떠 올린다면 지금 늙은 모습은 인정하지 않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S48.41)라고 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매혹적인 꼭두각시도 늙음에는 짓밟히도다.”라고 번역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젊음과 건강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착각한다. 그래서 젊음과 건강을 남용한다. 이는 자만이다. 왜 자만인가?

 

젊음에는 젊음의 교만이 있다. 그래서 “뭇삶들은 젊은 시절에 젊음의 교만이 있는데,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A5.57)라고 했다. 요즘 코로나19시대에 이태원 클럽에서 밤새 춤추고 노는 청춘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젊음의 교만이 깨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늙었을 때이다.

 

젊음의 교만은 늙음으로 인하여 부수어 진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잘 모른다. 지금 이 젊음과 건강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이 순간을 즐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젊음과 건강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음에 대해서는 “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자주 관찰해야 한다.”(A5.57)라고 했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말한다. 늙어서 죽을 때가 되면 후회하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열심히 여행다니라고 한다. 나이가 들어 관절이 아프면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즐기라는 것이다.

 

젊은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즐기기에 바쁘다. 내일 세상이 종말이 와도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늘 즐길거리를 찾아 두리번 거린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그러다가 늙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즐기고 싶어도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을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외롭게 홀로 고독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건강할 때 힘이 있을 때 공부해야 한다. 여행 다니면서 사성급 호텔에서 머물며 황제식을 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지만 그때뿐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 공부하는 즐거움이다. 부처님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즐거움 중의 즐거움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즐거움도 있다.

 

 

“실로 다섯 존재의 다발들은

완전히 알려졌고 뿌리째 뽑혔다.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Thig.106)

 

 

2020-05-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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