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스승을 잘 선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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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어떻게 해야 스승을 잘 선택할 수 있을까?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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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스승을 잘 선택할 수 있을까?

 

 

스승도 선택할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을 선택할 권한이 없다. 짜여진 시간표대로 들어야 한다. 나의 성적을 위해서는 실력 있는 선생의 강의를 들어야 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 스승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대학에서는 듣고 싶은 과목을 들을 수 있고 듣고 싶은 교수에게 들을 수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전공필수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만약 그가 더 공부를 하기를 더 원한다면 스승을 찾아 나설 것이다. 국내에 없다면 외국에 유학 갈 것이다. 이런 경우 스승을 선택해야 한다. 제자에게 있어서 스승은 선택의 대상이 된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을 보면 선재동자는 스승을 찾아 나선다. 모두 53명의 선지식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만난 스승이 문수사리보살이다. 문수보살은 선재동자에게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참선지식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란 무엇일까? 선지식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 선지식 중에는 보살이나 비구, 비구니, 선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지직 중에는 장자도 있고, 청신녀도 있고, 청신사도 있고, 거사도 있다. 바라문과 같은 외도도 있고, 나이 어린 소녀도 있고 나이 어린 동자도 있다. 이뿐만 아니다. 선지식 중에는 왕도 있고 뱃사공도 있고, 심지어는 창녀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선지식이 아닌 사람이 없다.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재동자는 스승을 찾아 나선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스승은 제자에게 선택되어 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수사리보살은 선재동자에게 선지식을 찾는 일에 지치거나 게으르지 말고 선지식을 보고 만족한 마음을 내지 말며, 선지식의 가르침에는 그대로 순종하고, 선지식의 교묘한 방편에 허물을 보지 말라.”(신역 화엄경, 199)라고 말했다. 교묘한 방편에 허물을 보지말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 선지식이 방편으로 자신의 허물을 드러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진짜 허물로 착각하여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스승의 허물을 보았으면 즉시 떠나라고 했다.

 

스승선택 첫번째 조건: 착하고 건전한 상태가 일시적인지

 

일반사람들은 수행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다만 오랫동안 지켜 보면 정말 거룩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승으로 정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놀랍게도 맛지마니까야를 보면 스승의 선택 조건이 있다.

 

스승의 선택 조건 제1단계는 스승이 착하고 건전한 상태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시적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파악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관찰하는 수행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읽는지 알지 못한다면, 여래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눈과 귀를 통해서 인식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오염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M47.6)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데 있어서 부처님을 예로 들었다. 부처님에 대하여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사람은 부처님처럼 알지 못한다. 당연히 사람을 볼 줄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타심통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하여 신체적으로나 언어적 행동을 보고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찰랑이고 거품이 보글대면, 안에 물고기가 있다고 추론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살생을 하거나 거짓말을 말하거나하는 신체와 언어의 행위를 보고 듣고 그것이 근거하는 마음이 오염되었는지를 추론한다.”(Pls.II.380)라고 했다.

 

일반사람이라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 자신의 눈과 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지, 그가 탐욕을 부리는지는 그의 행동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그에게 분노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그가 얼머나 어리석은지는 그의 행위에서 나타남을 말한다. 일반사람이 타심통을 갖지 않았어도 행위만 보고서도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스승을 선택할 때 먼저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눈이나 귀를 통해 밝은 행위나 어두운 행위가 뒤섞여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승이 될 사람의 됨됨이가 일시적인 것인지 아닌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존자가 이 착하고 건전한 상태에 도달한지 오래 되었는지 일시적으로 도달한 것인지’를 다시 관찰해야 한다.”(M47.9)라고 했다.

 

부처님을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스승도 자신의 눈과 귀로 착하고 건전한 상태가 일시적인지 아닌지 파악해야 한다. 일시적이라면 버려야 한다. 이것이 스승을 선택하는 첫번째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승선택 두번째 조건: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지

 

스승을 정하는 두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익과 명예와 칭송과도 관련이 있다. 설령 그가 착하고 건전한 상태가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익이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한다면 달리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존자가 이 착하고 건전한 상태에 도달한 지 오래 되었지 일시적으로 도달한 것이 아니다.’고 알았으므로, 그는 그 위에 ‘이 존자 수행승은 명성을 얻고 유명해졌는데 그에게 다소간 위험이 있는지’를 다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왜냐하면, 수행승이 명성을 얻고 유명해지지 않으면, 그에게 위험은 없지만, 수행승이 명성을 얻고 유명해지면, 그에게 다소간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M47.9)

 

 

경에서는 유명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수행자라면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승이라도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란다면, 그 수행자는 악마의 낚싯바늘을 삼킨 것으로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악마 빠삐만이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S17.2)라고 했다.

 

수행자가 명성을 얻으면 유명해진다. 유명하다고 해서 다 훌륭한 것일까?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이 아니다. 머리가 희다고 해서 모두 장로는 아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모두 양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명하다고 해서 훌륭한 수행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명성을 경계 해야 하는가? 명성을 얻으면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명성에 대한 위험은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되어 있다.

 

 

위험은 자만, 오만, 교만등을 말한다. 수행승이 유명해지지 않고 추종자도 없으면, 그러한 위험은 발견되지 않으며, 조용하고 고요하지만, ‘수행승이 유명해지고 추종자도 얻으면, 그들은 날카로운 뿔로 소의 무리를 공격하는 못된 황소처럼, 사슴무리를 짓밟는 표범처럼, 다른 수행승을 여기 저기 공격한다. 존경하지 않고 예를 지키지 않고 무례하게 돌아다닌다.”(Pps.II.384)

 

 

수행자가 유명해지면 추종자가 생겨난다. 그에 따라 교만도 생겨난다. 이는 내가 누군데!”라는 우월적 자만이다. 이렇게 자만과 오만, 교만에 가득 차 있을 때 위험이 따른다. 다른 자들로도부터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성을 얻었어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위험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명성을 얻었어도 고요한 것이다.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명성은 있지만 이름을 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스승으로 삼을만하다. 그러나 명성도 있으면서 이름을 알리는, 즉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스승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것이 스승선택 두번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승선택 세번째 조건: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세 번째 스승의 조건은 무엇일까? 유명함에도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어떠한 위험도 발견되지 않으면 그 다음에 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라고 했다.

 

 

‘이 존자는 두려움 없이 고요한지, 두려움 때문에 고요한지, 그가 탐욕의 소멸을 통해 탐욕을 떠났으므로,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는 것인지’를 다시 관찰해야 한다.”(M47.9)

 

 

스승이 고요하다면 왜 고요한지 이유를 알아 보라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이다. 어떤 두려움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오염원에 대한 두려움, 윤회에 대한 두려움, 악처에 대한 두려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다. 범부에게는 네 가지 두려움이 있지만, 유학에게는 악처에 대한 두려움을 뺀 나머지 세 가지 두려움이 있다.

 

일곱 부류의 유학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제어한다. 번뇌 다한 자는 두려움을 여읜 자로 제어한다. 따라서 아라한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 경에서 두려움 없이 고요한지는 아라한에게 해당되고, “두려움 때문에 고요한지는 유학 또는 범부에게 해당된다. 그가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다면 그는 범부라고 볼 수 있다. 범부를 스승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도 두 가지로 파탄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재정문제와 애욕문제에 대한 것이다. 스캔들이 나면 반드시 재정문제 또는 여자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출가집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애욕에 대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조용하고 평온해 보여도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다면 이는 스승으로서 자격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두려움 없이 고요한지, 두려움 때문에 고요한지 알라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 나지 못한 자를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 탐욕이 소멸된 자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두려움 없이 고요한지, 두려움 때문에 고요한지를 알고서 스승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스승으로 삼는 세 번째 조건이 될 것이다.

 

스승선택 네번째 조건: 경멸하지 않는지

 

네 번째 스승의 조건은 경멸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여 스승으로 삼았을 때 한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이 존자는 대중 가운데 있는 자들이거나 홀로 있는 자들이거나, 잘 지내는 자들이나 못 지내는 자들이나 대중을 가르치는 자들이나, 그들이 물욕에 따르는 자들이건, 물욕에 오염된 자들이건, 그 존자는 그 때문에 아무도 경멸하지 않는다.”(M47.12)

 

 

여기 큰 스승이 있다. 큰 스승 밑에는 수많은 작은 스승이 있고, 그 작은 스승 밑에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있다. 그런데 수행자들 중에는 근기에 따라 탐욕이 강한 수행자도 있고 성내는 기질이 있는 수행자들도 있을 것이다. 리더라면 이런 수행자들을 경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경멸해서는 안되는가?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존재에 대한 불편부당성(tādibhāva)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살인자 데바닷따에게도 강도 앙굴리말라에게도, 재물의 수호자 라훌라에게도 성자는 평등하네.”(Pps.II.38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땔감에서 불이 나온다. 그런데 모든 땔감의 불꽃은 똑같다는 것이다. 고급 전단향목재에서 나오는 불꽃이나 소똥을 연료로 하는 불꽃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성자가 되면 평등한 것이다.

 

살인자 출신 성자가 있을 수 없고 강도 출신 성자가 있을 수 없다. 물론 불가촉천민 출신 성자가 있을 수 없다. 성자가 되면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 마치 불꽃이 화염과 광채와 광명에 있어서 똑 같은 것과 같다. 대중의 성향이 다르다고 하여 차별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아주 공정함을 보여주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스승으로 삼아야 할 네 번째 조건이다.

 

스승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란?

 

부처님은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는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스승은 그에게 가르침을 어둡고 밝은 양쪽면으로, 점점 높은 수준으로, 점점 섬세한 수준으로 가르친다.”(M47.16)라고 했다. 이렇게 가르침을 받았을 때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어떤 확신인가? 아홉가지 출세간법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즉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스승을 찾는 것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승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 벗이여, 나는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세존을 찾았다. 세존께서는 나에게 어둡고 밝은 양쪽 면으로, 점점 높은 수준으로 점점 섬세한 수준으로 가르쳤다. 세존께서 가르침을 어둡고 밝은 양쪽 면으로, 점점 높은 수준으로 점점 섬세한 수준으로 가르치는 것만큼, 그만큼 나는 이 가르침 가운데 여기 어떤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알아 가르침을 구경으로 삼게 되었고,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이고, 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참모임은 잘 실천한다.’라고 스승에 대하여 믿음을 심었다.”(M47.17)

 

 

스승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 스승이 가르침을 주는 대로 믿고 따랐을 때 구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는 스승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뒷받침된다.

 

스승에 대한 견고한 믿음은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출세간적인 길을 통해서 진리를 보고 부처님 이외 다른 스승을 두지 않는 흐름에 든 님의 믿음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성자가 됨으로서 스승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선택한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스승을 선택할 권한이 없었다. 대학교 다닐 때는 부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어떨까? 수행자는 당연히 스승을 선택할 권한이 있다. 스승이 제자를 선택하기 보다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초기경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제자는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나 스승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스승이 착하고 건전한 상태인지 관찰해야 한다. 스승이 명예를 탐하고 있는지, 스승에게 감각적 욕망이 남아 있는지, 스승이 평등하게 대하는지 관찰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라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

 

수행자가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가장 먼저 예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행조건이 맞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특히 스승이 그렇다.

 

수행자가 어느 수행처에 머물렀다. 그는 스승에 대하여서 이 사람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지 못하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하지 못했다.”(M17.25)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놀랍게도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잘 생각하여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에게 머물러서는 안된다.”(M17.25)라고 했다. 특히 수행환경까지 좋지 않으면 그날로 떠나라고 했다.

 

스승이 나의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스승이 나의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면 설령 수행 환경이 열악해도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좋으며, 쫓겨날지라도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된다.”(M17.27)라고 했다.

 

불자들은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떠나듯이 이 스승 저 스승을 찾는다. 오로지 한스승에게만 매여 있지 않아도 됨을 말한다. 그러나 스승의 조건을 파악하여 이 분이 나의 스승이다.”라고 생각되면 쫓겨날지라도 떠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지 스승이 제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경전을 스승으로 하면 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4)라고.

 

 

2020-07-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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