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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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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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상칠언

 

때는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곳은 예루살렘 북쪽 성벽 밖 골고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일곱 가지 말씀(架上七言)을 하시고 운명하셨다 한다. 이제부터 그 사세구들을 차례로 살펴보겠다. 그리고 끝에다 요셉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가상칠언”(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osers am Kreuz)을 덧붙이겠다. 독어대역 우리말 역문은 서강대 종교학과 강사 강영옥 여사의 솜씨임을 밝혀둔다.

임종게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 하소서,
사실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루가 23,34; 사도 7,60참조).

저들을 용서하소서.


평소 예수께서는 원수사랑을 가르치신 바 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며 여러분을 헐뜯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오···”(루가 6,27-36). 그 가르침을 이제 몸소 실천하신다. 스테파노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 저들에게 이(살인) 죄를 씌우지 마소서”(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한다.

구상 시인은 예수의 원수사랑 임종게를 본떠서 새로운 기도를 빚었다.

그들은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보이게 하소서.
(구 상,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89년, 95쪽)

구상은 예수의 임종기도를 번안하면서 청원 내용을 고쳤다. 예수는 무지한 형리들을 용서해 주십사고 빌었는데, 구상은 무지한 중생을 조금이나마 깨우쳐 주십사고 빈다.

임종게 2: “진실히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루가 23,43).

 

성 디스마스(St. Dismas, 3월 25일)

 

 

성 디스마스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리셨을 때 함께 처형당했던 죄수 중 한 명이다. 예수 오른쪽에 매달렸던 '착한 죄수'로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로 간 축복받은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루카복음에 잘 나와 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39-43).

 

성경에는 죄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옛 문헌과 자료에는 착한 죄수가 디스마스라는 이름을 지녔다고 나와있다. 예수를 모독했던 이는 게스타스라고 한다.

 

 

성 디스마스는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성한 성인은 아니지만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를 성인으로 공경해왔다. 비록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었지만 예수를 알아봤고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께 구원을 청했고 그 바람대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또 그런 그에게 천국행 티켓을 선물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전해준다. 비록 죄가 많다 할지라도 성 디스마스처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늘나라의 축복을 내려주겠다고 보여주신 것이다.

 

사순 판공성사를 보기에 앞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께 구원을 청한 성인의 마지막 순간을 묵상해보자.

 

[평화신문, 2010년 3월 21일, 박수정 기자]

 

 

먼저 윗부분 그분의 왼쪽에는 나쁜 강도가 예수님을 모독하며 절규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 그의 절규에는 믿음이 없고, 단지 죽음에 대한 분노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오른쪽의 선한 강도는 그를 꾸짖고 나서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그의 애원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그의 마지막 희망을 반영하듯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 패가 붙어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다섯 상처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어 있지만 근육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강도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분은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죄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분이 세상의 참 임금 아닐까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인들은 영혼불멸을 믿었다. 그리스계 그리스도인인 루가는 그 영향을 받았던지, 신약작가들 가운데서는 좀 별나게 사후에 영혼이 영영세세 축복 또는 저주를 받는다고 보았다. 신약성서에선 대체로, 역사의 종말에 죽은 이들이 부활할 것을 기대한 반면, 죽음과 종말부활 사이의 운명은 거론하지 않는다. 루가가 사후 영혼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 언급한 단락은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12, 16-21) 루가의 가필(16,9),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16,19-31) 등이다.

같은 사상이, 예수께서 함께 처형된 죄수와 주고받는 대담에서 드러난다. 죄수가 “예수님, 당신이 왕권을 지니고 오실 때에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한다. 예수께서 역사의 종말에 재림하시거든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간청이다. 간청에 대한 답으로 예수께선 위의 임종게를 발설하셨다. 그 뜻인즉, 역사의 종말에까지 기다릴 것 뭐 있나, 오늘 당장 낙원에 데려가시겠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의인들이 죽어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곳을 낙원이라 하였다. 루가는 예수와 함께 있을 곳으로 살짝 고쳐 썼다.

임종게 3: “부인, 보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보라, 너의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성모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  애제자는 그리스도 교회를 상징한다. 둘 관계를 모자관계로 맺어  구원사의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교회를 아들처럼 모자관계로 선언.


공관복음에 다르면 골고타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께서 각별히 아끼신 애제자도 없었다. 이와는 달리 요한복음 작가는 성모님과 애제자가 십자가 아래서 예수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한다(요한 19,26-27). 이 일화가 공관복음서에 없는 점, 예수께서 어머니더러 ‘부인’이라고 하신 점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요한복음 작가가 꾸민 의도적인 이야기 같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술로 변화시킨 기적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요한 2,1-11). 잔치에 술이 떨어졌다고 성모님이 일러주시니 “부인, 제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2,4). 퉁명스레 예수는 대꾸하셨다. 아들이 어머니더러 ‘부인’이라고 하다니,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망발이다. 예수 친히 그런 무례한 호칭을 사용하셨을 리 있나? 복음 작가가 꾸민 말이겠지.

그럼 왜 하필 그런 불경스런 답변을 만들었지? ‘부인’ 호칭(2,4; 19,26)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보는 게 순리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적혀 있지만, 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듣는 게 옳다.

그럼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2,4) 라는 말씀의 뜻은? 죽으시고 부활하실 시간, 성부께로 올라가실 시간(13,1), 영광을 누리실 시간(12,23; 17,1),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시간이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때는 그랬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로 말하면 바로 그 구원의 시간이 닥쳤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옮겨가야 할 당신의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13,1), 성모님(=이스라엘 백성)과 애제자(=그리스도 교회)를 모자관계로 맺어주신다. 구원사의 전환점에서 성모님(=이스라엘 백성)은 애제자(=그리스도 교회)를 아들처럼 아끼고, 애제자 또한 성모님을 어머니처럼 섬겨 마땅하다는 말씀이다. 이 임종게를 받들어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 교회가 오순도순 살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서글픈지고,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새운 이천 년 어둔 밤이여.

이제까지 요한복음 19장 26-27절의 한 가지 풀이만 소개했다. 달리 풀이하는 수도 있다. 곧, 십자가 아래 계신 마리아는 교회를 뜻하고 애제자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는 풀이도 있다(R. E. 브라운). 어머니가 아들을 돌보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살피고, 또한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뜻을 지닌 상징적 이야기라는 학설이다.

끝으로 마리아론적 질문 한 가지. 그럼 요한계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단순히 상징적 인물로만 보았나? 아니다. 요한계 교회에서 실제 인물 애제자(=예수 언행의 전승자)를 무척 사랑했듯이, 또한 실제 인물 마리아도 극진히 섬겼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실 뿐 아니라 또한 애제자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에 루가가 마리아를 신앙인의 귀감으로 공경했듯이, 이제 요한계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이중 어머니로 섬겼다.

임종게 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시편 22,2).

 

나의 주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르코 복음서에 있는 하나뿐인 임종게이다.

엘리사벳 퀴블르로스 여사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밝혀냈다(<인간의 죽음>, 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1979년). 이른바 임종의 5단계인데, 중환자들은 대체로 ① 부정 ② 분노 ③ 타협 ④ 우울 ⑤ 순응의 단계를 거쳐 임종에 이른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15장 34절의 임종게는 임종의 넷째 단계처럼 보인다. 우울과 슬픔을 넘어 원망과 절망의 감정이 폭발한 것 같다.(엘리스 러브킨, <무엇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신혜란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89년, 122-123쪽 참조; <신학전망>91호, 1990년 겨울호, 53쪽에 소개된 몰트만의 견해 참조). 비록 동족들과 제자들에게서는 버림을 받았어도 하느님 아빠만은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그분에게서조차 버림 받았다는 고독감, 절망감이 사무쳤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처절한 심정을 시편 22장으로써 토로하신 점에 유의하라. 시편 22장은 고통을 겪는 의인이 하느님께 구원을 하소연하는 간구였다. 그러니까 예수는 죽음의 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에 희망을 걸었던 셈이다.

 

i목마르다, 요한 19,28.

 


임종게 5: “목마르다”(요한 19,28=시편 22,16; 69,22).

 

 다 이루었다.. /임종게 6: “끝났다”(요한 19,30).

요한복음 19장 28-30절 전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예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성경(말씀)을 끝내시고자 ‘목마르다’고 하셨다. 29 식초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군인들은) 식초를 가득 적신 해면을 히숩에 감아서 그분의 입에 갖다 바쳤다. 30 예수께서는 식초를 받으신 다음 ‘끝났다’고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넘겨주셨다.”

우선 씌어진 그대로 28-30절을 새겨보자. 예수는 편태, 십자가의 길, 십자가 처형 등으로 많은 피를 흘리신 까닭에 임종 직전에 “목마르다”고 하셨다. 그러자 사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이(23절) 예수의 갈증을 해소시키고자 해면을 식초에 듬뿍 적셔 예수의 입에 대어주었다. 여기 ‘식초’는 요즘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초가 아니고 신 포도주로서, 물에 타 마시면 갈증을 풀어주기 때문에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흔히 마시던 음료였다.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다.

그런데 식초에 듬뿍 적신 해면을 ‘히솝에 감았다’는 것은 전혀 사리에 어긋난다. 히솝(히브리어로는 ‘에좁’, 그리스어로는 ‘휘소포스’ 우리말로는 ‘우슬초’)은 작고 덥수룩한 다년생 풀로서 뿌리가 잘 뻗어 무더기로 군생하는데 높이와 넓이가 각각 50센티미터쯤 된다(이 가르침을 베풀어주신 이창복 박사께 삼가 사은의 말씀을 드린다). 구약시대 종교의식에서는 히솝 다발로 물이나 피를 뿌렸다(레위 14,4-7; 민수 19,18; 시편 51,9).

그렇지만 히솝 풀대는 너무 약해서 거기에다 해면을 감아 치켜 올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해면을 히솝에 감아서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는 요한복음서의 기사는 아무래도 신빙성이 약하다. 오히려 “해면에 식초에 적신 다음, 갈대에 감아서 예수로 하여금 마시게 했다”는 마르코복음 15장 36절의 기사가 믿을 만하다. 어쨌거나 예수는 해면에 밴 식초를 빨아 잡수신 다음 “끝났다”고 하시며 임종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구적 해설에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작가는 일상적 의미 저 너머 상징적 의미에 매우 마음을 쓰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상징적 의미와 관련하여,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성경(말씀)을 끝내시고자···, ‘끝났다’고 하시고”에 있어 도대체 무엇이 끝났다는 것인지 그 깊은 뜻을 밝힐 일이요, 아울러 ‘목마르다’의 고차원적 의미도 규명할 일이다. ‘끝나다’(원전에선 죄다 수동형)와 ‘목마르다’의 상징적 의미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4장 34절 :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내는 것입니다.”

*6장 37-40절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이는 다 내게로 올 것이고 또 내게 오는 이를 나는 결코 밖으로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주신 이는 모두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이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17장 2-4절 : “2당신이 아들에게 모든 육신을 다스릴 권능을 주신대로, 그는 당신이 그에게 주신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3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 당신을 알고 또한 당신이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저는 당신이 제게 하라고 주신 일을 끝내어 땅 위에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18장 11절 :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넣으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의 구절들을 눈여겨보건대, 예수께선 성부께서 뜻하신 일, 성부께서 맡기신 일, 곧 신앙인들에게 영생을 베푸는 일을 끝내셨다는 뜻으로 “끝났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 임종게에는 파국이 아니라 완성의 뜻이 담겨있다. 아울러 “목마르다”라는 임종게로써 저 성업을 완성하시려는 염원을 드러냈다. 고난과 죽임을 겪을지라도 결단코 그 일만은 완수하시겠다는 결의가 번뜩이는 사세구이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루가 23,46=시편 31,6).


임종게 7: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시편 31,6).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외치신 마르코 복음 15장 34절의 임종게가 예수의 절망적인 최후의 발악인 양 오해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루가는 그것을 지우고 그 자리에다 “아버지, 제 영(=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시편 31,6)라고 고쳐 썼다. 이는 본디 유다인들이 바치던 저녁기도문이었다(바빌론 탈무드, 브라콧 5a). 서산에 해가 넘어가는 때에 바치던 동족들의 기도문을 예수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바치셨다는 것이다. 곧 임종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루가는 서기 36년경, 그리스도인으로는 맨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스테파노의 입에도 루가복음 23장 46절 임종기도문과 매우 닮은 임종기도문을 담았다 : “주 예수님, 제 영(=목숨)을 받으소서”(사도 7,59). 예수께서는 당신 생명을 하느님 아빠께 맡기신 데 비해서, 스테파노는 자기 생명을 주 예수께 맡기셨다는 식으로 루가는 약간 변조했다. 예수님, 그리고 스테파노의 임종게는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의 임종게가 되어야 한다.

요셉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서소. 사실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 하옵니다”(루카 23,34).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영원한 권좌로부터 굽어 살피소서.
사랑의 아버지!
당신의 독생자가 죄인들을 위하여,
죄 많은 당신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당신 아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오, 저희는 타락하여 죄의 늪에 깊이 빠졌나이다.
그런데도 당신 아들은 이런 저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를 흘렸나이다.
저희 모두를 위하여.
양의 피는 복수를 외치지 아니하고 죄를 씻어 내리나이다.
사랑의 하느님, 저희로 하여금 자비를 깨닫게 하소서!
당신 아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진실히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 입니다”(루카 23,43).

하느님의 어린양
자비와 은총과 사랑이 넘치는 당신은 우리를 구원 하신 분
누구라도 참회의 마음으로
‘당신 왕국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외친다면,
당신은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약속하십니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 저희를 굽어보소서!
당신 십자가의 발아래 참회하고 속죄하는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그날 그 시간에 저희에게도 당신이 하신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소서.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 입니다!”라는 말씀을.

3.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던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부인, 보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셨다 그러시고
그 제자에게 ‘보라, 너의 어머니시다’ 하셨다(요한 19,26-27).

예수의 어머니, 당신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울고 한숨지으면서 십자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순간에
당신 아들의 고난보다 더한 아픔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하며 침착하셨습니다.
진실한 제자들을 당신 아들로 삼으소서.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저희도 당신 아들로 받아들이소서.
예수의 어머니!
오, 당신의 모든 죄인들의 피난처이십니다!
당신 자녀들의 간청을 들어 주소서!
마지막 싸움 때 저희 편에 서주소서.
사랑으로 가득 찬 어머니!
저희가 죽음과 맞붙어 싸울 때,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짓는 소리가 당신께 다다를 때,
저희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소서.
어머니,
저희로 하여금 쓰러지지 않게 해주소서.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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