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사띠빳타나위빠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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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

내가 생각하는 사띠빳타나위빠사나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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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사띠빳타나위빠사나

 

 

작년 이맘때 직지사에서 위빠사나 집중수행이 있었다. 미얀마 담마마마까 선원장 우 에인다까 사야도가 지도한 56일 집중수행을 말한다. 참고로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은 혜송스님의 원력으로 세워진 한국절이다. 절을 만들어서 미얀마 상가에 기증한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 사람들은 한국절로 알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고려사라고 한다.

 

작년 7 2일 직지사 만덕전에서 템플스테이겸 사띠빳타나위빠사나 집중수행이 시작 되었다. 본래 10일 코스인데 반으로 단축하여 56일 일정으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강행군이 되었다. 새벽과 저녁에 두 번 법문이 있었고 오전과 오후에 두 번 수행점검이 있었다. 우 에인다까 사야도는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성심성의껏 지도했다. 혜송스님의 미얀마어 통역으로 인하여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56일 직지사 템플스테이 전과정을 기록해 두었다. 수행후기를 작성하여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리고 책으로 만들었다. 직지사 56일은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을 일이 된 것 같다.

 

 

 

일주년을 맞이하여 해당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사진과 함께 느낌을 올렸더니 함께 참여했던 도반이 소감을 올렸다. 이런 내용이다.

 

 

그날의 경험중에 때때로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반복적인 법문듣고 수행하는 속에서 저는 마지막 질문으로 계속 앉아서 무엇을 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보고 또 보라. 그러면 보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사야도께서 답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공식수행시간이 끝난뒤에도 더 수행을 했지만 달리 더 뭔가 더 보이지는 않았지만, 생활속에서 문득문득 그 말씀이 들려오곤 합니다.

 

멈춤과 관찰, 바른 앎과 봄이 생겨날 때까지 보고 또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겼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 (J도반)

 

 

 

 

도반은 사야도가 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지와 견으로 본 것 같다. 이는 있는 그대로 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 글을 보고서 이른 아침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다음)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사야도께서 보라.”고 한 것은 잘 관찰하라.”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관찰이라는 말은 위빠사나로 봅니다. 이를 좀더 자세히 말하면 사띠빳타나위빠사나가 될 것입니다.

 

작년 7월 직지사 집중수행 명칭은 사띠빳타나 위빠사나였습니다. 사실 이 명칭에 모든 것이 다 들어 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빳타나라는 말은 토대 또는 확립으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사띠에 토대를 둔 위빠사나 또는 사띠를 확립한 위빠사나가 됩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빳타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호흡이고 또 하나는 사띠입니다. 사띠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띠의 대상은 호흡입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배의 움직임 입니다. 배의 부름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띠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사띠에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호흡과 사띠의 관계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여기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사람이 기둥에 묶는 것과 같이,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야 한다.”(Vism.8.154)

 

 

송아지는 망아지와 같아서 제멋대로입니다. 송아지를 기둥에 묶듯이 마음을 제어 해야 하는데 여기서 기둥에 해당되는 것이 호흡입니다.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해당되는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토대(빳타나)가 됩니다.

 

마음을 호흡에 묶어 놓았을 때 마음은 호흡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호흡을 지켜 보는 것을 사띠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빳타나에서 빳타나는 줄과 같은 것이 됩니다. 송아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기둥에 묶어 둔 줄과 같은 역할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띠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띠와 빳타나입니다. 이는 알아차림과 토대입니다. 사띠는 알아차림이고 빳타나는 토대이기 때문에 사띠의 토대가 됩니다. 사띠빳타나는 마치 송아지가 기둥에 묶여진 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상에서 멀어지지 않게 묶어 두는 것이 사띠빳타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띠빳타나는 빳타나(토대 또는 확립)와 사띠(알아차림)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냐나)’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전과정에 대하여 사띠빳타나위빠사나라고 합니다.

 

호흡과 사띠, 그리고 앎이 있습니다. 위빠사나에서 이 세 가지가 가장 기본입니다. 이 중에서 사띠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띠는 호흡과 앎을 매개하기 때문입니다.

호흡은 기둥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띠는 줄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둥과 줄은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호흡은 몸을 토대로 하고, 사띠는 알아차림을 토대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띠는 토대(빳타나)와 알아차림 두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띠빳타나라고 하는데, 이는 호흡과 앎을 매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호흡은 신체적인 형성에 대한 것이고 앎은 정신적인 형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것이 사띠빳타나입니다. 사띠는 토대와 사띠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사띠빳타나라고 말합니다.

 

사띠빳타나와 위빠사나를 합쳐서 사띠빳타나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이는 사띠에 토대를 둔 또는 사띠를 확립한 관찰수행이라고 합니다. 대상은 호흡()이 될 수도 있고 통증(느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크게 몸, 느낌(감각), 마음, 법 이렇게 네 가지가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사념처라고 합니다.

 

사띠는 단지 알아차림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토대를 두었을 때 또는 대상에 확립되었을 때 사띠빳타나가 됩니다. 호흡이라면 호흡에 토대를 둔 사띠 또는 호흡에 확립된 사띠가 됩니다. 이와같은 사띠빳타나는 신체적인 호흡과 정신적인 앎을 매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사티빳타나위빠사나라고 하여 긴 명칭을 부여하는데 집중수행기간 중에 사야도로 부터 늘 듣던 말이었습니다.

(이병욱 답신)

 

 

위와 같이 카톡방에 올렸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설명이 장황해진 것 같다. 핵심은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한정해야 한다. 그 대상은 몸이 될 수도 있고, 느낌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법이 될 수도 있다.

 

대상을 한정해야 관찰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마음을 묶어 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대상에 집중하거나 몰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마치 송아지를 말뚝에 묶어 두듯이,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마음은 송아지와 같은 것이어서 내버려 두면 어디로든지 돌아 다닌다. 그러나 기둥에 묶어 두면 기둥 주변에만 있게 된다. 호흡을 예로 든다면, 호흡은 기둥이고, 줄은 사띠와 같다. 그런데 사띠는 항상 사띠빳타나의 형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알아차림과 확립(토대) 두 가지 기능이 작동된다.

 

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무상, , 무아를 통찰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느낌을 대상으로 했을 때 통증을 관찰한다. 통증에 사띠를 하는 것이다. 이때 통증은 기둥이 되고, 사띠는 끈이 된다. 사띠는 토대(확립)도 되고 알아차림도 되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통증을 사띠한다는 것은 통증을 알아차림하고 동시에 알아차림이 계속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띠하다 보면 아는 마음이 있다. 이를 빠알리어로 냐나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앎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노팅(noting)이 될 것이다.

 

통증이 한번 일어나면 계속 되지 않는다.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다음 통증이 이어서 발생한다. 마치 파도 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통증이 끊이지 않고 계속 되는 것처럼 본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욕망도 그렇고 성냄도 그렇다. 어떤 것이든지 한번 일어나면 그 즉시 사라진다. 다만 아는 마음 역시 그 즉시 사라진다. 그럼에도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통증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다. 이는 조건발생임을 뜻한다. 통증이 일어날 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으로 그친다는 것이다. 아는 마음 역시 한번으로 그친다. 그러나 통증이 계속 밀려오기 때문에 계속 아픈 것처럼 보인다. 통증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본래 통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관찰하면 통증은 일어나는 즉시 사라진다. 아는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라지는 데는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두 손바닥을 부딪쳐 하고 소리 내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통증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증을 자신의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통증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욕심도 성냄도 마찬가지이다.

 

화가 나면 그 순간에 한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화가 나는 것은 화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화를 자아와 동일시해서 그렇다. 그래서 화를 내도 내가 화를 낸다고 말한다. 탐욕도 마찬가지이다. 순간적으로 욕망이 일어났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욕망의 노예가 된다. 욕망을 내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순간적이다. 이는 잘 관찰하면 알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여기에 틈이 없다. 머무는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유지에 대하여 송곳위에 있는 겨자씨와 같다고 했다. 또 두 개의 돌을 부딪칠 때 빛이 순간적으로 번쩍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발생도 순간이고 머묾도 순간이고 사라지는 것도 순간이다. 그래서 무상이라고 한다. 무상이라고 하여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찰라생찰라멸하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한다.

 

찰라생찰라멸 하다보니 머물지 않는다. 두 손바닥을 하고 쳤을 때 순간적으로 소리를 내고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소리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어서 무아라고 한다. 이렇게 찰라적으로 생멸하기 때문에 내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착각한다.

 

사람들이 욕심내고 화내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탐욕도 내것이고, 성냄도 내것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파 죽겠다.”라며, ‘죽겠다고 말하는 것도 통증이 내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어쩌면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인지 모른다. 이는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온을 관찰하여 그것이 찰라생찰라멸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고,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심, , , 법 중에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그 대상에 대하여 사띠를 확립하여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사띠에 토대를 둔 위빠사나, 즉 사띠빳타나위빠사나라고 한다.

 

사띠빳타나위빠사나 수행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게 해 준다. 오온이 내것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 집착할 것이 없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아는 것이다. 그래서 갈애(나의 것)와 자만()과 유신견(나의 자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사띠빳타나위빠사나 수행이야말로 행복의 길로 이끄는 최상의 길임을 알 수 있다.

 

 

2020-07-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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