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도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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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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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어제 저녁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 채널을 돌리다가 케이블채널 스크린(SCREEN)에서 본 것이다. 마침 영화가 막 시작될 때 보았다. 영화 도입부에서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라는 취지로 자막이 올라갔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영화는 보는데 있어서 실패하지 않는다. 모두 3부작으로 저녁 10시경에 시작하여 새벽 12시 반 가량 끝난 꽤 긴 길이의 영화이다. 영화제목은 더 콘덕터(The conductor, 2018)’이다.

 

더 콘덕터(The conductor)

 

콘덕터는 무슨 뜻일까? 언뜻 반도체라는 말이 떠 올랐다. 반도체를 영어로 세미콘덕터(semiconductor)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공과도 관련이 있다. 전자공학과 출신들은 반도체를 뜻하는 세미콘덕터라는 말에 익숙하다. 세미콘덕터는 반은 도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콘덕터는 도체가 될 것이다.

 

사전을 찾아 보니 콘덕터는 지휘자, 전도체, 안내자의 뜻이 있다. 영화제목 더 콘덕터는 지휘자를 말한다. 다른 말로 마에스트로(maestro)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콘덕터로 이름 붙인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여성으로서 한계 때문이다.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백년전인 19020년대 말부터 시작된다. 그때 당시 여성으로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가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휘자가 되겠다는 당찬 꿈을 꾼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이다.

 

그녀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온갖 차별을 이겨내고 사상 최초로 여성지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마에스트로는 되지 못했다. 여성에게는 수석 지휘자라는 타이틀을 부여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마에스트로라는 말 대신 콘덕터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영화줄거리를 모두 나열할 수 없다. 검색하면 대강의 줄거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비평이 있어서 어떤 흐름인지 알 수 있다.

 

영화를 보고서 크게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여성승리에 대한 것이다. 불우한 처지의 소녀가 온갖 여성차별에 대한 장애를 극복하고 마침내 인간승리를 이루어 낸 것이다. 또 하나는 재능에 대한 것이다. 이는 타고난 것으로 본다. 여기에 노력과 의지까지 더해졌을 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성도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1920년대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온갖 장애를 극복해 내고 마침내 백명가량 되는 남성연주자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이라고 깔보며 협조하지 않은 연주자도 있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지휘를 가르친 선생은 지휘할 땐 폭군이 되어야 해. 민주주의론 안돼.”라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지휘자가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다. 모든 것이 남성중심인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지휘자가 될 수 없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때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여성이 지휘자가 된다는 것은 여성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과 같이 어렵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오장애설이 있는데

 

오늘날 전세계 도처에서 여성지도자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대통령이 탄생한 바 있다. 여성지도자는 사회각분야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가가면 갈수록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 여성은 최고 지위에 올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차별이자 여성불평등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중에서 불교가 비교적 양성이 평등하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서 여성불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른바 여성오장애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여자의 경(itthīsutta)’에 이런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여자가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A1.287)

 

 

여자는 아라한이 될 수도 없고 정등각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여성장애설이다. 여성오장애설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나열하면 정등각자(sammāsambuddha), 전륜왕(cakkavattī), 제석천(sakkatta), 악마(māra), 하느님(brahma)을 말한다.

 

여성오장애 등장하는 다섯 가지는 여자는 불가능하지만 남자는 가능한 것이다. 이는 남자가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있고 가능하지 일이다.”(A1.28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구전(口傳)과 기록, 어느 것이 더 정확할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되는 것이 있다.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하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차별한다고 발끈할 것이다. 그럼에도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회장의 글을 보았다. 불교페미니즘과 관련된불교와 섹슈얼리티에 실려 있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 경전이 후대에 문자로 확실하게 기록된 것은 붓다 사후 500년이 지나서였는데, 문자로 기록되었어도 엄밀히 말하면 그 정확성에는 한계가 있다. 인도어는 고유의 악센트나 단어의 톤 같은 것이 있어서 정확하게 전달되는데, 글자는 악센트나 톤을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불교와 섹슈얼리티, 117)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회장은 빠알리삼장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전회장에 따르면 구전(口傳)이 기록보다 비교적 정확하다고 했다. 이는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는 구전 특유의 악센트와 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자로 기록되면 오류가 발생되기 쉽다. 그런데 요즘 BTN에서 대활약하고 있는 자현스님에 따르면 기록한 것이 구전보다 더 정확하다고 했다. 구전하다 보면 잊어버릴 수도 있고 건너 뛸 수도 있지만 문자로 기록된 것은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상반된 주장이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부처님 위에 무심도인(無心道人)?

 

오늘날 경전은 모두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문자화과정에서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번역가들은 이런 오류를 짚어 낸다. 여러 종류의 기록물을 대조해 보기 때문이다. 기록하는 과정에서 오자나 탈자가 없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한줄이 통째로 빠져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최근 허정스님이 사십이장경 번역의 문제점을 블로그에 올렸다. 이는 무심도인(無心道人)에 대한것이다. 진제스님의 해운정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부처님 위에 무심도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전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역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진제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종정스님이다. 그런데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해운정사에서는 무심도인에 대하여 부처님의 진리법에는 이렇게 소승의 경지, 대승의 경지, 부처님의 경지, 그리고 부처님의 경지 위에 다시 무심도인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소개해 놓았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크게 어긋난 것이다. 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는 없기 때문이다.

 

허정스님은 무심도인 번역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A9.20)과 비교하여 오류를 지적했다. 허정스님은 무심도인과 관련된 글을 스님의 블로그에 올렸는데 누군가 고발하여 삭제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스님의 글은 불교포커스에 조계종은 벌거벗은 임금님’(2018-01-10)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경전을 읽을 때는

 

빠알리니까야 번역전문가에 따르면 구전된 것은 특유의 악센트와 톤으로 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전승된다고 한다. 더구나 함께 합송하기 때문에 틀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된 것은 기록자에 따라 오류가 발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운정사의 무심도인에 대한 해석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번역전문가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 박사가 다섯 개 가진 학자라도 자신의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하여 함부로 이야기한다면 구업이 될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경전에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는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잘 파악해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한가지는 그때 당시의 사회현상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인오장애설이 전승과정에서 오류가 발생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 당시 사회상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으로서 임신, 출산 등 생물학적 조건과 여성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경전이 만들어졌다면 오늘날 여성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의 능력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수행자가 되면 성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니까야에는 여성오장애설과는 별도로 여성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여성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로서 테라가타가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부처님과 동일한 경지의 깨달음을 성취했다. 이는 부처님도 아라한이고 제자들도 아라한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여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테리가타를 보면 악마가 여성수행자라고 하여 깔보는 내용이 있다. 악마는 수행녀에게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Thig.60)라고 경멸했다. 이에 수행녀는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생겨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Thig.61)라고 말했다.

 

여기서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vipassato’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vipassato’는 남성명사로 되어 있다. 수행녀는 마치 자신이 남성인 것처럼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여기서 남성으로 표시된 것은 직접 쏘마와 관계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오히려 쏘마가 자신은 남성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Ggs.I.201)라고 했다.

 

수행자가 되면 사실상 성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는 여성법우들을 대할 때도 그렇다. 불교교양대학의 여성법우들과 이야기할 때 여성으로 보기 보다는 인간으로 본다. 같은 길을 가는 도반으로 보는 것이지 여성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출가수행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으면 더 이상 남성이나 여성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똑같은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그럼에도 수행자에 대하여 여성이라고 하여 여성성을 강조한다면 이는 악마나 하는 말이다.

 

악마는 아들을 잃고 비구니가 된 끼싸 고따미에게 말을 걸었다. 악마는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S5.3)라며 모욕적인 말을 했다. 이에 끼싸 고따미 수행녀는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S5.3)라고 말했다. 수행녀에게 더 이상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성의 구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유리한 것만 쓰지 않는다

 

영화 더 콘덕터에서는 여성으로서 장애를 극복하고 마침내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다는 입지전적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그 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도 있다.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선생이 강제로 성폭행하려 한 것이다.

 

남자선생은 여자가 지휘자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남성을 지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업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아래에 있어야 해!”라며 성폭행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여자주인공은 남자를 뿌리치고 도망쳤다.

 

최근 미얀마스님의 범계행위에 대한 글을 올렸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올린 것이다. 성자를 유혹하는 여인을 주제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여자보다는 남자의 잘못이 더 크다고 했다. 블로그에서 이런 댓글을 보았다.

 

 

당신은 그 출가자가 여성의유혹에 넘어갈만큼 무지했을거라고 생각하는가?

그 수행자가 여성의 욕심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범계하였다고, 여성들이 그를 따라다녔다고, 그 중 한 명이 그를독차지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 출가자는 범계를 하였다고, 어떻게 그렇게 무지하고 편향된 당신 상상의 자극적이고 그릇된 이야기를 사실화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가?

당신은 당신의 말과 글의 어떤 부분이, 고통받는 사람에게 어떻게 읽히는지에 대해 상상해본 적 있나?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당신의 터무니없는 단정으로 인해 어떤 고통을 당할 수 있는지 상상해본 적 있는가?

당신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의지를 가지고 글을 썼는가. 아니면 당신은 글을 완성하기 위해 당신의 상상과 짐작을 사실화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상상을 사실화하였지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이 약자이고 당사자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기존의 편향된 사고에서 나온 자기 상상을 사실화하는 대신 현실에 대해 더 탐색하고 공부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무지는 폭력이 될 수 있다.”(S법우님)

 

 

글을 쓸 때 유리한 것만 쓰지 않는다. 때로 불리한 것도 올린다. 댓글을 보면 글쓴 사람의 무지를 탓하고 있다.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남녀간의 문제는 반반으로

 

스님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특히 계율을 중시하는 테라와다불교 스님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만일 범계행위가 발생했다면 여자의 유혹에 따른 것이 더 클 것이라고 보았다. 세상에는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녀간의 문제는 반반으로 본다.

 

부부싸움을 하면 반반의 문제로 인한 것이 되기 쉽다. 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만한 사유가 있다. 이혼사유도 그렇다. 여자의 말만 들으면 남자만 문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스님과 신도의 추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은 성폭행을 시도하려는 남자선생을 밀쳐 내었다. 이는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다. 만일 여자가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었더라면 이는 나중의 이익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이익이 되기 때문에 위계에 따른 성폭행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성폭행이나 성추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남자의 책임이 크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얀마스님과 관련된 글은 비공개로 전환시켜 놓았다. 아직 어느 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삭제하지 않았다. 미얀마스님과 관련된 교계신문의 기사가 있기는 하지만 피해자의 주장만 실려 있다. 미얀마 스님의 이야기도 들어 보아야 한다. 반반의 문제이기 쉽다.

 

피해여성은 왜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왜 뿌리치지 못했을까? 그럼에도 이런 추문이 일어났다는 것은 위계에 있어서 상위에 있는 스님의 책임이 크다.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욕계세상에서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이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남자는여자에게 끌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만일 욕계사람들에게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가 될 것이다.

 

짐승의 세계에서는 힘이 지배한다. 특히 수컷의 세계에서는 헤게모니장악을 위해서 번식기가 되면 격렬한 싸움을 한다. 만일 인간세상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면 싸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에 대하여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A2.8)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양심을 말하고, 창피함은 수치심을 말한다. 양심은 내적 부끄러움이고 수치심은 외적 부끄러움에 대한 것이다. 인간만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다. 욕계에서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면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나 다름없다.

 

영화속에서 남성 중심의 세상은 다름 아닌 수컷중심의 세상이다. 힘의 논리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조폭집단과 다름없다. 이런 힘의 논리는 지금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완전한 양성평등은 아직도 요원하다.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남녀갈등문제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욕계를 탈출해야만 성평등이 이루어진다. 자연스럽게 성폭력, 성추문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도 사라질 것이다.

 

 

2020-08-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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