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하나 전 찰나를 기억해야” 김진태 선생의 ‘기억챙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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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하나 전 찰나를 기억해야” 김진태 선생의 ‘기억챙김’에 대하여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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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하나 전 찰나를 기억해야” 김진태 선생의 기억챙김에 대하여

 

 

요즘 종종 깜박깜박한다. 때로 걱정되기도 한다. 기억력이 많이 약해진 것일까? 주의력이 약한 것일까? 까맣게 잊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중에라도 기억난다면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은 기억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아마 관심을 두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다지 중요시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속된말로 영양가 없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억을 놓친다는 것은 염려스럽다.

 

기억에는 오래된 것도 있고 최근 것도 있다. 유년시절과 같은 오래된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처음 접한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가스불을 잠그었는지 잠그지 않았는지와 같은 것을 말한다. 머리를 감았는지 감지 않았는지에 대한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사띠하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항상 주의기울여 관찰하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수행에 있어서 사띠는 기억이다. 바로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는 행선이나 좌선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행선을 할 때 3단계 또는 4단계, 5단계, 6단계 행선이 있다. 6단계 행선의 경우 발을 듦, 올림, 나감, 내림, 닿음, 디딤순으로 진행된다. 이와 같은 여섯 단계를 사띠하려면 천천히 해야 한다.

 

경행과 행선은 다른 것이다. 경행은 경쾌하게 걷는 것을 말한다. 포행이라고도 한다. 참선을 한 다음 몸을 푸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행선은 아주 천천히 한다. 한동작 한동작 기억하는 것이다. 마치 슬로우모션을 보는 것처럼,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천천히 움직인다. 그래야 법을 볼 수 있다.

 

좌선을 하면 호흡관찰을 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호흡에 따라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부품이 일어나면 마음도 따라 간다. 꺼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관찰했을 때 대상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풍대와 관련하여 대념처경에서는

 

행선이나 좌선할 때 움직임을 관찰한다. 움직임은 바람에 대한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 중에서 바람에 대한 것이다. 이를 풍대(vāyo-dhātu)’라고 한다. 참고로 지대는 딱딱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느껴지고, 화대는 덥거나 차가움으로 느껴지며, 풍대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 한편 수대는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며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의문(意門, mano-dvāra)으로만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풍대와 관련하여 대념처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5)

 

 

신념처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의 관찰에 대한 것이다. 즉 행, , , 와에 대한 것이다. 걸어간다고 했을 때 누가 가는 것일까? 아마 내가 걸어 간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행선을 하다 보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물질 작용으로 가는 것이다.

 

걸어 갈 때 누구도 내가 간다라고 말하면 망상이 된다. 자아가 개입되었을 때 이는 관념에 빠져 살게 된다. 실재를 보지 못하고 환상으로 사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나는 가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면, 즉 의도가 일어나면 발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여기서 의도는 마음의 작용(심소)이다.

 

심소에 따라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다. 발을 옮기려고 했을 때 이는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도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의도가 일어났을 때 비로소 발이 움직여진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침투에 의해서 전신이 앞으로 이끌어져서 감이라 불린다.”(Smv.766)라고 말한다.

 

풍대와 몸의 암시

 

행선을 할 때 의도가 작용한다. 의도에 따라 발이 들려지고 나아가고 내딛는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하여 풍대로 본다. 바람의 요소가 작용한 것이다. 머물 때도 마찬가지이고 설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서리라고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바람을 생기게 하고 바람은 암시를 생기게 하여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온몸이 아래로부터 곧게 서는 상태를 서는 것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자세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한다.”(DA.iiii.767)

 

 

움직일 때 세 가지 요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의도, 암시, 움직임이다. 움직임이 있기 전에 가장 먼저 의도가 있고 그 다음 움직이게 하는 암시가 있는데, 이 암시가 바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팔을 든다면 팔을 들려는 의도가 있고, 실제로 팔을 들게 하는 풍대의 작용에 의해서 팔이 들려짐을 말한다. 이때 팔을 들게 하는 암시가 있는데 이는 풍대 작용에 따른 것으로 본다.

 

암시와 관련하여 아비담마논장에서는 물질로 설명한다. 물질에는 28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암시물질이 있음을 말한다. 암시물질은 24가지 파생물질 중의 하나이다. 또 암시물질은 10가지 추상물질중의 하나이다. 참고로 추상물질은 허공, 몸의 암시, 말의 암시, 가벼움, 부드러움, 적합함, 생성, 지속, 쇠퇴, 무상을 말한다.

 

암시물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몸의 암시말의 암시이다. 붓다아비담마에 따르면 암시물질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고, 그것을 수단으로 남의 의도를 이해하는 몸과 입의 특별한 작용이다.”(붓다아비담마, 298)라고 설명된다.

 

몸의 암시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도록 손이나 머리, , 다리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말을 하지 않고 눈빛으로 말하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보고 받을 때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이런 몸의 암시와 말의 암시는 마음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에 의해 야기되고 오직 한 마음순간 동안만 지속된다.”(붓다아비담마, 299)라고 말한다.

 

바로 하나 전 찰나를 기억해야

 

행선을 할 때 발을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어야 움직임이 있게 된다. 여기에는 바람의 요소가 작용한다. 바람의 요소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라고 했다. 움직이려는 의도가 바람의 요소로 전달될 때, 즉 움직이기 위한 암시를 줄 때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선할 때 왜 기억이 중요할까?

 

행선을 할 때 하나하나 동작을 잘 기억해야 한다. 이를 사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전 동작을 기억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근 김진태선생이 출간한 책 반야심경의 바른이해’(민족사)를 읽었다. 책에서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으로 번역된 사띠(sati)바로 하나 전 찰나의 기억이다. 다만 수행과정에서 과거의 오온과 미래의 오온을 관찰하는 단계에서는 예외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의 것을 기억하는 것만을 기억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 전의 찰나의 것도 과거이며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놓친다. 사념처의 수행에 있어서 사띠는 후 찰나의 마음이 전 찰나의 몸과 마음을 보도록 해 주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러한 기억챙김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야 수행 중에 업력에 의한 번뇌와 망상이 산란하고 집요하게 일어나는 것을 차단할 수 있고, 그리하여 집중과 관찰하는 힘을 쌓아 갈 수 있게 된다.

 

바른 기억챙김을 확립하는 방법이 사념처의 관찰, 곧 위빳사나 수행이다. 위빳사나라는 지혜를 얻는 수행은 사념처라는 기억의 대상을 관찰하여 그것들의 본성이 무상--무아라는 것을 통찰하게 만든다. 사띠챙김이 없을 때는 실재들의 본성을 볼 수가 없어 단지 개념만 알게 된다.

 

그래서 평생동안 존재-자아-남자-여자라는 등 개념적-실체적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을 개념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할 때는 항상 탐심이나 진심 등의 번뇌가 일어날 수 있다.”

 

(김진태, 반야심경의 바른이해, 158-159)

 

 

김진태선생의 반야심경의 바른이해는 초기불교경전을 근거로 하여 공사상을 설명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반야에 대하여 공성의 체득의 지혜라고 했다. 그런 공성은 열반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성인들의 도와 과의 마음의 대상이 열반이기 때문에 결국 공성의 체득은 초기불교의 깨달음의 내용과 다른 것이 아니다.”(23)라고 했다.

 

반야심경의 지혜에 대하여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해설한 책을 보면 사띠에 대한 것도 있다. 팔정도에 있어서 정념을 설명할 때 나온 것이다. 그런데 김진태선생은 사띠에 대하여 기억챙김또는 사띠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특히 기억챙김과 관련하여 한 찰나 전의 기억이라 하여 대단히 중요시했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바르게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초기불교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은 대중강연에서 늘 강조한 말이 있다. 그것은 찰나생 찰나멸에 사무쳐야 합니다.”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찰나생찰나멸을 빼놓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한다.

 

김진태선생은 하나의 찰나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한 찰나를 놓치면 그 사이에 망상이 치고 들어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언어로 개념화된 망상이 치고 들어오면 남자다’ ‘여자다등으로 분별이 일어나서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을 말한다.

 

김진태선생은 한찰나도 놓쳐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려면 바로 이전 찰나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억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사띠에 대하여 기억챙김이라고 한 것이다.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처럼

 

어떤 이는 사띠에 대하여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포괄적으로 보았을 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념처수행으로 한정했을 때는 적합하지 않다. 알아차림을 뜻하는 삼빠쟌나(sampajañña)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사념처수행에서 늘 함께 쓰이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사띠와 삼빠쟌나이다. 마치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처럼 늘 함께 쓰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각자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사띠(sati)는 어원적으로 ‘memory’로서 기억의 뜻이다. 삼빠쟌나(sampajañña)‘clarity of consciousness’의 뜻으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두 단어, 사띠-삼빠쟌나(sati-sampajñña)’에 대하여 한자어로 정념정지(正念正知)’라고 말한다. 올바르게 기억하고 올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올바르게 기억하고 올바르게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대상과 관련이 있다. 사띠는 정해진 대상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삼빠쟌나는 정해진 대상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대하여 기억을 확립하는 것과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아는 것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사띠에 대하여 단지 마음챙김이라거나 알아차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사띠에 대하여 기억또는 새김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다. 기억이 더욱 더 강화된 것이 새김이기 때문이다.

 

사띠를 확립하는 것에 대하여

 

사띠를 기억으로 보고 삼빠쟌나를 올바른 알아차림(또는 분명한 앎)으로 보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사띠숫따(satisutta)’(S47.2)를 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해 놓았다. 먼지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새김의 확립을 실천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1)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관찰한다.”(S47.2)

 

 

상윳따니까야 사띠숫따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과도 병행한다. 다만 대념처경과 다른 것은 도입부에 어떻게 새김의 확립을 실천하는 것인가?”라는 문구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가 네 가지로 한정 됨을 말한다. 즉 몸에서 몸에 대한 관찰(kāyānupassī: 身念處), 느낌에서 느낌에 대한 관찰(vedanānupassī: 受念處), 마음에서 마음에 대한 관찰cittanupassī :心念處), 담마에서 담마에 대한 관찰(dhammanupassī: 法念處)을 말한다.

 

신념처에서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kāye kāyānupassī)”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몸은 물질적인 몸으로 지체와 머리 등의 것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몸에서 몸을 관찰하여라는 반복적인 표현은 그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될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명상의 대상을 명확하게 규정할 목적을 갖고 있다.”(Smv.756)라고 했다.

 

신념처와 신념처관은 다른 것이다. 신념처는 관찰의 대상을 말하고, 신념처관은 관찰의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신념처는 사띠에 대한 것이고, 신념처관은 삼빠쟌나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관찰의 대상을 정하는 것이 중요할까? 이에 대하여 송아지비유를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목우자가 야생의 암소 모든 우유를 삼키고 성장한 야생의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암소에게서 떼어내어 한쪽 구석에 커다란 기둥을 박고 거기에 밧줄로 묶으면, 그 송아지가 여기저기 날뛰어도 도망 갈 수가 없고 그 기둥 가까이 앉거나 누울 수 있듯이, 그 수행승은 오랜 시간 형상 등의 대상의 맛에 심취한 사악한 마음을 제어하고자 형상 등의 대상에서 떼어내어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게 해서 그곳에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 그 마음이 여기저기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고, 그 대상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통해서 가까이 앉고 누울 수 있게 된다.”(Vism.8.153)

 

 

청정도론에서는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는다라고 했다. 호흡은 기둥이고 사띠는 밧줄이라는 것이다.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을 묶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송아지는 밧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를 행경(gocara)이라고 한다.

 

행경과 관련하여 원숭이의 경에서 낯선 영역를 걷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처가 아닌 낯선 영역을 거닐면 악마가 그 기회를 얻고 악마가 그 대상을 얻는다.”(S47.7)라고 했다.

 

낯선 영역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말한다.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하여 낯선 영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처, 아버지의 영역을 거닐어라.”라고 했다. 여기서 아버지의 영역에 대하여 아버지의 영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S47.7)라고 했다.

 

사념처는 네 가지 관찰의 토대를 확립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것이라면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가 된다. 호흡에 대한 것이라면 신체의 형성을 멈추게 하는 들숨과 날숨이 신체이고, 토대는 새김이고, 관찰은 앎이다. 신체는 토대이지만, 새김은 아니다. 새김은 토대일 뿐만 아니라 새김이다. 그 새김과 그 앎으로 신체를 관찰한다. 그래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새김의 토대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Vism.8.185)라고 했다.

 

신념처에서 호흡은 기둥이고 사띠는 밧줄과도 같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호흡과 사띠는 둘 다 토대가 된다. 그런데 사띠는 토대와 앎이 있다고 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띠는 심소중의 하나로서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는 마음이 있다. 바로 이전 찰나를 아는 것이다. 그래야 사띠의 밧줄로 호흡의 기둥에 묶어 둘 수 있다.

 

알아차림에 대하여

 

신념처는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두는 것과 같다. 이렇게 호흡의 밧줄로 묶어 두면 마치 송아지가 밧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몸에서 몸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 관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올바른 알아차림을 실천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나아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보는 것과 살피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굽히는 것과 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법복과 발우와 가사를 지니는 것을 올바로 알아차리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대변과 소변을 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가고 서고 앉고 잠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S47.2)

 

 

사띠가 관찰의 대상의 토대에 대한 것이라면, 삼빠쟌나는 토대가 되는 대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이를 올바로 알아차림한다고 하여 삼빠쟌나(sampajñña)라고 한다.

 

올바로 아는 것과 분명히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대소변을 보는 것에 관해서는 올바로 알아차림한다고 하여 삼빠자나(sampajāna)’라고 하지만, 호흡에 대해서는 분명히 안다라고 하여 빠자나띠(pajānāti)’라고 말한다.

 

대소변을 보는 것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대변과 소변을 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린다.(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라고 했다. 이는 분명히 안다라는 뜻의 빠자나띠(pajānāti)올바로 알아차린다라는 뜻의 삼빠자나(sampajāna)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상에서 알아차림

 

알아차림에는 일상에서 알아차림과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있다. 일상에서 알아차림은 대소변을 보는 것처럼 올바른 알아차린다라 하여 삼빠쟌나로 표현된다. 그러나 수행에서 알아차림은 호흡관찰처럼 분명히 안다라고 하여 빠자나띠로 표현된다.

 

몸관찰에서 호흡관찰과 대소변관찰하는 것은 다르다. 호흡과 관련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안다.”(D22.3)라고 했다. 여기서 분명히 안다는 것은 빠자나띠(pajānāti)에 대한 번역어이다. 왜 이렇게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을까?

 

호흡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지혜와 관련이 있다. 이는 빠자나띠라는 말이 지혜를 뜻하는 빤냐(pañña)의 어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자나띠는 알아차림이상의 의미가 있다. 꿰뚫어 아는 것이다. 그러나 대소변을 볼 때는 꿰뚫어 알 필요는 없다. 단지 올바로 알아차림하면 그뿐이다.

 

부처님은 빠자나띠와 삼빠자나를 구분하여 사용했다. 호흡관찰할 때는 빠자나띠를 사용하여 분명히 안다라고 했고, 대소변 볼 때는 삼빠자나를 사용하여 올바로 알아차림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일상에서 알아차림은 대소변을 보는 것과 같은 행위를 말한다. 이를 삼빠쟌나라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올바른 알아차림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행동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자신이 의도한 행위에 대한 가치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2) 수단의 적합성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적당한 수단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3) 활동반경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다양한 행위에 종사하는 명상주제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4)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실체적인 자아가 없는 조건적 과정으로서 행위에 관한 올바른 알아차림.”(Srp.III.182)

 

 

대소변을 보는 것 등 일상에서 알아차림하는 것은 통찰과는 거리가 있다. 단지 알아차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단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네 가지를 설명했는데, 이는 행위와 관련하여 그것이 1)이익이 되는 것인지, 2)적당한 것인지, 3)영역이 분명한지, 4)미혹한 것인지에 대하여 올바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네 번째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은 행위의 배후에 주체가 없음을 말한다.

 

수행에서 알아차림

 

수행에서 알아차림 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안다또는 꿰뚫어 안다라고 하여 빠자나띠라고 한다. 호흡관찰에서와 같이 꿰뚫어 아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꿰뚫어 알았을 때 다음과 같은 통찰이 생겨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몸에 대해 몸을 안으로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몸을 밖으로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몸을 안팍으로 관찰한다. 또는 몸에 대해 생성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소멸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생성과 소멸의 현상을 관찰한다.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새김이 있는 정도만큼 몸이 있다라는 새김이 이루어진다.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와 같이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D22.6)

 

 

현상에 대하여 면밀하게 관찰하면 현상이 생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움직임도 생멸하고 움직임을 아는 마음도 생멸한다. 이는 다름 아닌 찰나생찰나멸이다.

 

생멸에는 머무는 것이 없다. 일어나는 즉시 사라진다. 그래서 머무는 것에 대하여 송곳끝에 있는 겨자씨와 같다’(Dhp.401)고 했다. 생겨나는 것에는 조건이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없다. 더구나 머물지도 않고 즉시 사라진다. 그래서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찰나생찰나멸한다. 찰나생찰나생하기 때문에 무상이다.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족이다.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서 무아이다.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이 없다.

 

기억이 있어야 알아차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띠에 대한 번역어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사띠의 본래 의미는 기억이다. 그런 기억은 오래 된 것도 있고 한 찰나 전의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전제 되어야만 다음이 있다는 것이다.

 

사띠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수행에 대한 것과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항상 삼빠쟌나와 함께 사용된다. 그래서 사또 삼빠자노(sato sampajāno)’ 또는 사띠마 삼빠잔노(satimā sampajāno)’라 한다. 이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라고 번역된다.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사념처에 대한 것이다. , 느낌, 마음, 담마 이렇게 네 가지에 대상에 대하여 기억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관찰이다. 그래서 사념처는 크게 사띠와 삼빠자나로 나눌 수 있는데, 사띠는 사념처에 대한 것이고, 삼빠자나는 사념처관에 해당된다.

 

사띠는 일반적으로 기억의 뜻이 있고, 삼빠자나는 알아차림의 뜻이 있다. 기억이 있어야 알아차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김을 확립하고 알아차리며(sato sampajāno)”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사띠가 단독으로 쓰일 때가 있다. 그럴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기 쉽다. 이는 부처님이 재가신자 마하나마에게 일곱 가지 올바른 성품을 설명하면서 새김을 확립합니다. 그는 최상의 새김과 분별을 갖춥니다. 그는 오래 전에 행한 것이나 오래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하고 회상합니다.”(M5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뼈에 사무치도록 새기고 있어야 한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있어야 수행도 할 수 있다. 가르침을 모르면 정견도 가질 수 없고 가르침을 사유할 수도 없어서 사견에 빠질 수 있다.

 

불교인들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함으로써 불교인이 된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 없이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했다.

 

사띠의 본래 뜻은 기억이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 알아차림 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이는 정확한 뜻이 아니다. 사띠는 기억이나 새김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수행할 때는 한 찰나 전의 것을 기억해야 하고, 일상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2020-09-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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