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스님의 도로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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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명진스님의 도로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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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의 도로아미타불

 

 

스님이야기는 재미 있다. 스님의 개인사에 대한 것이다. 출가이야기에서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명진스님의 이야기도 그렇다.

 

명진스님의 '스님은 사춘기' 32화를 유튜브에서 보았다. 이번 회는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다”(2020-10-10)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스님은 자신의 공부에 대하여 왜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했을까?

 

 

명진스님 이미지는

 

명진스님은 좌파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또 운동권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에게는 과격한 이미지이다. 정말 그럴까? 스님을 직접 만나보고 전화통화해 본 바에 따르면 따뜻한 스님이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스님이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스님이다. 무엇보다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스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행하고 정진하는 스님이라는 사실이다.

 

신림동 고시촌에 S정사가 있다. S정사 창건주 S선생에게 가장 존경하는 스님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S선생은 명진스님이라고 했다. S선생은 스님이 조계사 옆 우정총국에서 조계정 개혁을 위한 단식농성 하고 있었을 때 찾아보았다고 한다.

 

스님에 대한 호불호는 극과 극이다. 어떤 이는 열광적으로 좋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비판적이다. 누구나 호불호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호불호가 분명할수록 큰 인물이라는 것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다. 김대중대통령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은 비토했지만 또 일부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인기연예인도 호불호가 갈린다. 안티가 많을수록 인기가 있음을 반증한다. 큰 인물은 광팬도 있지만 안티도 많다. 이재명도 그런 케이스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낙연과 이재명의 지지율이 팽팽하다. 둘의 지지율을 합하면 민주당 지지율 보다 10%가 더 많다. 이는 이재명의 지지자가 더 확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낙연의 경우 광팬도 없고 안티도 없는 편이다. 반면 이재명은 확실한 지지자도 있고 반대로 극렬한 안티도 있다는 사실이다. 안티나 비토층이 있어야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명진스님에게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무리일까?

 

마음달 홀로 밝으니(心月孤圓)

 

명진스님은 32화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출가이유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했다. 이는 곧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으로 전개될 수 있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자연스럽게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이런 의문과 함께 안거철 마다 정진했는데 마침내 봉암사에서 의문을 풀었다고 했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뭘까? 지극히 또 묻고 또 묻고, 물음 속에서 알려고 들어가는 것. 지극히 묻다보니까 물음속에 빠지고 물음으로 들어가버려. 그걸 의심, 의정, 의단, 선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데, 결국은 이 물음은 답이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음속으로 지극히 들어가보니까,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계속 들어가다 보니까, 오직 모름만 남아. 모른다. 오직 모름만 남아. 오직 모름만 남으니까 이 모름속에는 일체 앎이 끊어지는 겁니다.

 

앎은 뭐에요? 안다는 것은 내가 처해져 있는 환경속에서 받아들여진 정보입니다. 만약에 내가 유럽에 태어났더라면 하나님을 믿고 성당에 다닌다든가 그렇겠죠? 이란이나 이라크에서 태어났으면 이슬람을 믿었겠죠. 과연 태어난 곳에 아니면 시대에 따라서, 원시시대에 태어났다거나 중세에 태어났다거나 때와 장소와 처해진 환경속에서 받아 들여진 정보와 앎이 에고를 만들어서 에고속에서 사물을 보는 관점이 생겨버린다 말이에요. 그건 잘못된거잖아요? 주관적이죠.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 소가 바라보는 세계, 물고기가 인식하는 세계가 다 다르잖아요? 그럼 사람만 옳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렇게 받아들여졌던 앎,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해요. 업장(業障)이라고 하죠.

 

모름속으로 들어가다 보니까 앎이 끊어지는 겁니다. 아는 것이 다 무너지는 거에요. 앎이 끊어진 자리는 업장이 무너지는 자리에요. 모름만 오직 남은 자리, 그 자리를 마음달 홀로 밝으니(心月孤圓). 마음달만. 알 수 없는 그 자리가 사실은 본성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는 거죠.”(명진스님)

 

 

명진스님에 따르면 이뭐꼬?’화두를 들어 화두를 타파했음을 말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오랫동안 의문했었는데 화두를 타파함에 따라 알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것을 내려 놓았을 때 비로서 보였다는 것이다. 이를 심월(心月)로 표현했다. 마음에 달이 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했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명진스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위대하고 성스럽고 휘황찬란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깨달음은 알수 없는 모름, 앎이 모두 끊어진 자리를 알아채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그 자리를 깨닫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알려고 묻는 것이 아니라 더 모르기 위해서 간절히 묻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광산에서 캔 금광석을 제련하듯이 제련과정을 거쳐야 함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수행이다. 수행도의 길로 가는 것이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빠라하다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습니다.”(A8.1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를 돈오점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있어서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단계를 말한다. 각단계에서는 도와 과가 있어서 모두 여덟 가지가 있어서 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라고 한다. 그런데 깨달음의 단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는 것이다. 수다원 단계를 견도(見道)라고 하고,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수행도(修行道)라고 하고, 아라한의 단계를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이렇게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명진스님의 도로아미타불

 

명진스님은 오직 모름만 남은 자리에 대하여 심월고원(心月孤圓)이라고 했다. 마음에 보름달이 뜻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도로아미타불로 설명했다.

 

흔히 도로아미타불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조선중기 생불로 추앙받던 지족선사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선사는 황진이를 만나서 파계했다. 이후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아라는 말이 생겨 났다고 한다. 그런데 명진스님은 도로아미타불을 달리 해석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도로아미타불, 제자리로 돌아오는 겁니다. 내가 처음에 나를 몰라서 나는 무얼까?’ ‘누굴까?’하고 물어서 출발을 했는데 돌아와보니까, 그 고생하면서 돌아와보니까 그 물음속에, 알 수 없는 물음속에 모든 앎이 끊어져서.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하늘에 달이 떠 있는데 구름이 가리고 있어요. 구름만 없어지면 달은 저절로 드러나잖아요?”(명진스님)

 

 

스님은 도로아미타불에 대하여 심월고원으로 설명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했는데, 의문하고 또 의문하다고 보니 의문이 끊어 졌을 때 구름이 걷힌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의 번뇌, 망상으로 비롯되어진 망념들이 없어져 버린 겁입니다.”라고 말했다. 의문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왔다고 해서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한 것이다.

 

달은 열반과 같다

 

심월(心月)은 어떤 것일까?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마타수행에서 니밋따(nimitta)같은 것일수도 있을 것이다. 광명상(光明相)을 말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빛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수행의 장애로 보고 있다.

 

심월과 관련된 게송이 법구경에 있다. 이는예전에 방일했더라도 그 뒤에 방일하지 않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Dhp.172)라는 게송을 말한다.

 

게송에서 구름을 벗어난 달(abbha mutto’va candimā)’은 어떤 의미일까? 주석에 따르면 길과 경지의 행복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길에서 얻어진 지혜로, 달이 구름에서 벗어나 허공을 밝히듯, 존재의 다발의 이 세계를 밝힌다.”(DhpA.III.169)라고 했다.

 

법구경에서 심월은 길(magga: )과 경지(phala: )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달로서 자신을 비추어 본다. 지혜가 생겨 자신을 비추었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자신에게 번뇌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자신이 잘 안다. 마음의 달로 비추어 보고서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의 길로 가는 것이다.

 

청정도론에도 심월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이는 성자가 되는 순간과 관련이 있다. 위빠사나16단계 지혜중에서 13단계 지혜에 해당되는 고뜨라부냐나(gotrabhu ñāna)라 하여 혈통전환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달은 열반과 같다. 하나의 바람이 차례로 구름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수순단계의 앎이 진리를 은폐하는 어둠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름이 제거된 하늘에서 그 사람이 청정한 달을 보는 것은 진리를 가리는 어둠이 제거되었을 때 혈통전환의 앎이 청정한 열반을 보는 것과 같다.”(Vism.22.9)

 

 

달은 열반과 같다고 했다. 마치 구름에 가려져 있는 달을 보는 것처럼, 지혜로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했을 때 청정한 열반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수행을 통하여 지혜가 계발되었을 때 열반을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네 단계, 즉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단계마다 열반체험 해야 함을 말한다. 각 단계마다 길(: magga)과 경지(: phala)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 단계마다 궁극적 경지라 볼 수 있는 열반체험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열반에 대하여 구름에 가려진 달로 비유했다.

 

경허스님의 임종게에서

 

명진스님은 심월고원(心月孤圓)과 관련하여 경허스님의 임종게를 소개했다. 경허스님의 임종게는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心月孤圓(심월고원)
光呑萬像(광탄만상)
光境俱忘(광경구망)
復是何物(부시하물)

 

마음달 외로이 둥근데

그 빛이 삼라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만상이 모두 사라졌으니

다시 또 이 무엇인가?”

(경허스님 임종게)

 

 

경허스님의 임종게를 보면 마음달과 빛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둥근 보름달이 만물을 비추듯이, 마음달도 자신을 비출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구절을 보면 빛도 사라지고 만상도 사라졌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다시 또 이 무엇인가? (復是何物)”라며 물었다.

 

명진스님에 따르면 마지막 구절이 참 멋지다고 했다. “다시 또 이 무엇인가?”라며 다시 묻는 것을 말한다. 다시 이뭐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명진스님은 이 물음이야말로 역대 조사, 부처, 온갖 성인이 다 나온 자리이고, 일체중생도 여기서 나왔고라고 했다. 심지어 외도들도 나온 자리라고 했다. 명진스님은 이에 대하여 나를 향해 물어가는 이 물음의 위대성을 봉암사에서 홀연히 알아채고 이제 제련소에 가서 순도 높은 금을 만드는 작업만 남았을 때, 그때 제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수행을 하여 탐, , 치와 같은 오염을 제거하는 것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멸진정에 들어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 체험을 하는 것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연기된 것이기 때문에 조건발생만 있을 뿐 실체적 자아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수행을 하여 열반이라는 궁극적 체험을 하면 그 다음 부터는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삶을 살게 된다. 견도에서 수행도로 바뀌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마음의 오염원이 제거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S22.59)라며 아라한선언을 할 것이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열반이 무엇인지 체험을 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만 전승된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명진스님의 체험, 경허스님의 체험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자아가 부서져서 더 이상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만은 알 수 있을 듯하다. 우다나에 깨달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0)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Ud.80)

 

 

2020-10-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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