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등, 시 간 의 흔 적 들 ~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한라산 겨울 여정 길에서

작성일 작성자 북을

 


설국의 세상, 겨울 한라산으로 길을 나선다.

 

구름 속에 초연히 솟아 하늘과 손잡고 지상을 이어주는 남한 최고의 산봉우리인 한라산(1,950m).

그곳엔 구름도 몸을 씻고 쉬어가는 신(神)들의 영지靈地로 통하는 눈부신 화엄의 세계이다.

 

이 탁한 도시의 부대끼는 삶을 잠시 내려두고 어디론가 떠나는 길은 이토록 홀가분하다.

어느 날 삶이 시들해지고, 허기질 때, 때론 이 삶이 덧없다고 생각될 때, 오늘처럼 마음 한조각 구름에 얹혀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낯선 행려의 객을 맞이하는 설레는 시간의 풍광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시들었던 풀잎이 빗줄기에 싱싱하게 일어서 듯, 지친 삶에 푸른 생기가 돌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제주도. 그곳의 바다는 펄펄 뛰는 푸른 생명들로 끝없이 넘쳐나고,

 파도는 진종일 눈부신 포말로 부서지며 사멸의 아름다움을 잉태한다.

 

 그 쪽빛 바다, 그리고 시작도 끝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검은 현무암으로 뒤덮인 땅,

성자처럼 초연히 솟은 눈부신 설산의 한라산 화엄의 세계,

봄이면 황금다발 온 몸에 두르고 눈부시게 일렁이는 유채꽃들, 

 

이 천혜의 땅은 제주만이 품고 있는 빛과 소리와 색채들로 곳곳에 오롯이 녹아 스며있다.  

 

 

 

 

 

 

 


나는 지금 두터운 어둠을 뚫고 천혜의 속살로 들어가고 있다. 

 

철나비가 고도를 낮추자, 기체가 몇 차례 심하게 흔들리는 듯 싶더니, 날개를 사뿐 접는다. 

공항 대합실을 스쳐가는 숱한 행려의 발길들, 문득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저 많은 사람들은 이곳 제주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워 돌아갈까 싶은 생각하며, 대합실을 빠져나오자,

이국적 정조情調의 야자수나무가 두 손을 흔들며 반긴다.

 

제주의 밤이 깊어간다.

 

겨울 창공에 밤에만 활짝 웃는 수줍은 여인처럼 둥근 달이 구름을 살짝 비집고 얼굴을 비친다.

그 비밀한 마음을 보일 듯 말듯, 부드러운 품으로 세상을 비추는 달빛이 뜨락에 쌓이는 밤이다.

저 하늘 어둠 속 별들도 꽃잎처럼 반짝인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발길이지만 제주의 밤은 이처럼 혼자서도 아름답게 익어간다.

 

 

 

 

 

 

 


지금쯤 회색빛으로 뒤덮인 떠나온 도시는 참으로 뻑직하게 어지러울 게다.

 

탄핵에 대선이다, 특검이다, 이에 세월호의 진실이다 뭐다 해대 싸며,

마른 입마다마다에 허연 거품을 물고, 쑥대밭 속에서 하늘로 나발을 불어 올리고 있을 게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한쪽에선 세상의 끝판을 보려고 작심한 듯, 어금니 불끈거리며, 두 눈에 불을 달고 모질게 칼을 갈고 있을 게다. 

대체 이 세상을 그 얼마나 절단 내려고, 저 실성기를 부리는지 모를 일이다. 

차라리 이참에, 역사를 거슬러 이 땅에 억울하게 죽어, 백골이 구만 리 장천 길에 떠도는 억울한 목숨의 혼백들을

모두 불러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제주의 바다를 피바다로 물들였던 4.3 민중항쟁의 그 뼈 아픈 상처부터

이 역사의 어두운 장마다에 꽃잎처럼 스러져간 그 무량한 목숨의 시간들을 파헤쳐 그 진실을 낱낱이 밝혀야, 

그 억울하게 간 혼백들의 서리서리 맺힌 그 한이 풀리지 않겠는가.

  

 

 

 

  

 


세상이야 벼랑 끝에 내몰려 허물어지든 자빠지든 말든, 

산자의 사지를 눌러 간과 심장을 도려내고, 고환을 볼가내며, 뼈를 발기는 그 추악한 집착의 이빨로 이 세상을 씹고 씹는다.  

대체 이 세상을 얼마나 발겨내야 그 염(念)이 풀리고, 그 원(願)이 풀릴 것이며, 그 한(恨)이 풀리겠는가.

 

사람들아,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아, 

 

인간사 한세상, 진실은 자신에게 있거늘, 그 진실 찾아, 시린 백골 돌아누운 언 산비탈에 마음 꼿아, 

끝 모를 원망의 눈빛을 이 세상에 퍼부어 대며, 못 다한 가슴만 치다가 끝을 낼 것인가.

 

부디, 부처의 자비가 이 세상 널리널리 통하고, 아가페(Agape)의 성수로 그 사랑이 온누리에 충만하도록, 

이 밤, 바다 건너 이국의 풍경이 넘실거리는 이 아름다운 제주의 어느 밤의 언저리에서 

행려의 객은 저 하늘 성관(星官)과 성두(星斗)께 기원을 띄우나니. 

 

  

 

 

 

 

 


그런 탓일까.

 

내일은 만 10년 만에 다시 찾는 ‘한라산, 그 눈부신 화엄의 세계에 드는 날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둥지를 떠나온 새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잠시 구름을 비집고 나온 넘실대는 달빛 탓인가,

보석처럼 빛나는 저 영롱한 별빛 탓인가.

바다 건너 환상처럼 솟구쳐 손짓하는 눈부신 화엄의 세상이 유혹하는 탓일까. 

뻑쩍지근한 내 어지러운 생각 탓일까. 

 

이리저리 뒤척인다.  

 

그리고, 깜박 잤는가 싶은데, 새벽 4시 경, 간 밤에 뒤척인 탓인가. 몸은 그리 가볍지 않은 듯하다.

 

  

 

 

 

 

 


새벽하늘이 흐리다.

 

아침 식사 후, 어둑어둑한 어스럼을 뚫고 30여 분을 달렸을까.

한라산의 산문인 성판악에 도착한다.

한라산의 겨울이 깊은듯 새벽 성판악휴게소는 희뿌연 어둠 속에 희끗희끗한 눈발이 매큼하게 날리고 있었다.

 그 공간 속에는 전국 도처에서 속속 모여든 산객들로 부산하개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근데, 이게 웬 일인가.

 

강풍 주의보가 발령되었다는 먹구름 같은 안내 멘트가 눈발을 타고 허공에 흩날린다. 

진달래대피소까지만 발길이 허용 된다는 안내 멘트였다. 

 

바람 불어 낙엽이 흩날리고 눈 내린 10년의 세월, 

그 세월 속에 문득 문득 떠오른 설산의 영봉은 하얀 그리움처럼 가슴으로 성기던 눈부셨던 백록의 세상이었는데. 

아니, 살다가 잊을 만하면 어느 날 문득 꿈결에도 나타났다 사러지곤 하던 백옥같은 여인이었는데,

오매불망 10년의 기다림을 목전에 두고, 손목 한 번 잡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한다니, 

못내 아쉬움은 마음 언저리로 사금파리가 긁고 지나간다. 

 

그랬었다. 

 

하지만 어쩌랴.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현실은 이내 체념을 문다. 

그 체념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산바람결에 휩쓸려 10년이 한결 같은 돌하루방의 마음을 굽어 더듬는다.   

  

 

 

 

 

 

 


산문에 든다. 

 

이제 문명으로 얼룩진 옷과 마음의 때를 벗어버릴 차례다.

메큼한 눈발이 날리는 산길에 한겨울 바람의 선율이 쉼없이 흐른다. 

때론 부드러운 손길처럼 때론 매서운 회초리처럼 때론 온화한 미소처럼 때론 격하게 천지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이 우주를 뒤흔드는 듯한 바람의 선율은 속밭대피소를 지나 진달래대피소까지 순도 높게 이어진다.

 

속밭대피소를 지나 진달래대피소로 한참 오름을 이어가자, 하얀 눈 위에 사슴의 발자욱이 찍혀 있다. 

조그맣게 찍힌 그 모양새가 참 소박하고 예쁘다.

누구를 향한 원망도 미움도 시기도 없는 순진한 초식동물의 눈동자를 그대로 닮은 듯 탐욕과 이기의 얼룩이 없다.

 

무릇 세상의 인간은 털어내지 못한 탐욕의 망상에 사로잡혀 늘 가마솥 들끓듯 펄펄 끓는데, 

눈망울이 산오디처럼 까만 그 쬐그만 초식동물의 발자욱이 눈 처럼 희고 깨끗하게 남겨져 있다.

 

저 티없이 순결한 쬐그만 발자욱이 산길 내내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이윽고 진달래대피소에 닿는다.

 

눈보라 자욱이 뒤덮힌 그곳엔 설화와 상고대가 기하학 무늬를 풀고 있다.

아름다운 설국의 세상이다. 눈길 가는 곳마다, 발길 닫는 곳마다 희고 깨끗한 속살내음을 보이며.

 설산의 저 눈부신 하얀 눈(雪)이 함박꽃으로 어우러져 백옥 같은 세상이 탄성을 터트리며 펼쳐진다.

 

이 경이로운 풍광은 사라오름에서 다시 한 번 펼쳐진다. 그랬었다.

설원의 세상에 펼쳐지는 순백의 아름다움. 그것은 환상과 같은 세상이다.

저 순백의 세상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부터 내 마음도 티 없이 맑아진다.

어쩌면 맑고 깨끗한 눈의 성정이 이 삶의 속기를 닦아주고,

우리 고달픈 삶의 시름을 잠시나마 닦아주는 영원의 빛깔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저 백설은 불완전한 운명의 불가해성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신(神)이 내리는 

가장 고결하고 숭고한 선물인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스친다. 

 

진달래대피소에서 혹시나 백록담 오름길이 열려 있나 싶어 걸음을 옮기니 굵은 쇠줄이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발길을 돌려 사라오름으로 향한다.

 

  

 

 

 

 

 


사라오름 길에서 어느 낯선 여인이 사려 담은 꽃잎처럼 걸어간다.

 

스치는 바람 끝에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유혹처럼 스친다.

저 향기를 여인의 향기라 했던가. 

꽃을 따서 향수를 만드는 여인인가 싶은 생각이 스친다. 아니, 별을 따서 향수를 만드는 여인인가 싶었다.

 

한 토막을 말을 건네고 싶었는데, 침만 꿀꺽 삼킨 채, 휑하니 앞질러 가는 나를 본다. 참으로 못난 사람처럼.

시퍼렇게 볼이 얼고, 입이 얼어 붙는, 그 혹독한 겨울 여정 길을 함께 걷는 아름다운 길손의 인연에게

'수고많습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넉넉하고 따듯한 위로의 말인가'

 

그 말 한 마디가 그토록 금싸라기처럼 아까워, 봉지에 싸서 궁색한 호주머니에 넣어버린 나를 보니,

대체 이 나이 되도록 뭘하며 살았는지, 한심한 나를 본다. 

 

이게 아니다 싶어, 다시  뒤돌아보니, 이미 그 여인은 자욱한 눈발 속에 꽃잎처럼 묻허버렸다.

 

눈발 속에 묻혀버린 아름다운 길손의 여인이여~ 미안하오~.

못난 사람이니, 어찌하겠소. 그려려니, 하시기 바라오~.

 

내 더 이상 그 무슨 말을 하리오.

  

 

 

 

 

 

 


사라오름에 선다. 온통 눈발이 휘날리는 설국의 세상이다.

 

이곳에 서면 천상을 받드는 눈부신 백록담의 성서러운 화엄의 세계를 친견할 수 있을진데,

흐린 하늘에 눈보라에 휩싸여 시계가 자욱하다.

 

허기 기운이 돌아서, 언 몸을 녹히려고, 보온병 뚜껑을 얼어 뜨거운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시퍼렇게 언 입이 제대로 벌려지지 않는다. 뜨거운 한 모금의 물이 목구멍을 타고넘어 갈 때, 

만년 빙산이 녹듯 속이 스르르 풀린다. 

 

세상천지에 따뜻한 물 한 모금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있나 싶다. 

 

비록 푸른 하늘을 이고 고고하게 우뚝 선, 백록담 그 눈부신 화엄의 세계를 친견하지 못했을지라도,

사라오름이 그 위안을 준다. 

 

 

 

  

 

 

 

 

 

 

 

 

  

 

 

 

 

 

 

 

  

 

 

 

 

  

 

 

 

 

 

 

 

 

 

  

 

 

 


이제 하산길에 든다.

 

삶의 유한성에서 보면 산(山)은 초월적 세계의 한 형상이며 영원성이다.

그러므로 산의 품은 무량하고, 그 덕(德)또한 무량하다.

그래서 저 품을 찾는 것은 나를 돌아보기 위함이요, 나를 조용히 성찰하여 그 내면으로 들기 위함일 게다.

 

 따라서 산의 품에 듦으로써, 인간은 그 품 속에 중화되어 

들끓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삭히고 또 그것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므로 저 산은 화엄의 세계요. 하나의 거대한 신전이며, 신(神)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곳은 인간의 마지막 한 줌 육신을 묻고 내세(來世)로 떠나는 최후의 거처요,

인간 탄생의 탯줄이요 그 자궁이 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겨울 한라산 등반 길에서._2017.01.14._ 북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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